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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그간 쓴 소설 도입부 모음
게시물ID : readers_2707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방울성게
추천 : 7
조회수 : 634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6/12/08 00:56:42
날짜 관계없이 무작위 도입부만 모음, 얼마나 많은 도입부가 버려지게 될까!

1.

그것은 침대(寢臺)였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식탁이 있어야 할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여러모로 침대를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잠자코 침대를 바라보았다. 어째서와 어떻게, 두 가지 물음이 동시에 들이닥쳤다. 나름대로 여러 가지 논리를 만들어보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하루아침에 식탁이 침대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과, 그렇다고 한다면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가에 대한 대답을, 적어도 지금은 얻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출근은 해야 했으므로 그는 라면 하나를 끓여 침대 위에다 올렸다. 조금 흔들리긴 했지만 의외로 괜찮았다. 어쩌면 식탁과 침대는 그리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그가 생각했다.

하필이면 출근길에 이삿짐센터에서 사람이 와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조금 불안했으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시동을 거는 동안에 인부들이 트럭에서 침대를 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런 다음 인부들이 침대 위로 올라갔다. 보고 있자니 어쩐지 거북해져서 그는 엑셀을 밟았다. 차는 매끄럽게 뻗어나갔다. 그 동안에 그의 생각들은 갈피를 잡아나갔다. 간밤에 술을 많이 마셨다. K의 아내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던가, 아내가 K를 좋아했다는 말이었나, 아내가 쓰러졌나, 그것도 아니면 K가 쓰러졌나…… 어쨌거나 수면부족인 건 확실했다. 머릿속이 엉망이었으나 계기판의 속도는 점점 올라갔다.


2.

바야흐로(이 말이 적당한가 모르겠지만) 2040년이 도래하면서, 세상에는 끔찍한 혼종들이 태어났다. 2016년에 하늘보리 스파클링이 생겨났고 2022년에는 된장 맛 요구르트가, 2027년에는 뻥튀기 맛 라면이, 2031년에는 녹차 향 커피가 탄생했다. 즉 세계는 발전으로 위장한 후퇴를 거듭해왔다. 그리고 바야흐로(이 말이 적당한가는 여전히 모르겠다) 끔찍한 혼종의 결정체인 푸드 파이팅(2040)’이 생겨났다.

그러니까

한 때 유행이었던 증강현실을 기반으로 한 가상현실 게임인데, 음식을 수집해서 싸우는 것이다. 이를테면 김치를 투척해서 피해를 입힌다거나. 개발진은 연구 의의를 다양한 맛의 발견이나 엄마가 먹을 것 가지고 장난치는 거 아니랬어요, 라는 말에서 착안했다.’고 밝혔다. 거기에 게임의 역사에는 늘 존재했던 롤플레잉 요소를 집어넣어서 끔찍한 게임이 탄생한 것이다. 이 끔찍한 게임은 당연히 실패할 것이라고 전망했는데(나는) 유감스럽게도 대 흥행을 거듭했으니(모두의 말에 따르면) 그 이유라고 한다면 아주 단출하게도

살이 찌지 않는다는

인류의 오랜 숙원이었다. 그래서 바야흐로(이 말은 아주 적절하다) 나는 이 혼종 게임을 하기로 했다. 여기까지가 나름대로의 전말이고, 나는 눈앞의 숙적을 노려보고 있었다.


3.

한 인간이 얼마나 고독한지 알려면 그가 얼마나 많은 말을 하는지 지켜봐야한다. 인간은 말을 많이 할수록 고독해진다. 그것을 알려준 건 K였다.

, 하와이 가게 백오십 만원만.”

어느 날 P가 말했다. P의 말에 담긴 저의가 무엇인지를 한참이나 고민했다. 고민은 어떤 결과도 도출하지는 못했다. 내가 다시 물었다.

백오십 만원?”

그래.”

핸드폰 너머에서 P의 말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하와이?”

