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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과 축구경기를 앞두고 한국관련된 이란전설【쿠쉬나메】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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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MICHALLE
추천 : 3
조회수 : 1199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6/10/10 15:13:00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212191044111 

■‘Shilla의 현현’ 

2010년 5월 어느 날이었다. 중동 전문가인 이희수 한양대 교수(문화인류학과)에게 흥미로운 연락이 왔다. 

“이 교수가 확인해야 할 것 같네요. 신라와 관련된 내용인 것 같은데….” 

이란 국립박물관의 동아시아 담당 큐레이터이자 아자드대 교수인 다르유시 아크바르자데 교수였다. 고대 페르시아어 전공자인 다르유시 교수의 연락내용은 흥미진진했다. 

즉 1998년 이란 학자 잘랄 마티니 교수가 오랫동안 구전으로 내려온 서사시를 모아 책으로 펴냈다는 것. ‘쿠쉬나메(Kush-name)’라고 하는 이 서사시의 원 편찬자는 11세기 대학자인 이란샤 이븐 압달 하이르였다. 그런데 다르유시 교수는 이 책 내용에 ‘shilla(실라)’, ‘즉 신라와 관련된 내용이 엄청난 분량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이희수 교수에게 알려준 것이다. 

쿠쉬나메, 파천황의 자료 

자료를 입수한 이희수 교수는 깜짝 놀랐다. ‘페르시아와 신라가 혈맹관계’ 였음을 알리는 방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멸망한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족이 신라의 공주와 혼인, 왕자를 생산하고, 그 왕자가 이라크로 귀국해서 폭정자를 물리친다는 것이다. 

현재 이 교수를 비롯한 국내학계와 다르유시 교수를 비롯한 이란 학계가 ‘쿠쉬나메’ 해독 및 번역작업을 벌이고 있다. 총 243쪽에 달하는 필사본 원본은 현재 영국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쿠쉬나메는 총 1만129 쿠플레(대구·對句)가 넘는 방대한 양을 자랑한다. 이란내에서도 가장 중요한 구전 서사시이다. 그 가운데 신라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구절은 1만219절 중에서 2011~5925절 사이를 구성한다. 역사기록으로 살펴볼 때 사산조 페르시아는 637년 카디시야 전투에서 아랍군에게 패배한 뒤 모술·니하반도·하마드한·라이·이스파한 등 주요도시들을 잇달아 잃으면서 멸망한다. 

사산조 페르시아의 마지막 황제 아즈데기르드의 왕자 피루즈는 끝까지 저항했으며, 중국으로 망명한 뒤에는 이란인 잔존세력과 공동체를 이뤘다. 

대서사시인 ‘쿠쉬나메’의 역사적인 배경은 바로 이 무렵(7세기 중반), 마지막 왕자 피루즈가 중국으로 망명한 뒤 사망한 시점인 것으로 보인다. 

‘쿠쉬나메’에서 ‘쿠쉬’는 실존인물이라기 보다는 구전상의 영웅이다. 7세기말 아랍의 침공을 받아 멸망한 사산조 페르시아 말기의 중국 왕으로 묘사된다. ‘나메’는 ‘서(書)’이다. 말하자면 ‘쿠쉬나메’는 ‘쿠쉬서(書)’인 것이다. 



■신라로 망명한 페르시아왕자 

다음은 이희수 교수가 지금까지 번역한 ‘쿠쉬나메’의 내용이다. 이희수 교수는 한국·이란 학자들이 한창 번역 중인 내용을 조심스럽게 필자에게 전했다. 

7세기 중반, 사산조 페르시아의 멸망 이후 중국에 망명한 이란인들의 공동체를 지휘하던 인물 가운데 아비틴(Abtin)이 있었다. 그런데 아비틴은 중국 내의 정치적인 대혼란기에 이란 공동체가 도륙을 당하게 되자 망명을 결심한다. 아비틴이 이끄는 이란 공동체는 마친(Machin·중국의 주변국)왕의 주선으로 신라로 망명한다. 마친왕은 “신라 왕 타이후르(Tayhur)를 추천한다”면서 “신라는 낙원이나 다름없으며, 침략이 불가능한 안전한 나라”라며 신라를 망명지로 추천한 것이다. 

