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법천지 ‘긴급조치 시대’ 법정에선 무슨 일이? [경향신문 2007-01-30 19:06]
1974년 개헌을 주장하던 언론인 고 장준하 선생(오른쪽)이 긴급조치 1호 위반혐의로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70년대 법정은 정권유지를 위해 또 다른 군사작전이 펼쳐졌던 공간이었다.” 최근 재심을 통해 32년 만에 무죄가 선고된 인혁당 사건 피고인들은 법정에서 “구타에 의해 강요된 진술”이라고 저항했지만 당시 재판부는 “그렇게 볼만한 증거가 없다”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재판부는 검찰이 넘긴 수사기록에 대해 피고인을 상대로 확인심리도 하지 않았다. 피고인들은 판결문조차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1심에서 3심까지의 판결문은 날짜만 다를 뿐 내용은 모두 똑같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독재 시절 긴급조치 위반 사범이 섰던 법정에는 ‘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법에 보장된 피고인의 저항권과 방어권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변호인의 조력권 역시 ‘법 조문’에만 있는 권리였다. 변호인(강신옥 변호사)이 법정에서 피고인을 변론하다 구속되는 일도 벌어졌다. 국선변호인은 변론을 위한 접견을 단 한차례도 하지 않았다. 재판부에 반대심문을 요청했지만 당시 재판장이었던 군 장교는 “필요없다”며 재판을 종결했다. 긴급조치를 위반한 주요 재판은 중앙정보부의 감독 대상이기도 했다. 중정요원은 법정에 들어와 판사가 피고인에게 소명기회를 주는지, 공소내용에 반하는 질문을 하는지를 지켜보며 일일이 기록하는 방식으로 재판부를 옥죄었다. 판결이 중정과 검찰이 예상한 결과대로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러나 가끔 이같은 철칙에서 벗어난 용기있는 판결이 나오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1976년 11월 서울 영등포지원의 이영구 판사(74·현 한복합동법률사무소 변호사)는 긴급조치 위반혐의로 기소된 현직 교사에 대해 ‘쉽지 않은 판결’을 내렸다. 이판사는 수업중 “북한에 지하철이 있다”는 말을 했다고 해서 유언비어를 유포한 혐의로 기소된 교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는 지방법원으로 좌천됐고 결국 법복을 벗었다. 이판사는 30일 전화통화에서 “유신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제도를 총동원하던 시절이었고 법원은 긴급조치의 정당성을 용인하는 마지막 관문 역할을 했다”고 술회했다. 그는 “이를 부정하는 판사의 저항도 인정될 수 없었는데 피고인들은 오죽 했겠느냐”면서 “억울해하고 소명을 하려 해도 더 중한 벌이 내려질까 묵묵히 참는 피고인들이 대다수였다”고 당시 법정을 회고했다. 〈조현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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