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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 간략사 2, 느리지만 꾸준히 강해진다!(1830~1913)
게시물ID : history_2712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역둔토
추천 : 5
조회수 : 889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6/11/15 21:54:39



간략사라고 해서 짧게 쓰려고 했는데 실패했습니다..

가벼운 글이니 재밌게 읽어주세요.





정의의 하느님(正義의 神, Боже правде 보제 프라브데) -한국 위키백과

정의로우신 하느님, 지금까지 우리를
파멸에서 구해주신 당신,
변함없이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주시고,
영원히 우리의 구세주가 되어 주소서.
전능하신 손길로 이끌어 주시고, 지켜주소서
세르비아 민족의 앞날을
하느님, 구원하고 지켜주소서,
세르비아 왕과 세르비아 민족을!






발칸의 패자로 가는 길 1830년부터 1913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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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브레노비치 왕가의 통치(1830-1842)

 

1830년 자치공국이 성립된 이후, 세르비아 자치공국의 첫 군주가 된 밀로쉬 오브레노비치는 국가기관을 설치하고

법령을 정비하여 국가의 틀을 잡는 것과 세르비아에 있는 투르크인, 무슬림들의 추방, 농지 분배, 오스만 투르크와의

국경선 확정에 몰두했다. 이 과정은 대개 1833년까지 완료되었는데, 오스만의 술탄은 세르비아의 특수성을 완전히

인정하고 투르크인과 무슬림인 추방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세르비아의 영토 확장을 용인했다.

이것은 술탄의 선의와 공존 노력이라기보다는 세르비아의 후원국인 러시아, 더 나아가 발칸 반도를 주시하고 있는

서양열강에게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세르비아 1차봉기를 주도했던 카라조르제의 후손이 카라조르제비치 가문은 이시기 권력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1833년까지 오스만과의 문제가 일단락되자 밀로쉬 오브레노비치는 전제군주로서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세르비아 내정을 독단적으로 처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그의 통치방식은 많은 불만을 낳았지만, 혼란스러운 국가의

초기상황에서 효율적인 개혁을 가능하게 한 장점도 가지고 있었다. 밀로쉬 오브레노비치는 잘 구성된

행정조직을 구성하고 효율적인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였으며 세르비아 군을

창설하고 지역방위대를 조직했다. 일정부분 성과를 얻었으나 독단적인 국정수행은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가지게

하였고 18351월 밀로쉬 오브레노비치에 반대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밀로쉬는 신생국가를 파탄에 빠트릴 수

있는 내전보다는 협상을 택했고 반란군의 사면, 세금 감면, 의회의 소집, 헌법 제정을 약속했다. 이런 약속을 받은

반란군들은 해산했다.

 

18352월 의회가 소집되었고 소집된 의회는 세르비아의 첫 근대 헌법을 제정했다. 자유주의의 영향을 듬뿍 받은

헌법은 의회의 상설기구화, 사법기관의 독립, 진일보한 시민권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밀로쉬는 헌법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이 강대했기 때문에 헌법을 승인했다. 그러나 1835년 헌법은 2달도 지나지 않아

폐기되었다. 그것은 이 시기 강고한 반()자유주의 국가였던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반대 때문이었다.

세르비아의 주요한 후원국인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강대국인 오스트리아의 반대로

시행되지 못한 이 1835년 헌법은 이후에도 세르비아 역사에서 큰 역할을 하였는데, 이 헌법의 시행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세르비아 역사에서 <헌법 수호자>라고 불리게 되었고 밀로쉬와

대립하며 세르비아 근대정당 시대를 연 인물들로 기억되고 있다.

 

밀로쉬는 헌법을 폐기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러시아의 압력에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는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전제군주를 100% 신용하는 것보다는 친()러시아 인사들로 구성되며 종신의원들로

이루어진 귀족원을 만들어 세르비아 국내 정치에 안정적으로 간섭하는 것을 원했다. 그렇기 때문에 1835년 헌법

대신 투르크의 헌법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자유주의 사상은 거세되었지만 투르크의 헌법이 도입됨에 따라

종신의원들로 구성된 귀족원이 군주의 권력을

 제한 할 수 있게 되었다. 밀로쉬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귀족원의 폐지와 헌법의 폐기를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인내심에 한계에 다다른 그는 그 자신이 뒤에서 조종하는 민중봉기를 일으켜 헌법을 폐기하려는 음모를 꾀했지만,

음모가 드러나 실패했다. 음모가 실패하자 밀로쉬는 큰아들, 밀란 오브레노비치에게 공위를 넘기고 퇴위하였다.