신라왕 타이후르는 아비틴 일행이 신라에 도착하자 극진하게 영접한다. 우선 두 아들이 인솔하는 대군대를 항구로 보내 아비틴 일행을 환대한다. 망명단은 타이후르의 성(城)으로 향한다. 음악이 흐르고 성대한 축제가 열린다. <쿠쉬나메>의 저자는 타이후르의 성과 골목, 길가, 정원, 도시의 주변 모습, 신라의 아름다운 음악과 연주자들, 정원의 새들, 왕의 환대 등을 자세하게 묘사한다. 

타이후르는 이비틴과 함께 황금왕좌에 앉아 연회를 베풀며 긴밀한 대화를 나눈다. 아비틴이 ‘중국으로의 송환’을 걱정하자 타이후르는 “신라는 중국의 속국이 아닌 독립국”이라며 “당신 일행을 도울 것”이라고 다짐한다. 그 증표로 진귀한 선물을 건네준다. 아비틴과 타이후르는 이란의 스포츠인 폴로(격구)를 즐긴다. 원래는 ‘신라 대 이란’으로 팀을 나눠 경기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아비틴은 국가간 경기가 과열양상으로 치닫을 것을 우려한 나머지 양국 선수들을 섞어 경기를 치른다. 타이후르는 “이란인들의 폴로실력이 대단하다”고 격찬한다. 



■신라의 해상봉쇄에 나선 중국 

이란 남성들이 이란 유적을 답사하던 한국여성에게 ‘양금이’하면서 다가와 사진을 함께 찍고 있다. 필자 일행이 2008년 2월 이란답사 중 겪은 흥미로운 광경이다. 
이란 남성들이 이란 유적을 답사하던 한국여성에게 ‘양금이’하면서 다가와 사진을 함께 찍고 있다. 필자 일행이 2008년 2월 이란답사 중 겪은 흥미로운 광경이다. 

중국의 쿠쉬(왕)는 이란인들이 신라로 망명했다는 소식에 분노한다. 신라왕과 아비틴은 협박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낸다. 타이후르는 모욕감이 치를 떨며 아비틴에게 “가장 강경한 어조로 답장을 보내라”고 요청한다. 중국 왕은 대대적인 침공에 나선다. 하지만 신라-이란 연합군은 곧 중국 침공군을 대파하고 대륙으로 쫓아낸다. 허겁지겁 도망간 중국왕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다시는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신라를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대신 신라를 계속해서 포위하고 타이후르가 스스로 항복하게 해라.” 

말하자면 직접 공격 대신, ‘해상봉쇄를 통한 경제제재’가 효과적인 공세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마치 요즘 서방의 이란 경제제재를 방불케 하는 대목이다. 중국왕이 이란인들의 신라망명을 주선한 마친왕을 핍박하자 신라-이란 연합군은 중국 원정길을 떠난다. 아비틴이 지휘하는 연합군은 중국의 심장부를 점령한 뒤 전리품의 반을 신라에 보낸다. 



■신라 공주와 결혼하면?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끈 아비틴은 다시 신라왕 타이후르의 환대를 받는다. 아비틴은 타이후르의 딸인 신라공주 프라랑(Frarang)과 혼인할 마음을 갖는다. 측근들로부터 “신라 소녀들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덕까지 갖췄으며, 그 가운데 신라공주가 최고”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비틴은 타이후르를 만나 조심스럽게 “따님과 혼인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신라왕은 주저한다. 

“신라법에 이방인에게 딸자식을 내주지 않아요. 내가 딸을 내준다면 귀족들이 우습게 볼 겁니다.” 

아바틴은 자신이 이란의 전설적인 왕인 잠쉬드(Jamshid)의 후예임을 강조하면서 “절대 우스운 혼인은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고민하던 타이후르는 마침내 혼인을 승락한다. 

<쿠쉬나메> 인쇄물. 사시의 원 편찬자는 11세기 대학자인 이란샤 이븐 압달 하이르였다. |한양대 문화재연구소 제공 
<쿠쉬나메> 인쇄물. 사시의 원 편찬자는 11세기 대학자인 이란샤 이븐 압달 하이르였다. |한양대 문화재연구소 제공 


하지만 조건을 단다. 아비틴이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공주 프라랑을 10명의 처녀들 틈에 섞어 놓고는 “찾아보라”고 시험한 것이다. 

아비틴은 좌절하지만, 몰래 공주의 인상착의를 가르쳐 준 측근들의 기지 덕분에 공주를 찾는다. 우여곡절 끝에 혼인이 성사됐다. 성대한 혼인식을 치른 아비틴-프라랑 커플은 아이를 임신한다. 