그래.”

무엇이 P를 그렇게 만든 것일까. 나는 하릴없이 그런 문장을 떠올렸다. P는 애초부터 현실주의자는 아니었다. 어느 판타지 세계에 떨어지는 상상을 곧잘 했고, 그런 이야기를 다룬 만화나 소설을 찾았다. 그러면서 낭만주의자라는 말을 썼다. 그 낭만주의자는 지금 백오십 만원으로 가는 하와이 여행을 꿈꾸고 있었다.

하여간 진심인 것 같기는 했다. 그러면서도 담담한 어조여서 속내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내를 숨기는 건 사기꾼들이 자주 쓰는 수법이라던데, P는 그런 사기에 당한 것일까. 아니면 그 사기꾼이 P일까?

빌려줄 수 있냐?”

백오십 만원?”

그래.”

P는 슬슬 짜증이 나는 모양이었다. 낭만주의자도 때에 따라 짜증은 내는 모양이었다. 나는 최대한 마련해보겠다는 대답을 하고 통화를 끊었다. 끊는 순간에 P는 아주 잠깐 들뜬 목소리가 되었는데, 어쩐지 하와이를 연상시키는 목소리였다. 낭만주의자인 P는 고독했기 때문에 한국이 아닌 하와이에서 낭만을 찾으려고 하는 걸까. 하와이의 낭만은 한국의 낭만보다 낭만적일까?

돈을 보낸 직후에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K였다. 낭만주의자에 이어 고독한 인간이라. 전화를 받자 K가 인사말도 없이 말했다.

, 하와이 가게 백오십 만원만.”


4.

대구의 기온은 계속 떨어져서 마침내 전국 최저기온을 갱신했다. 속속들이 쏟아지는 기사에는 전대미문이나 이례가 없었다는 수식어가 붙었다. 그것이 과장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적어도 선풍기가 필요한 시대는 지났다고 온유는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사라지는 것들에는 인간도 포함된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입안이 씁쓸했다.

나갈 날씨는 아니야.”

베란다에서 바깥바람을 쐬고 있는데 안쪽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어눌한 발음으로 보아 누군지 대강 짐작이 갔다. 미국에서 온 마쓰루 씨였다.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 오늘의 수확에 대해 물었다. 마쓰루 씨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102동 아줌마가 죽었다.”

, 그 아줌마한테 꽤 많이 걸었는데. 투신자살 맞죠?”

바람을 많이 쐐서인지 목소리가 조금 잠겼다. 마쓰루 씨는 가방을 내려놓더니 돈다발을 꺼내보였다. 기간은 조금 지났지만 죽은 방법은 정확히 맞춘 것이다. 사망배팅 세 차례 만에 일억 원을 돌파했다. 이 기세라면 조만간 이사를 갈 수도 있을 것이다.

돈을 다른 가방에 옮기고 있는데 마쓰루 씨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다음엔 누구한테 배팅할 건가.”

온유는 마쓰루 씨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런 다음 조금 느린 말투로 또박또박 말했다.

마쓰루 씨요. 앞으로 일주일 이내로, 사인은 흉기에 수차례 찔려서.”


5.

겨울이 올 징조인지, 뺨이 살살 떨려왔다. 지우는 꺼끌꺼끌한 손으로 볼을 문지르면서 말했다.

얼마나 벌었어.

부엌에서 김치를 썰던 도진의 손이 멈추었다. 돈 이야기를 할 때면 목소리가 작아져서 의식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만 원.

대답하는 도진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소리 죽여 칼질을 하면서 지우의 말을 기다렸지만, 지우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서걱대는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날이 추워서 손이라도 느려졌냐?

도진이 지우에게 소매치기를 배운 지는 삼 년도 넘었다. 매년 겨울은 작업하기 힘들다는 것을 지우도 알고 있다. 괜한 심통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삼 년이 넘었다.

, 데워줘?

