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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 역사가 되다
게시물ID : history_390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악진
추천 : 7
조회수 : 2401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2/03/29 15:06:15
펌 from 매그니토 in 디시인사이드 삼국지갤러리 청나라의 건륭제, 그리고 가경제의 시대에 이르면, 이른바 고증학이라는것이 발전했습니다. 고대의 경전을 밝히고 연구하는것인데, 이 과정에서 이런 의견이 나왔죠. "하나라, 은나라(상나라가 맞겠지만 여기서는 편하게 은나라)가 있던 시기랑 사마천이 사기 쓰던 시기는 천년 정도 차이나는게 이게 맞겠음?" "솔까말 이거 구라." "하나라 은나라 이런것 없었음. 사기 봐라. 은나라 왕 계보 줄줄 말하고 있는게 그게 솔직히 맞겠냐? 판타지 소설인듯." 건륭 - 가경제 시기면 대략 1700년대 후반부터죠. 말이 되는것 같았기에 오히려 이쪽이 더 정설로 받아들여졌고, 1800년대 중후반까지 이어져서 일본의 명망 깊은 사학자 시라토리 구라키치(1865 - 1942)는 하와 은은 만들어진 역사에 불과하여 실제 역사로 인정할 수 없다고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라와 은나라는 과거의 전설로 사라져가고 있었습니다. 청나라는 서양 열강의 침입에 시달리며 과거의 영화를 잃어버렸고, 시대는 빠르게 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청나라에는 왕의영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1845년에 태어나고, 1900년에 죽었으니 1800년대 후반에 일생을 보낸 인물입니다. 국자감 제주를 하며 상당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왕의영은 말라리아를 지병으로 앓고 있었는데, 중국에서는 이 말라리아를 고치는데 용골이 좋은 약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용골. 용의 뼈 라는 엄청난 이름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별로 비싸지도 않은 약재였는데, 왕의영이 아파하자 하인은 용골을 사왔습니다. 그런데 왕의영의 집에서 학문을 하는 막객 중에 유악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이 용골을 보는데, 무슨 이상한 글자가 새겨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갑골문입니다. 금석학이라는 학문이 있습니다. 동기(銅器)·철기(鐵器)·석비(石碑)·화폐·인장(印章) 등에 쓰여진 옛 글자를 연구하는 학문이었죠. 유악은 이런 금석학에 정통했고, 왕의영도 정통한 편이었습니다. 둘은 그것을 보고 "이거 신기하다" 하고 연구를 하게 되었죠. 유악은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이런 용골을 모았습니다. 글자가 없는것은 사지 않았구요. 그러자 나중에는 아예 일부러 멀쩡한 뼈에 가자 글자를 새겨넣는 경우도 있어서 사기당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렇게 고생고생하면서 연구를 하고 있었지만, 중국에 변란이 일어나고 맙니다. 의화단 사건이었죠. 의화단 사건은 8개국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하는 최악의 상황으로 끝나고, 왕의영은 이런 모습을 보고 집에서 우물에 몸을 던져 자살해버렸습니다. 왕의영의 아들이 재산을 처분하자, 유악은 이런 갑골문 1천개를 사들여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도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신강에 유배되어 죽고 맙니다. 선지자들은 이렇게 죽었지만, 갑골문에 대한 전설은 여러 사람들에게 퍼졌고, 이제 독자적으로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나진옥이었습니다. 