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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선택한 왜장 - 조선인 김충선으로 다시 태어나다
게시물ID : humordata_26919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차녕이~^^*
추천 : 16
조회수 : 676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05/08/24 19:15:50

평화를 선택한 왜장 - 조선인 김충선으로 다시 태어나다



[조선일보 박종인, 김영훈 기자]

“임진년 4월 일본국 우선봉장 사야가(沙也可)는 삼가 목욕재계하고 머리 숙여 조선국 절도사 합하에게 글을 올리나이다.
지금 제가 귀화하려 함은 지혜가 모자라서도 아니오, 힘이 모자라서도 아니며 용기가 없어서도 아니고 무기가 날카롭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저의 병사와 무기의 튼튼함은 백만의 군사를 당할 수 있고 계획의 치밀함은 천길의 성곽을 무너뜨릴 만합니다.
아직 한번의 싸움도 없었고 승부가 없었으니 어찌 강약에 못 이겨서 화(和)를 청하는 것이겠습니까.
다만 저의 소원은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뿐입니다(…)”

˙˙˙

왜장 사야가(沙也可).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의 우선봉장으로 군졸 삼천과 함께 동래성으로 상륙. 그리고 다음날로 조선에 투항. ‘명분 없는 전쟁은 불가’라 했다.
 
그리고 곧장 조선군과 함께 일본군에 대항해 전쟁에 참가.
조선 왕실에서 김충선(金忠善)이라는 성과 이름을 내림.
현재 전국에 17대까지 대략 2000세대, 7000여명 후손이 있음.
주요 후손 김치열 전 내무부장관, 김재기 전 수원지검장.
 
400년 전 전쟁에 반대하며 조국을 등졌던 청년 장수의 믿기지 않은 이야기.

˙˙˙

선조가 김충선(金忠善·1571~1642)이라는 성명을 내려준 사야가 장군 집성촌은 냉천에서 8㎞ 들어간 우록동(友鹿洞)에 있다.
“조선 문물을 흠모해 귀화한 할아버지는 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이괄의 난에 공을 세워 ‘삼란공신’이라는 칭호를 받으셨죠.
조선에게는 대충신이요, 일본에게는 천하 반역자일게요.”
14세손 김재석(67)씨가 말했다.

선조는 그의 성인 모래(‘沙’)에서 나오는 금(金)과 바다 건너 온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합쳐 김해(金海)를 본관으로 정해줬다.
왕이 내린 본관이라 해서 사성(賜姓) 김해 김씨라 부른다.

김충선은 진주목사 장춘점의 딸과 결혼했다.
그리고 조정에서 내린 벼슬과 논밭을 “당연히 신하로서 할 도리”라며 마다하고
산수 좋은 달성땅에 내려와 거처를 우록동(友鹿洞)이라 칭하고 사슴과 벗하며 학문에 열중하다 죽었다.
사후 유림에서 조정에 소를 올려 그 무덤 아래에 녹동서원과 사당을 짓고 그를 추모했다.
서원 대문에는 향양문(向陽門)이라는 현판이 걸렸다.
뒤편에는 사당 녹동사(鹿洞祠)가 서 있다.
뜰에는 모하공김공유적비(慕夏公金公 遺蹟碑)가 영산홍, 수국, 모란, 향나무, 무궁화 사이에 서 있다.

˙˙˙
1915년 모하당문집이 재간되자 일본학자들은 “이와 같은 매국노가 동포 중에 있는 사실을 믿는 이가 있는 것은 유감의 극”이라고 할 만큼 증오의 대상이 됐다.
“조선이 꾸민 조작극”이라는 말까지 나왔고 이런 분위기는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1970년대 일본에서 국부로 추앙받는 소설가 시바 료타로가 우록동을 방문해 책을 쓰면서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었다.
1992년 임진왜란 및 김충선공 귀화 400주년 기념제가 녹동서원에서 열렸다.
‘천하의 매국노’가 그곳에서 위대한 평화론자로 부활한다.
NHK방송은 ‘출병에 대의 없다-풍신수길을 배반한 사나이 사야가’라는 다큐멘타리를 내보냈다.

˙˙˙

그리고 후손들에게 이같은 가훈을 남겼다.

“절대로 영달을 바라지 말 것이며 농사짓고 살라.
여유 있을 때 틈틈히 공부하며 사람답게 보내라.”
이방인으로 타국에 뿌리 내리려면 절대로 드러지 말고 겸손하게 살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

그 우록동은 후손들이 일궈낸 논밭으로 온통 녹색이다.
서원 윗편으로는 김씨 문중이 개발을 금지하고 있다.
서원 옆에 기념관이 서 있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를 아우르는 훌륭한 역사교육현장이다.

우록동은 늘 사람들로 붐빈다.
광복절인 지난 월요일, 여느해와 마찬가지로 일본관광객들이 띄엄띄엄 찾아왔다.
 
세상, 어지럽고 복잡하고 갈등과 분열 가득한 세상.
400년 전 한 젊은이가 걸어간 길을 되짚어 보시길.

*우록동과 김충선에 관한 정보는 www.sayaga.net에서 볼 수 있습니다.



>> 김충선과 조총

1590년 일본국 사자 히라요시(平義智)가 선조에게 조총 한 대를 진상했지만 조정에서는 코웃음을 쳤다.

 

2년 뒤 그 코웃음친 무기를 마구 쏴대는 왜군에 쫓겨 선조는 빗속에 파주땅으로 야반도주하는 운명이 됐다.

 

당시 조선군 무기체계는 어떠했나.

유명한
행주산성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것은 창도 활도 칼도 아니었다.

 

바로 아녀자들이 행주치마로 날랐던 짱돌들이었다.

 

임란 초기 육전에서 조선군이 형편없이 패퇴를 거듭한 것은 바로 무기체계 차이 탓이었다.

 

돌을 동원해야 할 정도로 원시적인 무기와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조총(鳥銃)이라는 첨단 살상기계는 애초부터 싸움이 안됐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조선 육군 손에 조총이 쥐어지며 육전 전세는 바뀌게 된다.

 

학계에서는 임란 이듬해(1593) 이순신 장군이 조총을 만들어 퍼뜨린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모하당문집에는 아래와 같은 편지가 들어 있다.

“소장이 귀화한 이후에 본국의 병기를 둘러볼 때

 

비록 칼과 창과 도끼와 활이 있기는 하나 직접 전투에 당해서는 쓸만한 무기가 거의 없으니 개탄할 일입니다.

 

둔한 무기로 싸우는 것은 자기 군사를 적에게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소장이 화포와 조총 만드는 법을 알고 있으니 이 기술을 군중에 널리 가르쳐 전투에 쓴다면 어떤 싸움엔들 이기지 못하리까?”

 

귀화를 선언한 직후 김충선이 절도사에게 보낸 서신이다.

“…하문하옵신 조총과 화포와 화약 만드는 법은 전번에 조정에서 내린 공문에 의하여 벌써 각진에 가르치고 있는 중이옵니다.

 

바라옵건대 총과 화약을 대량으로 만들어서 기어코 적병을 전멸시키기를 밤낮으로 축원하옵니다.”

 

이순신 장군이 보낸 서신에 대한 답신이다.

 

그래서 신식병기로 무장한 육군이 탄생해 임란은 물론 재란, 병자호란에 투입됐다.

 

김충선에 대한 이야기는 1998년 한일 양국 교과서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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