어느새 다가온 지우가 손바닥으로 도진의 사타구니를 쓸었다. 입술을 깨물면서도진은 지우의 팔을 슬쩍 밀어냈다.

밥 다 돼가.

또 김치볶음밥이네. 올리고당 두르려고?

도진이 지우를 이해하고 있는 만큼, 지우 역시도 도진을 알고 있다. 알고 있다는 것만큼 피상적이고 일방적인 것도 없지만 도진은 애초부터 어쩔 수 없는 관계라고 생각했다. 글러먹은 관계라서 도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올리고당을 두른 김치볶음밥을 하는 것뿐이었다.


6.

태어나면서 정해진 일들이 있다.

선천적으로 고추가 컸다. 엄마는 그게 이름 덕이라고 했다. 아빠는 여자를 꽤나 울리겠다며, 호탕한 목소리로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했다. 고추가 큰 게 자랑할 만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직은 아니겠다 싶었다. 밤에는 강할지 몰라도 아침에는 아니었다. 예를 들어 지금 같은 경우에도, 고추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빵은.”

다 팔려서.”

내 목소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사실 매점에는 초코 빵이 하나 남아있었다. 사지 못한 이유는 일진이 세 명이기 때문이었다. 초코 빵을 사오면 두 명에게 맞아야 하지만, 사오지 않으면 대표로 한 명에게만 맞으면 된다. 그게 내가 터득한 지혜였다.


7.

다급한 외침이 날카롭게 귓가를 찔러왔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누군가가 내 몸을 확 끌어당겼다. 시야가 천천히 회복되면서, 조금 전까지 내가 서있던 땅이 우악스럽게 갈라지는 게 보였다. 오우. 거의 초토화된 지면을 보고서도 아직 정신이 없다.

, 이건 어디까지나 꿈이긴 하다. 자각해도 깨어나지 못한다는 게 단점이고, 이런저런 것들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장점. 꿈에 여자가 나오면 장점, 남자만 나오면 단점. 그런 식이다. 이번 꿈은 꽤 과격하고.

괜찮아, 레드?”

옆에 있던 파란 헬멧이 머리를 들이민다. 레드? 아무래도 여기서 나는 그런 이름인 것 같다. 나를 레드라고 부르는 파란 헬멧은 마치…… 꼭 파워레인저 같군.

괜찮아, 파란 대가리.”

나는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괜찮다는 제스처를 취하는 한편, 눈길 하나 주지 않음으로서 쿨한 이미지의 레드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 레드는 카리스마지! 이런 식으로 꿈속에서도 행동의 자유는 보장되는 편이다.

레드, 뭐라고?”

파란 대가리는 충격을 받은 표정이다.

위험해!”

파란 대가리가 굳어있을 틈도 없이 분홍 대가리가 끼어들어 나를 걷어찬다. 어이쿠! 나는 볼썽사나운 비명소리를 내뱉으며 땅을 신명나게 뒹군다. 허허, 제법 지랄 맞은 꿈이군.

, 인마…….”

나는 고개를 쳐들고 분홍 대가리에게 외치지만 말을 끝맺지는 못했다. 다시 한 차례 무언가가 대지를 휩쓸었고, 그 여파에 남은 것은 참혹하게 으스러진 파란 대가리뿐이었다.


8.

그는 계단을 통해 컨디션을 가늠한다. 평소에는 계단을 두 개씩 오르는데, 컨디션이 나쁠 때에는 한 칸도 벅차다. 그리고 그 날은 유독 계단이 많던 날이었다. 한참을 올랐는데도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그 지점까지는 의아한 정도였는데, 영문도 모르고 계단을 오르던 그는 마침내 긴 한숨을 토해냈다.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미친 거 아닌가.

그가 중얼거린 목소리조차 몇 계단을 오르지 못하고 뻗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일단 내려가기로 했다. 추락은 비상보다야 언제나 쉬운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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