역시 금석학의 대가였던 나진옥은 죽은 유악의 갑골문을 사들이고, 더 많은 컬렉션을 모으면서 연구를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중국은 말 그대로 휘몰아치는 소용돌이 그 자체였고,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일본으로 망명합니다. 이 나진옥은 안양현 소둔촌을 은나라의 유적, 은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1928년부터 중앙연구원 역사어연구소는 사람을 보내 조사했고, 젊은 학자인 동작빈 등은 중일전쟁이 발발 직전까지 계속 발굴을 했습니다. 이 과정은 쉽지 않았고, 유물을 노리는 전문 도굴단까지 나타나 연구원들을 살해위협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온갖 역경끝에 거대한 능묘가 발견되고, 주거와 궁묘의 터가 확인되었습니다. 은나라가, 실존했던 것입니다. 그전까지 앙소 유적 등의 발굴도 있었지만 외국인들의 손에 이루어졌는데, 은나라의 발견은 순전히 중국의 젊은 학도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과정이라 더욱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제 어느정도 연구를 하고 성과를 발표, 출판하려는 와중, 중일전쟁이라는 일대 사건이 일어납니다. 세상은 전란에 휩싸였고, 연구도 더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목숨보다 소중한 갑골들은 한꺼번에 모아 자동차등에 태워져서 이동, 전쟁의 포화를 피했습니다. 그러나 무려 3천년 이상이나 땅 깊은 곳에서 잠들어있던 뼈들이, 충격에 강하게 버티기 힘들었습니다. 1천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이 과정에서 많은 갑골문이 훼손당해버렸습니다. 어찌어찌 홍콩에 도착,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홍콩은 일본군의 공격을 피할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도 잠시, 태평양전쟁이 시작되고 영국과 일본이 전쟁을 벌이자 홍콩도 점령 당합니다. 연구 성과는 한참 늦어져서 결국 1948년에야 발표될 수 있었습니다. 이와같은 우연과 모험, 노력으로 잊혀진 고대 문명의 실체가 마침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정확한 사마천의 계보 사마천이 사기를 썻을무렵, 은나라와 주나라가 교체된건 거의 천년도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세워진 시절의 일을 말하는 꼴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왕들의 계보는 실제로 여겨지지 않고, 전혀 현실감있는 소리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이었습니다. 갑골문을 연구한결과, 조금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거의 일치했습니다. 이는 사마천, 그리고 사기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일이 되었고 사마천은 가장 위대한 역사가중 한명으로 현대에 이르러서도 존경받게 되었습니다. 매우 미신적이고 귀신을 두려워한 은나라 문명 갑골문은 역사를 남기기 위해 만든것이 아닙니다. 점을 치려고 만든 것인데 그 기록이 워낙 많아 오히려 주나라 초기보다 좀더 뚜렷하게 볼수 있는 수준입니다. 극단적인 기록에는, 치통으로 이가 아프자 "조상 귀신이 노한게 아닌가" 하고 갑골문에 점을 친것도 있었습니다. 은나라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했던것은 귀신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것은 제사였고 악령을 두려워 했고 모든일에 귀신의 심기를 거스리지 않게 두려워했으며 매사의 일을 점복에 의지했습니다. 점복이 곧 전부요 실권이었습니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 최고 지도자인 왕은 동시에 제사장이었지요. 끔찍한 인신공양 은나라는 미신과 더불어 매우 피냄새가 강한 나라였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노예들을 순장하였는데 강제로 목을 쳐버리고 순장을 하기도 했고, 제사를 지내면서 산제물을 바쳤습니다. 