그러나 밀란 오브레노비치는 병약하였기 때문에 공위에 오른 후 수 주 만에 사망하였고 작은 아들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가  3대 세르비아 자치공국의 공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러한 혼란상황에서 귀족원을 장악한

<헌법 수호자>들은 국정을 장악할 수 있었고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 할 수 있었다.

 

18403, 아버지의 실책과 형의 요절로 공위에 오른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는 고작 16살이었다. 경험이 부족한

미하일로가 즉위하자 근왕파와 헌법수호자들 간의 알력다툼이 더욱 거세어졌다. 자치공국의 정치가 혼란스러워지자,

이것에 우려를 나타낸 것은 오스만 투르크였다. 그들은 세르비아 정국 혼란이 오스만 투르크의 영향 아래 있는

다른 영토로 번지는 것, 세르비아의 갈등이 열강의 개입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것을 우려했다.

그렇기 때문에 술탄은 자치공국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1841, 특사를 파견하고 특사가 양측의

대표들을 불러 모아 거국회의를 소집하게 했다. 그러나 술탄의 특사는 세르비아 안에서 권위가 땅에 떨어진

술탄의 관리였기 때문에 소집된 회의는 공작, 미하일로와 그를 지지하는 근왕파의 의도대로 흘러갔다.

근왕파는 회의에서 승리하고 특사가 이스탄불로 돌아갈 때, 헌법수호자들 일부를 데려가도록,  

사실상 추방 조치를 내렸다. 미하일로 공은 이렇게하여 통치 초기, 아버지가 확고히하려고 노력했던 전제군주정을

실현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842년 봄, 세르비아의 주요한 후원국이며 전제군주 단독으로 국정을 운영하는 것을

원하지 않던 러시아가 헌법수호자들의 복권과 귀국을 요구했다. 헌법수호자들이 러시아의 지지를 받고 세르비아로

돌아온 것과 세르비아 내부에서도 미하일로 공과 근왕파의 전제적인 정치에 불만을 가진 세력이 많았다는 것이

겹치면서 1842년 여름, 미하일로 공에 대항한 반란이 일어났다. 공작을 지켜야 할 정규군 일부마저 반란군에 참여하는

등 국내에서 지지를 상실한 미하일로 공오브레노비치 공작 가와 근왕파는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망명했다.

 


카라조르제비치 왕가의 통치(1842-1858)

 


알렉산다르 카라조르제비치.jpg알렉산다르 카라조르제비치



반란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오브레노비치 왕가가 망명한 직후인 1842년 가을, 세르비아에서 헌법 수호자들의 주도로

새로운 의회가 수립되었고 이들은 알렉산다르 카라조르제비치를 세르비아의 새로운 세습공작으로 선출하였다.

명목상으로나마 종주국이었던 오스만 투르크 정부가 세르비아의 정국혼란을 막기 위해 카라조르제비치 왕가의 수립과

새로운 정부의 성립을 즉각 인정한 것에 반하여 러시아는 카라조르베치 왕가에 매우 비우호적이었다.

이는 러시아의 관점으로 볼 때, 왕가를 몰아내고 새로운 왕가를 의회에서 뽑는다는 것은 매우 혁멍적인 것으로

보여 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는 의회를 다시 소집하여 오브레노비치

왕가의 복위를 시도했다. 그러낭 의회를 구성하고 있는 다수의 헌법 수호자들이

카라조르제비치 왕가를 지지했기 때문에, 러시아의 이러한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오브레노비치 왕가때부터 시작된 훈란은 카라조르제비치 왕가가 성립된 이후에도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헌법수호자들이 오브레노비치에 비해서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이었다는 것이지 절대적인 기준에서

보면 그들 또한 매우 보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투표로 선출된 의원으로 구성된 의회를 최고상설기관으로

만들어 의회정치를 시행하는 것보다는 잘 교육받은 엘리트들에 의해 주도되는 과두정에 더 가까웠다.

물론 오브레노비치와 근왕파가 주장하는 전제왕권보다는 한걸음 나아갔지만 세르비아 민중들은 헌법수호자들의

이러한 행태에 매우 실망하였다. 헌법수호자들의 실패 이외에도 세르비아 국내에 남아있는 오브레노비치 지지파들의

지속적인 반란도 세르비아의 혼란을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그들은 해외로 도피한 오브레노비치 왕가의

지원을 받아 1840년대 말까지 카라조르제비치 왕가에 반하는 반란을 일으키거나 모의했다.

