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지웅’이라는 이름은 중독성이 강하다. 한 번 부르면 금새 또 부르게 된다. 허지웅. 허지웅. 내가 인스타 팔로우하는 100명이 조금 넘는 사람 중에 팔로워가 1만 명이 넘는 유일한 사람이고, 인스타에 올라오는 글을 보면 냉소적인 성격이 글에 그대로 묻어난다. 더 많은 글을 읽고 싶어 허지웅의 책을 샀다.
<버티는 삶에 관하여>는 딱히 버티는 삶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살아오는 동안에 기억나는 에피소드들. 본인과 가족의 이야기. 사회적 이슈와 정치에 대한 본인의 입장들이 엮여있다. 조금 실망했던 부분은 당연한 이야기를 당연하게 한다는 점이었다.
청소는 쓸고 닦는 게 아니라 닦고 쓰는 거라는 주장을 펼치는 글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읽다가 결국엔 논리에 설득당한 신박한 글이긴 했다.
나는 책을 통해 일탈을 꿈꾼다. 당연한 이야기를 당연하지 않게 이야기한다든지, 당연하지 않은 일을 당연하게 말하고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걸 좋아한다. 그게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한데, 예를 들어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의 “그녀를 끌어안은 건 황홀한 경험이었다. 비록 옷을 입고 있었지만.”같은 문장을 좋아한다.
“연예인은 ‘유명인’이지 ‘공인’이 아니기 때문에 개성과 신념을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언론인은 검증되지 않은 정보로 오직 클릭 수를 위한 마녀사냥을 그만 두어야 한다.”
“내가 광장에 나간다한들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광장에 나간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
아니. 생각해보니 내가 생각을 잘못했다. 이건 소설이 아니라 현실이다. 내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걸 당신도 당연하게 여기는 게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촛불집회에 다녀 온 다음 날, 아빠에게 받은 박사모발 행운의 편지의 마지막에는 ‘이 메시지를 100명에게 전달해주세요.’라고 쓰여 있었다. ‘문재인’은 ‘문제인’이라고 오타가 나있었다.
나는 오탈자를 바꾸고 나름대로 그 글을 수정해나갔다.
‘이 편지는 구미에서 처음 시작되었으며..’
하지만 누구에게도 전달하진 않았다. 자기위안이었다.
여행을 하다 만난 친구를 집에 초대해 맥주 한잔 하며 이야기하다가 소름이 돋았다.
“5.18은 4.3사건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야. 4.3사건은 정말 순수한 민간인이 학살당한 거잖아.”
“5.18때 희생당한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거야?”
“응. 그들은 저항세력이었잖아.”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는 버티는 삶에 관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