순장 자체야 이후로도 쭉 내려오지만 주나라 때부터 많이 줄어들고 규모도 작아지고 인식도 별로가 되지만(가령 秦목공은 뛰어난 업적에도 죽을때 순장 많이 했다고 춘추오패에 안넣기도 하죠) 이 시대는 아주 자연스럽게 싸그리 죽이고 묻었고, 무엇보다 하늘에 제사지내면서 사람을 죽였습니다. 보통 이 순장하면서 죽인 노예들은 강족, 의미야 없겠지만 요즘으로 치면 티베트 쪽인데 자주 노예로 잡아다 쓰며 이렇게 죽어가고 무덤속에 들어갔습니다. 또한 의식을 하면서 개를 죽이거나 어린이를 땅속에 묻기도 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노예이고, 인간의 취급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노예에 의해서 많은 부분이 지탱되는 노예제 사회였습니다. 노예야 후대까지 존재했지만, 이것이 사회 생산력을 지탱했다는것이 바로 노예제 사회 입니다. 곽말약은 이 노예제 사회가 더 이어져서 춘추 - 전국시대 사이까지 이어졌다고 하고, 中國通史簡編에서는 서주시대가 노예제 사회에서 봉건제 사회의 개시라고 하고, 진순신은 은나라때 노예제 시대가 끝났다고 하고 이런 의견들이 있습니다. 목야전투에 대한 기록을 보면 은나라 병사들이 주나라 병사들하고 별로 싸울 의지도 없이 오히려 주나라 편을 들었다고 하는데, 물론 이런 기록을 믿기는 힘들지만 어쩌면 아즈텍 문명 생각나는 모습이기도 하죠. 이쪽도 인신공양을 많이 한끝에, 정작 필요할때 주변에서 모두 등을 돌렸던것처럼 은주 교체기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들 은나라가 워낙 제사에 공을 들였고, 덩달아 제사에 쓰이는 청동기도 대단히 정교해져서 그당시 청동기 관련 기술은 동방 최고, 아니 세계로 봐도 대단한 수준이고 거기에 비하면 주나라 초기의 청동기는 은말기에 비해 더 떨어진다고 하더군요. 대신에 경직되고 공포스러웠던 은에 비해 은을 몰아내기전 주는 활력이 있었다고 하고 이 은나라에서 주나라의 교체에 대해서는 많은 생각들이 있는데, 은나라는 무언가 미심쩍고 뭔가 야릇하고 진순신의 표현대로 '왠지 보고 있으면 귀신에 홀린듯하며 어딘가 스콜피온 킹 영화나 메소포타미아 벽화에서나 볼듯한 느낌인데 주나라는 비교적 요즘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중국 이미지죠. 중국 학자중에 왕궈웨이는 "중국 문명의 기원인 하, 은나라는 후대에 거의 전해지지 않았고 은과 주는 사실상 서로 외국문명" 이라고 말했고 곽말약은 "주나라도 큼지막한 왕릉 발굴되면 거기에 순장 ㅎㄷㄷ할지 누가암?" 이라는 의견입니다. 만약 은주혁명을 강하게 생각하는 쪽의 의견을 따른다면 이것은 단순한 지배층의 교체가 아니라 문명 자체의 교체, 동아시아 최초의 혁명이자 정말 의미 그대로의 혁명이 되는 것입니다. 기술 자체로 보면 은 후반기가 주 초기보다 더 나았지만, 의식적인 부분에서 개혁이 일어났다는것. 우주의 질서를 종교에서 찾는 시대에서, 윤리에서 찾는 시대로 바뀌어버린 것이죠. ======================================================================================= -전설로 치부하던 은대의 기록들이 역사의 범주로 들어오는 것은 트로이유적을 발굴해내는 장면이나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민담집에서 역사책으로 역사성을 인정받는 장면만큼이나 충격적입니다. 19세기 말엽 이래 대자본을 들여 발굴작업이 진행되자 예전에는 전설로만 치부하던 이야기들의 역사성이 드러나버리는 거죠. 혹시 압니까, 환단고기도 시베리아 땅을 파보면 뭔가 나올지? 나오면 그 때 인정해드릴게요, 그 전까지는 제발 '믿으라고' 강요 좀 하지 마세요. -중국사는 이민족침입=>한족 동화=>중화문명 확장=>이민족침입...의 패턴을 보이고 있는데, 그 패턴이 은주 교체기에도 적용된다는 것이 굉장히 놀랍네요. 저는 이런 패턴이 5호16국에 본격화되고 빨리 잡아도 秦楚가 전국시대를 종결짓는 데에서 시작됐다고 생각했거든요. 이러나 저러나 저같은 아마추어는 어서 뭔가 발굴되서 대가들이 책이나 써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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