그런데 아비틴의 꿈에 “장차 태어날 왕자가 바그다드의 자하크(아랍의 폭정자)을 물리치고 이란인의 복수를 해줄 것”이라는 계시가 나타난다. 신라왕은 낙담했지만 부부를 떠나 보낼 수밖에 없었다. 프라랑은 이란으로 가는 배에서 왕자를 생산한다. 왕자의 이름은 파리둔(Faridun)이다. 이란에 도착한 아비틴은 자하크의 맹공세에 그만 전사하고 만다. 너무 어렸던 파리둔은 아버지의 죽음을 모른채 신하들로부터 교육을 받으며 자란다. 



■중국대륙을 점령한 신라 

한편 신라도 6년에 걸친 중국왕 쿠쉬의 맹공에 말려 누란의 위기에 빠진다. 

타이후르의 아들 가람은 이 전투를 대승으로 이끈 주역이 된다. 이 무렵 신라왕 타이후르는 이란에 있는 딸 프라랑의 편지를 받는다. 

“아버지, 저의 아들, 파리둔이 자하크를 패배시키고 철끈으로 묶어 산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모든 군대를 죽였습니다.” 

타이후르는 매우 기뻐하며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 타이후르는 마친에서 중국에 이르기까지 바하크의 땅으로 남아있던 곳을 차지하고, 중국의 수도 호마단(Khomadan)까지 점령한다. 

타이후르는 중국과 마친에서 7년을 보냈고, 결국 병들어 신라로 돌아와 신라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타이후르의 아들 가람이 왕좌를 이어 신라를 다스린다. 

이상이 이희수 교수가 전한 <쿠쉬나메>, 대강의 내용이다. 이희수 교수의 말마따나 이 서사시에 역사적인 정당성을 주기는 쉽지 않다. 

“쿠쉬나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음역이 당시 신라사회의 지명이나 인명과 일치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당시 신라 왕실이나 사회를 정확하게 묘사한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신화나 서사시, 전설은 그 민족의 문화원형이자 역사원형이다. 그리스 로마신화가 서구문화의 원형이 됐고, 단군신화가 한민족 역사의 원형이 됐듯, 쿠쉬나메는 페르시아 문화와 역사의 원형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이희수 교수는 “기존 학계의 고고학, 민속학, 역사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유용한 해석의 길잡이임에는 분명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쿠쉬나메는 새빨간 거짓의 기록인가, 아니면 뭔가 흥미롭게 해석할 여지가 있는가. 이제 <쿠쉬나메>에 숨겨진 비밀의 단서를 하나하나 살펴보자. 



<참고자료> 

이희수, <이슬람과 한국문화>, 청아출판사, 2012 

<중동지역 한국학 관련 고문헌 및 역사 어문자료 기초조사>,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세계지역종합연구 협동연구총서’. 대외경제정책연구원, 2011 

<고대 페르시아 서사시 쿠쉬나메(Kush-nameh)의 발굴과 신라관련 내용>, 한국연구재단 인문한국지원사업 지원연구소, 2009 

정수일, <한국 속의 세계 하>, 창비,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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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허무맹랑한 내용만으로 치부할수는 없는게. . 작품에서 시대분위기를 읽을수 있는 부분이.많이.보입니다. 

신라와 중국이 대립하고 전쟁을 치루는 내용이 많은걸로 봐서 저 내용중 상당부분은 신라가 아니라.고구려가 모티브가 된게 아니었을까 추측해봅니다.물론 신라도 나중에 당군과 전쟁을 치르지만 신라군이 중국중심부를 점령했다는 부분이나 전투에 발린 중국이 경제봉쇄로 신라를 말려죽이려했다는 부분이 나당전쟁보다는 오히려 고당전쟁에 더 부합되지않나 싶어서요. 고구려 각저총 벽화에도보면 씨름꾼들중에 아랍인으로.보이는 얼굴이 있었죠. 

주인공의 상황을 봐도 아비틴이 중국에서 고난을 당하고 망명할경우 중국의 졸개인 신라보다 적대관계이고 대항마였던 고구려로 가는게 훨씬 더 입지에서 유리합니다. 중국왕이 죽으면서 다시는 신라를 침략하지말라고 유언을 남기는것도 당태종이 죽으면서 고구려정벌을 멈추어라한것과 겹치구어. 

그나저나 저내용중 가장 큰 모순은 작품이름이 쿠쉬나메라는거. . . 기사에 나온것처럼 중국왕 쿠쉬의 책이라는 뜻인데 정작 쿠쉬는 엑스트라인데 ㅋㅋ차라리 실라나메로 짓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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