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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펌 ] 중국 내란 소문의 근거자료
게시물ID : sisa_18166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번즈
추천 : 3/2
조회수 : 729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2/03/28 09:32:50

보시라이 사건과 중국 정치권력 정리

 

 

 

중국 공산당은 이른바 세대가 있죠.

혹시 WOD라고 아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는데..딱 그 느낌입니다.

뱀파이어가 1세대, 2세대 이렇게 갈라지는 느낌

1세대는 마오쩌둥, 주더, 저우언라이, 펑더화이, 린뱌오

9600KM의 대장정을 해내고, 항일내전을 치루고, 국공내전을 거치며 지금의 중국을 만든

그야말로 서사시에나 나올법한 문자 그대로의 중국의 영웅들

이들은 그후 중국을 이끌면서 장장 30년 간 한국전쟁에 참가하고, 인도와 싸우고, 소련과 분쟁하고, 대약진운동의 정책 실패를 겪고, 문화 대혁명을 통해 권력 다툼을 하는등 치열하게 지내다가

 

 

 

 

 

 

사진 순서의 저우언라이,마오쩌둥, 주더가 죽었습니다. 린뱌오와 펑더화이는 그 전에 죽었고.

그때까지 중국을 이끌던 거인들이 쓰러졌습니다. 그 후에는 4인방이 나타나지만,마오가 찍은 화궈펑이 차세대 지도자로 떠오릅니다.

하지만 다음해 그 남자가 귀환하는데

 

 

 

덩샤오핑이 귀환하면서 2세대가 시작되고

문혁으로 숙청되었던 개혁파들이 복귀했는데
이들은 혁명 1세대들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개혁개방파

그래서 이들을 2세대 라고 부르는데, 실질적인 구성원들은 아직 전설적인 1세대들

 

 

 

 

 

1989년 천안문 사태가 터져버리는데

덩의 오른팔인 당 서기자오쯔양이 시위에 동정적인 태도를 보이자

덩샤오핑과 1세대급들은 소위 민주파를 숙청해버리고, 그 빈자리에 무명인 상해시 서기를 불러들이는데 잘 알려진 장쩌민입니다.

이제 3세대가 시작하구요.

 

 

 

 

1997년 덩샤오핑이 죽을 때까지 장쩌민은 천천히 지도자가 되었지만 덩의 그늘에 묶여 있었는데, 반대로 덩샤오핑이 장쩌민을 지켜준 부분도 있지만은, 그래도 장쩌민은 덩의 꼭두각시 비스무리 한 상황에서도 상해 출신들로 자신의 계파를 구축했는데, 이걸 상하이방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1926년 생인 장쩌민은 건강했고 2000년대 초반, 아직 충분히 더 할수도 있었지만 순순히 물러납니다. 그 이유가 약점이 많아서


1. 대장정 - 항일 전쟁 - 국공내전을 치뤄낸 천지창조 서사시급 영웅들에 비해 장쩌민은 거의 없다 시피함

2. 장쩌민의 상하이방은 크게 성공했지만, 상해 위주의 발전과 맞물려서 다른 정치집단의 강력한 견제를 받음

3. 장쩌민은 애초에 덩샤오핑의 최측근도 아니었고, 따라서 장쩌민이 3세대 지도자가 된 것은 사실상 덩샤오핑의 선택때문이었을뿐

4. 결정적으로 별로 중국 인민들에게 인기가 그닥 좋지도 않음

덩샤오핑 계파나 태자당(1세대의 자식뻘)이 장쩌민의 장기집권을 용납하지 않았기 장쩌민은 순순히 권력을 넘김

 

 

 

 

이제 4세대의 시대

2003년 드디어 권력을 잡은 후진타오는 천재 엘리트 관료라는 이미지에 상해 출시이지만 상하이방도 아니고, 태자당도 아니며 단지 국제사회에 완전히 자본주의 국가로 데뷔한 중국의 얼굴마담으로 가장 어울리는 인물이었습니다.