 

이런 혼란상황에도 불구하고 오브레노비치 시대의 전제군주정때에 비해 헌법수호자들이 주도하는 카라조르제비치

시대에는 세르비아 국가건설이 빠르고 정교하게 진행되었다. 이 시대의 헌법수호자들의 가장 큰 업적인 세르비아

민법전이 1844년에 완성되었고 1846년에는 그동안 방만하게 운영되던 사법시스템을 전반적으로 개혁함과 동시에

최고 재판소인 대심원이 설치되었다. 경제적으로는 무역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노력의 결과로 상업자본이 축적되기

시작했으며 외국과의, 특히 오스트리아와의 무역이 증가하였다.

 

세르비아가 점차적으로 근대국가로 탈바꿈하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왕과 헌법수호자들에 대한 민중의 개혁요구는

더욱 거세졌다. 1848712일에 다시 소집된 의회에서 민중대표들은 의회의 정기소집, 출판의 자유,

세금 제도의 개혁, 상업활동 지원 등을 주장했다. 그러나 1848년 의회에서 민중대표들의 요구는

단 한 가지도 채택되지 않았으며 새로 설치되고 있던 다양한 국가 행정기관과 사법기관들의 권한을 규정하고

세르비아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확정짓는 원론적인 결정만을 내렸다.

 

이즈음 국내 상황이 혼란스럽고 다양한 요구가 분출되고 있었지만, 세르비아의 국제적 위치는 매우 개선되고 있었다.

1853년 일어나 1856년 파리 조약으로 끝이 난 크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면서 세르비아는 비우호적인 후원국이었던

러시아의 단독 후원에서 벗어나 러시아 이외에도 프랑스, 오스트리아, 프러시아, 피에몬트-사르데냐가

세르비아의 자치와 권리를 보장받게 되었다. 또한 모든 보장국들의 동의없이는 세르비아에 외국군이 주둔하거나

통과할 수 없게 되면서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만 투르크의 종주권은 사실상 종결수순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런 열강들의 보장은 세르비아 국내정치에 새로운 갈등을 불러왔다.

많은 열강이 발칸반도와 세르비아에 관심을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하려함에 세르비아의 정치세력들도

친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로 분열되어 대립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내의 갈등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알렉산다르 공과 헌법수호자들은 185811월 다시 의회를 소집했다.

이번 의회는 이전의 의회와는 상당히 다른 면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185811월 의회만을 위한 법률로서

세르비아 역사상 처음으로 선출직 의원이 의회의 대다수를 점한 것이었다.

비록 일부 선거권이 제한되어, 유산계급 이상만이 선거권을 가지고 있었고 직접선거도

도시권에서만 시행되었지만(시골에서는 간접선거) 세르비아 최초로 370명의 선출 대의원이 의회에 참여하였다.

이 의회에서 의회의 입법권을 놓고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이 격렬하게 논쟁하였다. 양측은 타협하여

입법권은 귀족원이 가지고 의회는 군주의 자문기관으로서 매년 일정한 기간동안 소집하는 것으로 결정지어졌다.

또한 의회는 1222일에 세르비아 국내의 지속적인 혼란의 원인을 알렉산다르 카라조르제비치 공작에게 있다고

결정했고 그의 퇴위를 요구했다. 여기에 선출의원 중 일부가 오브레노비치 왕가의 지원을 받고 있었던 것도

이런 결정이 나게 되는 중요한 원인이었다. 어쨌든 이에 따라 1223일 알렉산다르 공은 퇴위를 선포하고

오스만 투르크로 망명하였고 세르비아 자치공국의 첫 군주였던 밀로쉬 오브레노비치가 78살의 나이로 복위하였다.

 

 

돌아온 오브레노비치 왕가의 통치(1858-1903)

 

 

78세의 밀로쉬 오브레노비치는 복위하여 자신의 정적들을 가차없이 처리하는 것을 시작으로 세르비아를

다시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는 헌법수호자들과 자유주의자, 친러파, 친불파 등 다양한 세력의 다툼을 이용하여

전제군주권을 다시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 카라조르제비치 통치시절, 내각이 가져갔던 경찰 지휘권과 비교적 독립된

군 통수권이 다시 군주 직할로 바뀌었을 뿐 만 아니라카라조르제비치 왕가가 최고법정으로 설립한 대심원이

가지고 있던 최고 재판권을 회수하여 군주가 최종 판결권을 보유하도록 변경하였다.

 전제군주권을 재확립한 밀로쉬 오브레노비치가 186080살의 나이로 죽자

그의 작은아들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가 37세의 나이로 다시 즉위했다.

