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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의 해군경쟁 보충, 구한말 해군창설론
게시물ID : history_2705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역둔토
추천 : 1
조회수 : 74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10/28 22:45:41

 

 



청일의 해군경쟁에 관해 글을 썼는데 한국은 간단하게 서술하여 보충합니다.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military2&no=470&s_no=12657208&kind=member&page=1&member_kind=total&mn=702220



조선-대한제국에서 해군창설론의 시작은 1880년대 초부터이다. 1882년부터 각계에서 근대 해군을 설립하고

외국인 해군교관을 채용하자고 상주했다. 김옥균과 유길준도 해군 창설을 주장하는 인물들이었다.

 

해군설립이 실제로 시도 된 것은 1893322일 해군 군관학교 설치령을 내리고 강화도에 해군사관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조선정부는 영국에서 교관을 초빙하고 사관생도 50, 수병 500명의 모집계획을 세우고

10월까지 수병 300명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이시기 해군 설립 움직임은 청일전쟁 이후 일본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후 고종은 189872, 군부에 해군편제를 세울 것을 지시함으로서 해군 설립이 다시 시도되었다.

대한제국 원수부는 19013월 칙임관(고급관료)의 자제 중에서 100명을 선발하여 외국 해군사관학교에

유학을 보낸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재정의 부족과 응시자가 적었기 때문에 취소되었다. 이런 이유로

근대함선으로 편성된 해군설립은 좌절되었고 요충지에 포대를 세워 해안을 방어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이후 러일간의 대립이 격화되자 다시 해군창설론이 고개를 들었다. 특히 이때의 해군창설론은 군부가 일본에서

구입하기로 한 양무호와 밀접한 관려이 있었다. 군부대신 신기선은 19031월 고종의 지시로 일본의 미쓰이와

군함구입계약을 체결하였는데 그것이 양무호였다.

 

양무호.jpg

(양무호) 출처 한국 위키백과

 

양무호의 용도에 대해 주한 외교관들은 고종의 칭경예식때 외국공사를 영접하기 위한 의전함으로 보았다.

이는 객관적으로 양무호가 군함으로 쓰일 수 없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시기 새로 군부대신이 된 이근택(이후 을사오적)은 일본으로부터의 군함구입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는 양무호가 군함으로 기능할 수 없는 배라는 이유도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했던 이유는 이시기에는

아직 이근택이 친러파였고, 그렇기 때문에 일본이 아닌 러시아에서 해군사관을 고용하여 해군을 창설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종은 이근택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과의 계약을 이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일본의 강요뿐만 아니라

과도하게 책정된 계약 불이행시 물어야할 위약금 때문이었다. 일본은 한국내의 군함구입 반대론을 무마하기 위해

한국해군 설립에 협조하겠다고 제의했다. 교관을 파견하여 양무호의 승선인원을 교육시켜준다는 것으로

한국해군을 처음부터 완전히 통제하고자 한 의도가 들어있었다.

 

결국 대한제국은 양무호를 기초로 해군 창설을 추진하게 된다. 강화도와 진남군(지금의 충무)에 해군영을

설치하고 인근의 포구 영업세, 해세, 선세로 경비를 충당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의정부에서 재정이 부족하고 양성이 어렵기 때문에 해군창성론을 미루고 육군에 집중하자고 주장했다.

이시기 해군창설은 다시 좌절되었고 이시기 해군창설을 위해 모였던 인원들은 양무호를 관리하는 것에만

종사하게 되었다.

 

190311월 동년에 좌절되었던 해군창설론이 정부 내에서 다시 제기되었다. 이는 러-일의 대립이 고조되어

전쟁에 직면했기 때문에 국토를 방위하기 위해 해군이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미곡과 우피에

새로운 세금을 매기고, 미곡에는 석당 4, 우피는 3냥씩, 둔토를 확충하고 어염세까지 해군창설에 투입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양무호 구입과 관리,

(일본 미쓰이상사가 석탄운반함이었던 양무호를 판 것도 배가 크고 낡아서 유지비가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만으로 이미 한계에 다다른 재정으로 새로운 사업을 벌이는 것은 무리였고 고종과 집권층 또한 육군의 방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현실에서 해군 창설까지 시도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이로서 해군창설은 좌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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