후진타오가 10년정도를 책임진 롱 릴리프 투수라면..그러면 1, 2세대 혁명원로들이 10년 후에 원한 것은 "권력 승계"


혁명 원로들 중 끝까지 살아남아서 오늘날 강대국 중국의 밑걸음을 만든 것은 덩샤오핑을 주축으로 하는 2세대들인데, 당연히 그들은 아직도 숨은 권력이거나 죽을 때 막대한 권력을 어떻게든 유지시키고자 하는것이고, 그래서 그들이 힘을 모아서 밀어주는 젊은 세대 - 바로 자식들이 새로운 권력층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태자당


이 태자당들이 대략 후진타오와 비슷한 연령들로 이제 1940~1950년대 사이에 태어나서 연령적으로 무르익은, 국가 지도자가 될 나이에 이르른 수준이고

이제 대두되는 태자당 계열이 바로 5세대. 물론 태자당 외에도 다른 세력이 없지는 않지만

그리고 전설적인 1세대 혁명원로 중에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Eight Elders이

덩샤오핑, 펑전, 왕쩐, 츠원웬, 리셴녠, 덩잉츠오, 양상쿤, 보이보. 일종의 에이션트 급 드래곤이거나 안티딜루비안 급의 괴물들은 자신의 권력을 고스란히 남겨서 후계자들에게 넘겼는데, 이들이 2세대의 요체로

이 8명의 거대한 용들의, 일종의 해츨링들은

태자당 중에서도 핵심으로 말하자면 귀족을 넘어서는 황족, 황족 중에서도 직계...친왕

그리고 보시라이는 그 여덞명 중, 보이보의 아들입니다.

 



 

인상 좋은 사람 처럼 생겼지만..

보시라이가 어떤 사람인지에 관해 단적인 일화가 있습니다. 문화대혁명때 덩샤오핑을 비롯한 고위 정치인들이 숙청당할때 보이보도 반동분자로 몰려 홍위병들에게 두들겨 맞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시라이가 뭘 하냐면
살기 위해서 홍위병에 들어가서 활동하고

홍위병들 앞에서 아버지를 졸라 두들겨 패고, 이때 보이보는 이빨이 부러지고 뼈까지 부러집니다. 보시라이 나이 17살때.

그런데 아들에게 얻어맞은 보이보 왈

"강청이 나를 반도로 선포하자, 나의 아들인 어린 희래까지도 나에게 철권을 날렸다. 나는 눈앞이 시커멓게 되면서 땅바닥에 쓰러졌다. 이 독한 어린 아들은 다시 앞으로 나와서 발로 가슴을 몇번 밟았다. 당시에 늑골 3개가 부러졌다.

이 육친불인, 손속이 독하고 마음이 악독하고 부친마저도 죽이려 할 정도인 것을 보면, 이 어린 아들은 우리 당의 미래후계자로서 좋은 재목이다. 나중에 분명히 잘 될 것이다."



여하간 보시라이는 나중에 고위급 관리로 일하는데, 신화통신 쪽의 일개 기자가 내부 문건을 찾아내어 보시라이의 부패를 대대적으로 때려버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공산당은 보시라이를 좌천시킴.

좌천입니다. "처벌"이지만 "형벌"은 아닙니다. Eight Elders의 자식은, 문자 그대로 "태자"
사건을 보도한 기자는 뭐 여러가지 죄목으로 6년형을 선고받고 풀려나자 캐나다로 망명했다고


하지만 처벌은 없다고 해도, 이때부터 보시라이 이미지가 좀 더러워져서 시진핑 급으로 크지를 못하는데, 시진핑은 이미지 상당히 좋다고 합니다.

그렇게 충칭으로 내려간 보시라이는 중심에서 잊혀지는듯 했으나...