 

미하일로 젊을때.jpg젊은 미하일로

두번째 치세기 미하일로.jpg2번째 즉위당시 미하일로 공


이전에 16살의 나이로 즉위해 쫒겨났던 때와 다르게 37세의 미하일로는 유럽 곳곳을 여행하고 많은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유럽의 사상과 정치적 사조에 정통한 계몽가로서 즉위하였다. 그는 계몽군주를 자처하며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대제의 절대적 계몽주의를 본 받고자하였다. 그런 관점에서 그는 아버지의 전제군주정과 결별하고

위에서부터 아래를 향한 법을 통한 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그는 세르비아가 민주적 변화를 감당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른, 후진국이기 때문에 모든 세르비아 국민은 통치자에게 충성하고 통치자인 자신은

그들을 이끌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근대 유럽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그는 민족주의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최종적 목표는 세르비아의 개혁이 아닌, 발칸반도에서 오스만 투르크를 축출하고

세르비아인을 자신의 지도하에 통합시키며 발칸반도를 해방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치세에서

오스만 투르크와의 본격적인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미하일로는 세르비아를 발전시키고 개혁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권한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전부터 설립된 귀족원과 의회의 권한을 박탈하고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귀족원은 법류 제정권을 박탈당하고

군주가 주도하는 법률 제정을 돕고 행정심판을 담당하는 기관이 되었고 의회는 결정사항을 내릴 수 없으며

법적지위도 가지지 못한 자문기관으로 격하되었다. 또한 의원 구성을 군주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면서

군주에게 복속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국내정치에서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한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는 눈길을 국외로 돌려

오스만 투르크와의 결전을 준비한다. 군대의 서구화와 개혁을 위해 프랑스군의 대령을 국방대신으로 임명하였고

군사제도를 개혁했다. 또한 젊은 장교들을 러시아, 프러시아, 프랑스로 유학을 보냄으로써 세르비아 군의

서구화를 앞당기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세르비아 군의 노골적인 확장은 오스만 투르크 뿐 아니라

북쪽의 오스트리아에게도 상당한 견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미하일로 공은 군대의 내실을 다지면서 발칸 일대의

반 오스만 투르크 동맹을  추진한다. 몬테네그로, 그리스, 불가리아와 연대함으로써 오스만 투르크를

발칸반도에서 완전히 축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투르크인들과 무슬림들의 재산, 특히 토지는 자치공국이 수립되면서 몰수되었지만 세르비아 자치공국 내부에는

아직 투르크인과 무슬림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오스만 투르크 군의 주둔이 허용된 일부 도시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었는데, 미하일로 공은 이들을 영원히 국경 너머로 쫒아내고 싶어 했다. 1862, 세르비아 내부에 주둔하는

오스만 투르크 군에 대한 문제를 국제사회에 제기했을 때, 프랑스와 러시아는 미하일로 공의 주장에 찬성했지만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반대했기 때문에 미하일로 공은 장기전인 외교전으로 오스만 투르크가 이것을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술탄에게 압력을 가하는 한편, 세르비아의 특사가 영국에서 세르비아 민족 문제에 대한 글을 발표하면서

영국의 여론도 세르비아 쪽으로 기울었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크레타 반란.jpg
크레타섬의 그리스인들의 봉기


크레타 분포도.jpg

크레타 섬에서 정교도와 무슬림의 분포도


1866년 크레타 반란이 일어나면서 오스만 투르크 내부에서 혼란이 심화되자  1867년 세르비아와 오스만 투르크간의

타협이 이루어졌다. 이 타협으로 오스만 투르크 군은 세르비아 전토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그 동안은 요새와 도시 일부에만 주둔)

 


1830년 자치공국이 세워진 이후, 37년만에 미하일로 공은 세르비아에서 투르크 군을 완전히 축출했다.

이제 세르비아 내에서 세르비아가 오스만 투르크의 자치국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상징은 수도, 베오그라드 성벽에

세르비아 국기와 같이 걸린 오스만 투르크의 국기만이 남게 되었다.



외교적 승리에 힘입어 미하일로 공은 불가리아, 보스니아, 마케도니아 일대에서 발칸 여러 민족의 총 봉기를

계획했지만 서구열강이 오스만투르크의 급격한 붕괴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세르비아의 발칸 총 봉기 계획은 시행되지 못했지만, 1차 발칸동맹이 1868년을 기점으로 완성되었다.

1차 발칸동맹은 세르비아의 주도로 점진적으로 결성되었다. 가장 먼저 186610월 세르비아-몬테네그로 간에 동맹이

체결되었고 세르비아-그리스 간에는 1867년에 동맹이 체결되고 1868년에는 군사협약이 맺어졌다.  

이어 1868년 세르비아-루마니아 간 동맹이 맺어지면서 1차 발칸동맹이 결성되었다. 이렇게 1차 발칸동맹이

결성되었지만 1차 발칸동맹은 목표로 삼았던 오스만 투르크와의 즉시 개전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는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가 오스만 투르크에서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서 전쟁에 개입할 것이라는 러시아의 경고 때문이었다.

 

국외에서의 성공과 세르비아의 위상강화에도 불구하고 미하일로 공의 국내 통치는 난관에 봉착하고 있었다.

미하일로는 자신의 개혁방안에 동의하지 않는 다른 인사들의 단체를 해산시켰다. 특히 자유주의자들은 혹독한 탄압을

받았는데 추방, 검열, 구속 등 다양한 수단이 자유주의자들에게 가해졌다. 또한 일정한 외교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미하일로 공이 열강의 제지로 마지막 행동(전쟁)에 나서는 걸 주저하는 모습을 본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자들도

미하일로 공에게서 등을 돌렸다. 민족주의자들은 공()이 그들을 배신함과 동시에 무장 봉기와 전쟁 없이는

압제에 시달리는 발칸의 형제들을 구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발칸의 동포를 배신했다고 생각했다.

도시와 지식인들이 주를 이루던 자유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 이외에도 보수적인 농촌에서도 미하일로 공의 지지는

점차 약화되었다. 미하일로 공의 서구화 개혁은 농촌의 전통적 농업형태를 변화시켰고

그 결과 농촌은 고리대금에 시달리는 소농과 빈농들이 다수를 점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과 동시에 미하일로의 개인사도 그에 대한 반감을 높이는 원인이 되었다. 미하일로는 헝가리 귀족 출신의

공비, 율리야 후냐디와 이혼하고 자신의  5촌 조카딸인, 카타리나 콘스탄티노비치와 결혼하는 것을 원했다.  

세르비아에서 가까운 친척간의 결혼은 보수적인 관습에도 어긋날 뿐 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금하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세르비아 정교회와 정계 각계에서5촌 조카딸과의 결혼을 반대했다. 그러나 미하일로 공이 이것을 밀어 붙이면서,

지지 세력이 거의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율리야 후다니 첫번째 부인.jpg
 율리야 후다니, 첫 번째 공비

미하일로 공 재혼 안나 콘스탄티노비치.jpg카타리나 콘스탄티노비치


 

국내에서 지지기반이 약화됨에 따라 1868529일 암살자들이 미하일로 공을 암살했다. 아마도 암살자들은

다른 조직들과 연계하여 미하일로 공을 죽인 후에 정권을 탈취하여 카라조르제비치 가문을 복위하려고 했던 것으로

예상되지만, 암살자들이 즉흥적으로 다른 조직에게 알리지 않고 공을 암살함에 따라 정권탈취는 실패로 돌아갔다.

알락센다르 카라조르제비치 공은 오스트리아에 있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화는 피했지만 암살의 배후로 지목된

자유주의 지도자, 민족주의 지도자 몇 명이 구속되어 감옥에 갇혔고 암살자들은 체포된 거의 직후 처형되었다. 


밀란 오브레노비치.jpg
 밀란 오브레노비치


미하일로 공이 자식 없이 암살됨에 따라, 그의 가장 가까운 부계 친척인 밀란 오브레노비치가 군대의 지지를 받고

자치공국의 공위를 세습했다. 밀란 오브레노비치는 초대 공작 밀로쉬의 동생 예브렘 오브레노비치의 손자였고

당시 14살에 불과했다. 군대는 그를 옹립하고 섭정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군은 미하일로 공의 국내정치가 매우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타협안을 제시해야만 국내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런 이유로 다양한 세력이 참여한 섭정위원회는 새로운 헌법을 선포했다.

 

<1869년 헌법>은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아 시민권과 자유 분야에는 나아졌지만

의회는 법안제출권 없이, 군주가 구성하는 내각이 제출하는 법안을 심의할 뿐이었고 의회를 구성하는

의원도 1/3을 군주가 지명하며 의원을 뽑는 선거권도 일정액 이상의 세금을 납세한 사람만이 선거권을 가지며

간접, 공개 선거라는 한계를 가졌다. <1869년 헌법>은 자유주의자들과의 타협으로 그 이전시대에 미하면

진보한 것이기는 했지만, 세르비아에서 군주의 권한은 여전히 막강했다.

 

일정한 타협에 새로운 헌법에도 불구하고, 헌법 그 자체의 한계로 말미암아 세르비아에는 밀란 공과 섭정위원회에

반대하는 정치세력들이 형성되었다. 사회주의에 영향을 받은 세력, 1869년 헌법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자들,

자유주의자들, 감세와 지방자치를 주장하는 농민단체들이 각각 결집하였다. 다양한 정치집단들이 세르비아의 변화를

이야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밀란 공과 섭정위원회는 이들을 무시하거나 탄압하였다.