10년간 충칭의 왕(낮이든, 어둠의 세계든)으로 활동

온갖 방법으로 돈을 모아서 베이징에서 복귀 운동, 상무위원 임명 운동을 벌였는데,

보시라이는 되지 못했지만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은 아랫급인 중앙정치국 위원 16인 명단에는 이름을 올려놓고 있었기에

이제 상무위원이 될 가능성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좉망하는데,

 

 

 

보시라이 측근 중의 측근으로 소수민족 몽골계의 왕리쥔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갑자기 여러 말들이 나옵니다.

中충칭시 치안영웅 `좌천`권력투쟁 조짐 해석

중국 충칭에서 범죄와 전쟁을 주도해 `치안영웅`으로 불려온 왕리쥔 충칭시 부시장(사진)이 돌연 공안 업무에서 손을 뗐다. 왕 부시장은 앞으로 공안업무 대신 교육과 지식재산권, 체육 등 업무를 맡을 것이라고 3일 밍바오 등 홍콩 언론들이 보도했다.

이번 인사를 놓고 중국의 권력 암투가 본격화되는 조짐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그 이유는 왕 부시장이 보시라이 충칭시 당서기의 오른팔이기 때문이다.

보시라이가 2007년 상무부장(장관)을 마치고 충칭 당서기로 이동할 때 랴오닝성 진저우시 공안국장이던 왕 부시장을 발탁해 충칭시 공안국장으로 데려왔다. 왕 부시장은 이때 범죄와 전쟁을 선포하고 폭력조직을 비호하던 공무원들까지 대거 잡아들였다. 이때 체포돼 사형을 당한 원창 충칭시 사법국장은 보시라이의 정치적 맞수로 알려진 왕양 광둥성 서기의 최측근이었다.

당시 이 사건은 시진핑-보시라이로 연결되는 태자당이 후진타오-왕양으로 이어지는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출신에 일격을 가한 것으로 해석됐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반대 일이 벌어진 것. 왕 부시장의 뒤를 이어 공안업무를 맡게 된 후임자 관하이샹은 공청단 중앙조직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이력이 있다. 결국 태자당을 밀어낸 자리에 이번엔 공청단파가 들어앉은 것이다.

홍콩과 대만언론에서는 이번 인사가 10월 공산당 대회에 큰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는 관측까지 내놓고 있다. 집단지도체제 근간을 이루고 있는 중국 공산당의 정치국 상무위원회(9인)에 무난히 진입할 것으로 예상되던 보시라이 입지에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왕리쥔은 몽골에서 태어난 몽골계로, 일개 경찰에서 충칭 치인의 최고책임자로 오른 인물로,

태어날때부터 '영광스런' 핏줄이었던 보시라이와는 태생부터 다른 사람인데,
왕리쥔은 보시라이의 더러운 짓을 다 알고 있고, 살인멸구 당할 가능성도 있었다고..

여하간 또다시 기사가 뜹니다.

홍콩=연합뉴스) 황희경 특파원 = 중국 충칭(重慶)시에서 '범죄와의 전쟁'을 주도해 유명해졌던 왕리쥔 (王立軍·53) 충칭시 부시장이 미국 영사관에 망명을 시도한 뒤 중국 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파문이 일고 있다.

'치안 영웅', '충칭 포청천'이라는 별명으로도 잘 알려진 왕 부시장은 최근 그동안 겸직하던 공안국장직에서 물러난 뒤 석연치 않은 이유로 병가를 내 그 배경을 놓고 추측이 난무했다.

충칭시는 전날 웨이보(微博·중국판 트위터)를 통해 왕 부시장이 몸이 좋지 않아 휴가를 내고 치료를 받는 중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홍콩 언론들은 9일 중국 인터넷에 왕 부시장이 1급 기밀문서를 들고 충칭과 가까운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에 있는 미국 영사관에 망명을 시도했지만 미국측이 이를 거부했다는 이야기가 급속도로 퍼지고 있다고 전했다.

2월 6일 왕리쥔은 반 가택 연금 중에 누군가의 핸드폰으로 청두 미국영사관에 망명 의사를 타진, 이에 미국영사관의 반응은

"받아는 준다"

그러자 왕리쥔은 자택 밖 감사를 뿌리치고 노파로 변장하여 집을 나선 뒤 타인 명의로 등록된 차를 타고
충칭에서 청두까지 가서 무사히 미국 영사관에 들어갑니다

청두 미국영사는 베이징의 대사관에 망명을 승인할 것인지 문의

대사관은 다시 백악관에 문의

백악관은 논쟁 끝에 "왕리쥔도 범죄 혐의자다. 망명을 거절한다" 고 답함. 물론 미중 관계를 고려한것이고

왕리쥔(王立軍) 충칭 부시장이 지난 6일 저녁 청두(成都)에 있는 미국 총영사관에 들어갈 때부터 7일 저녁 이곳을 나올 때까지 진행된 상황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반체제 사이트 보쉰(博訊)이 전하는 전후 극적인 상황은 첩보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이 기간 동안 미국 총영사관과 게리 로크 주중 미국 대사, 백악관 사이에는 상황 보고와 대응
지시가 긴박하게 이뤄졌던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시진핑(習近平) 부주석의 방미를 앞두고 지난 7일 시 부주석과 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 사이에 이뤄졌던 전화 통화에서도 왕리쥔 문제를 논의했을 것이라고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가 관측했다.

먼저 왕리쥔은 지난 6일 오후 5시쯤 거주지에서
자기를 추적하는 보시라이 측 감시조의 경계가 소홀한 틈을 타 할머니로 변장한 채 일반차량과 공안차량을 번갈아 타고 청두로 향했다. 그가 총영사관에 진입한 시간은 저녁 9시 무렵이었다.

왕리쥔은 미국 총영사관 관계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보시라이가
교통사고를 일으키거나 실종되게 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살해하려 한다는 다른 사람의 진술이 담긴 영상자료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에 총영사관 측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밤 11시쯤 베이징에 있는 로크 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 보고를 했다.

보시라이는 2월 7일이 되자 그 사실을 알고, 정말 충격적인 행동을 취하는데,

백주 대낮에 충칭에서 70대의 공안차량을 보내 미영사관을 포위하려 합니다.

미국 영사는 경악해서 베이징에 "너희들 제정신이냐?" 하고 연락하고

해외토픽급 망신을 당한 당중앙은 보시라이를 꾸짖고
충칭에서 보낸 경찰병력은 쓰촨성 경찰병력과 대치하다가 철수했으며, 베이징에서 출발한 국가안전부 고위층이 청두에 도착해서 사태를 장악하고 왕리쥔을 체포하여 베이징으로 압송해서 사건 종료



한편 그 사이 왕리쥔은 보시라이의 추악한 진실을 까발리는 증거 서류를 미국에 넘겨줬으며, 그걸 요약해서 인터넷에 뿌려버리는데,


내용은 뭐 보시라이는 야심을 달성하기 위해 정치자금을 뿌렸다.

정치자금을 모으기 위해 충칭에서 10여년간 가짜 흑파(조직폭력) 사건을 조작한다.

성공한 기업가들이 조직폭력배나 결탁한 자로 몰려서 고문을 당하고 재산을 헌납한다.

이 와중에 암살된 사람도 많이 있다 이런 내용들

그러면 보시라이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느냐

궁지에 몰린듯 해보이던 보시라이지만

오히려 자신만만하게 건재를 드러내고 있으며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중 한 명인 저우융캉(周永康)은 지난 8일 보시라이 면전에서 충칭의 발전 성과를 치하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3월 14일에는 원자바오가 퇴임을 목전에 두고 총대를 매는 식으로 "바꾸지 않으면 또 문혁이 올것이다. 그리고 왕리쥔 - 보시라이 사건은 철저히 조사해서 인민들에게 발표하겠다." 라고 말했습니다.

왕리쥔은 어떻게 되느냐. 중국 인민들은 어떻게 반응을 하느냐.

두고 봐야 할 일입니다.

 


 

출처:http://cafe.daum.net/studentinbejing/6cu/63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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