1875년 선거에서 사회주의자들과 농민들이 연합하여 일부 지역에서 승리했으나 세르비아 정부는 이 선거를 무효로

선언하고 지도자들을 감옥에 수감시켰다.

 

세르비아 국내정치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고, 세르비아를 둘러 싼 대외적인 상황도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1875년 보스니아의 정교도 세르비아인들이 봉기하자, 세르비아 국내여론은 즉신 오스만 투르크와 전쟁을

시작해야한다는 주장으로 들끓었다. 러시아의 물자지원을 바탕으로 세르비아는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을 시작했으나,

아직 세르비아의 산업발달이 미진했으며 군대도 전쟁에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에서 패배했다.

패배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투르크는 전쟁 이전으로 조건 없이 돌아간다는 매우 관대한 조건으로 세르비아와 강화했는데,

이는 열강들이 오스만 투르크가 세르비아에 불이익을 주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패배를 설욕할 기회는 곧 바로 찾아왔다. 1875, 오스만 투르크의 허약함과 쇠퇴를 확인시켜주며

그들의 압제 하에 놓여있는 발칸 민족들에게 희망을 가져다 준, 러시아-투르크 전쟁이 바로 그 기회였다.

세르비아는 러시아 측으로 참전하여 오스만 투르크를 격파했고 승리를 거머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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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투르크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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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원한 대 불가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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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스테파노에서 증가하는 세르비아 영토


러시아와 오스만 투르크 사이에 처음 체결된 산스테파노 조약에서 러시아는 자신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발칸반도를

놓고자 대()불가리아를 만들기를 원했다. 세르비아는 산스테파노 조약에 따르면, 불가리아에 비해 적은 이익만을

취할 수 있었고 대()불가리아라는 강력한 새 이웃과 접경해야하는 부담감이 있었다. 그러나 산스테파노 조약은

발칸반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단독으로 증대되는 것을 원하지 않던 다른 열강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세르비아는

열강의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유리한 국면을 맞이할 수 있었다.

 


베를린 회의 이후 세르비아.png
1280px-SouthEast_Europe_1878.jpg
 베를린 회의 이후 세르비아



베를린 회의에서 발칸반도를 재확정하는 베를린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세르비아는 남부로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다.

여기에 1830년부터 1878년까지 이어진 명목상이나마 오스만 투르크를 종주국으로 모셔야 했던 자치공국에서 벗어나

완전한 독립국이 되었다. 그러나 베를린조약은 보스니아를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사실상 할양하였고 세르비아의 남쪽 진출을 좌절시켰다. 이제 세르비아는 오스만 투르크 뿐 아니라 발칸반도의

세르비아 동포들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한 오스트리아-헝가리와도 대결해야 했다. 



베를린 회의에서 영토 확장이 이뤄줬음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 민족의 55%정도는 여전히 세르비아 국경 밖에서

이민족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문제는, 세르비아가 자력으로 그들을 통합할 수 있는 여력이 1878년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세르비아는 농민이 88%에 달하는 미개발 농업국이었고 인구 만 명 이상의 도시는 수도 베오그라드와 니쉬 뿐이었다.

여기에 바다로의 통로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외국과의 무역과 경제개발에도 많은 애로사항이 있었으며

문맹률은 80%를 넘었다.

 

세르비아 민족문제가 여전히 남아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밀란 공은 1881년 보스니아를 사실상 장악한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비밀협약을 체결한다. 밀란 공은 세르비아 정교회의 독립 보장, 오브레노비치 가문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후원과 보장, , 세르비아 왕국 선포에 대한 지원, 세르비아 남쪽으로의 확장을 약속받는 대가로

보스니아 포기,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반하는 조약 체결 금지를 약속했다. 이는 왕조가 바뀔 때까지 공개되지 않는다.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비밀협약에서 약속 받았기 때문에 1882년 밀란 공은 세르비아를 왕국으로 선포하고

스스로를 세르비아의 국왕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같은 해 자신의 권력을 안정적으로 만들기 위해 상비군인

세르비아 군을 강화시키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1883년 반란을 촉발시켰는데, 상비군을 강화시키겠다는 결정을

내림에 따라 그동안 행정단위에 따라 편성되어서 세르비아를 지키던 지역방위대의 무기를 회수한다는

결정이 내려지자 세르비아 동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반란은 강화된 세르비아 중앙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이 반란을 구실로 밀란 왕에게 가장 격렬하게 반대하던 급진주의 세력이 숙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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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세르비아-불가리아 전쟁,

(노란색 계통 두개 북쪽의 불가리아, 남쪽의 동 루멜리아가 합쳐지면서 불가리아 왕국이 탄생)



188511, 국내 정치를 장악했다고 생각한 밀란 왕은 정국을 완전히 주도하기 위해 불가리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세르비아의 여론은 남쪽으로 진격하여 오스만 투르크의 압제 하에 있는 세르비아 동포를 구출하는 것을 원했지만,

밀란 왕은 18859, 베를린 조약에 의해 성립된 불가리아와 동()루멜리아가 불가리아 왕국으로 통합된 것이

세르비아의 국익을 훼손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가리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세르비아군은 러시아의 지원 아래 세르비아에 비해 더 잘 무장되고 조직된 불가리아 군에게

 격파되었고 188511월 말, 불가리아의 통일을 인정했다. 자신이 주도한 전쟁에서 참해함에 따라 밀란 왕은

국정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밀란 왕이 국정주도권을 상실함에 따라, 밀란 왕에 의해 밀려났던 급진주의자들이 자유주의자들과 연대하여 국정을

장악했다. 그들은 1889년 내각을 구성하고 새로운 헌법을 제정했다. 188913일 제헌의회가 소집되여

<1889년 헌법>이 제정되었다. 의회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새 헌법은 선거권의 납세 제한을

 이전에 비해 절반으로 낮추고(30디나르에서 15디나르로) 비밀, 직접, 자유 선거를 처음으로 세르비아에 도입했다.

또한 왕과 내각이 보유하던 법안제출권을 의회도 가지게 하였고 군주가 임명하는 의원제도가 폐지되었다.

모든 세르비아인의 지방자치제도가 도입되었고 정치범에 대한 사형을 금지한 새 헌법은

발칸반도의 불가리아나 루마니아처럼 1831년 벨기에 헌법을 기초로 하여 작성되었고,

세르비아에 첫 입헌군주제 시대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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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쪽이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


18892, 새헌법에 대한 불만의 표시와 자신에 반대하는 급진주의자, 자유주의자들의 공격으로

밀란 왕의 퇴위하고 그의 아들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가

14살의 나이로 세르비아 왕으로 즉위했다.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가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급진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은 연대하여 섭정위원회를 구성했다.

밀란 왕은 퇴위하면서 급진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서로 반목하거나 그들의 통치가 미숙하여 세르비아 국내 정치가

혼란하기를 원했다. 만약 그런 상황이 오면, 자신이 신속하게 복위해서 그들을 정리할 수 있게 말이다. 그러나 밀란 왕

개인에게는 불행하게도 급진주의자와 자유주의자는 헌법을 이용해 세르비아를 매우 안정적으로 통치했고 발전시켰다.

 

알렉산다르 왕은 1893년 섭정단으로부터 권력을 넘겨받았으며 곧 이어 1888년 헌법을 폐기하고 이전의 전제적 성격이

강한 헌법으로 돌아가는 것을 선언했다. 또한 1897년에는 퇴위한 밀란 오브레노비치가 군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급진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혹독한 탄압을 가했다. 이에 그들은 1899년 밀란 오브레노비치에 대한

암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지속적인 국내정치의 혼란은 알렉산다르 왕이 급진주의자, 자유주의자들과 타협하게 만들었다.

이 타협의 결과로 <1901년 헌법>이 제정되어 선포되었다. 이 헌법은 <1889년 헌법>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1869년 헌법>보다는 더 진보한 것이었다. 새로운 헌법에는 세르비아 의원의 2/3가 군주에게 지명되는

상원이 포함된 양원제의 시행이 굉장한 논쟁거리가 되었다.

 

자유주의자 그룹은 대개 이 새로운 헌법에 찬성하는 분위기였지만, 급진주의자 내부에서는 타협으로 말미암아

분열이 일어났다. 급진주의자 중 청년당원과 극단파들은 타협으로 세르비아의 의회정치가 후퇴했으므로

현재 급진주의자들의 지도부가 그들을 배신했다고 주장했고, 급진주의자에서 떨어져나와

 <독립 급진당>을 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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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가 왕비
  

이런 정치적 흐름과는 별개로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의 인기는 최악이었다.

알렉산다르 왕은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시녀였던 드라가와 결혼한 것도 굉장한 반대를 불러왔지만,

결혼을 위해 부모까지 세르비아에서 추방한 젊은 국왕은 보수적인 세르비아에서 인정받기 어려웠다.

여기에 나이차이 많이 나는(12살 연상) 드라가 왕비가 왕을 성적으로 유혹해 타락시켰다는 소문,

사치에 대한 소문이 돌면서 왕과 왕비에 대한 지지율은 바닥을 쳤다. 또한 평민인 그녀와 결혼했기 때문에,

둘 사이에서 자식이 생긴다 하더라도 왕위 계승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귀천상혼) 자손이 적은

오브레노비치 가문을 고려하지 않는 무책임한 국왕이라는 여론도 팽배했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 국왕이 왕위를 드라가 왕비의 형제에게 넘길 것이라는 소문이 세르비아 내에서 퍼졌고

국왕을 제거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1903, 청년장교들을 중심으로 한 조직이 왕과 왕비를 살해함으로써

오브레노비치 왕가의 통치가 끝났으며, 오브레노비치 가문도 대가 끊겼다.

 

(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황태자 부부를 암살하는 조직인 검은손이 이 암살을 주도)



다시 카라조르제비치 왕가의 통치(1903-1918-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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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타르 카라조르제비치



왕이 암살되자 새로운 정부가 구성되었고 모든 정파가 참여하는 거국내각이 구성되었다.

이들은 페타르 카라조르제비치를 세르비아의 국왕으로 옹립하였고 군대도 페타르를 왕으로 옹립한다고 선포했다.

 

오브레노비치 가문의 전제군주정은 다시 <1889년 헌법>을 기반으로 하는 <1903년 헌법>에 의하여 의회에 기반 한

입헌군주정으로 변경되었다. 페타르 카라조르제비치는 오브레노비치 왕들과는 다르게 의회를 존중하며 자신의 기반을

다졌기 때문에 의회주의가 성공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오브레노비치 왕조는 비교적 순탄한 대외적 환경을 가졌으나 카라조르제비치 왕조는 이 시기 어려운 대외적 환경을

맞이하였다. 3국 협상과 3국 동맹 간의 대결이 시작됨에 따라 발칸 각 국가들은 진영을 선택해야만 했다.

세르비아는 독일제국의 동방정책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보스니아를 포함한 발칸반도로의 남하 야욕 때문에

협상국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세르비아 정부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남하를 저지하면서

아직도 오스만 투르크의 압제 하에 놓여있는 동포들을 구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 시기 이전부터 불안했던 세르비아-불가리아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케도니아 일대에서 세르비아인들을 지원하기 위한 세르비아 단체들을 불가리아 결사단체들이 공격하여 학교 소유주,

교사, 성직자들을 살해하면서 세르비아-불가리아 간 갈등이 고조되었다. 세르비아인들은 세르비아 수비대

조직하여 불가리아 결사조직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불가리아와의 분쟁이외에도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새로운 형태의 분쟁은

세르비아에게 많은 부담을 주었다. 1906년 초, 세르비아 총수출의 86%(대개 농축산품)를 차지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불가리아 간의 무역협정이 자신들의 이익을 훼손한다면서 세르비아에게

무역협정을 물리라고 요구했다세르비아는 이에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손해를 본다면 그 부분을 고치거나

다른 규정을 마련하자는 타협안을 제시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매우 고압적인 자세로 세르비아를 압박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가 국경선을 폐쇄하고 무역을 중지하자 세르비아는 굴복하여 불가리아와의 무역협정을 취소했다.

 

1906년 중반,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가 프랑스로부터 대포를 구매하는 결정에 반대하며 국경폐쇄로 위협했다.

세르비아는 다시 타협안을 제시해 오스트리아-헝가리 기업들에게 다른 군수물자 구입 때, 우선권을 준다고 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190677일 가축전염병을 구실로 국경을 다시 폐쇄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가 이전처럼 굴복하여 무역재개를 애원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빗나갔다.

세르비아는 프랑스로부터 대규모 차관과 대포, 군수물자, 철도 부품 공급을 받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벗어난 새로운 시장으로 수출을 시작했다. 이로서 1907년 중순에 이르기까지 세르비아는 유럽 각국과 무역협정을

체결했고 다양한 수출대상을 확보할 수 있었다. 세르비아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힌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분쟁은 오히려 세르비아가 그들의 경제적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세르비아 대외무역.png



오스만 투르크라는 공통된 적이 아직 발칸반도에 존재하고 이를 극복해야 할 필요성이 분명해지자 발칸 국가들은

다시 단결하게 되었다. 가장 사이가 좋지 않은 세르비아-불가리아 간에도 세르비아가 마케도니아 일대를 포기하고

대신 알바니아 북부를 얻어 바다로 가는 통로로 얻기로 타협하면서 동맹이 맺어졌다.  


마케도니아.png
 광의의 마케도니아



이어 불가리아와 그리스, 뒤이어서 불가리아와 몬테네그로가 마지막으로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사이에 동맹이

체결되면서 1912106일 동맹이 완성되었다.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그리스, 불가리아는 오스만 투르크에게 서구열강과 자신들의 감독하에 개혁을 선언 할 것,

기독교인들의 생명-재산을 보호할 것, 영토를 할향할 것 등의 오스만 투르크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최후통첩으로

보냈다. 이어 19121081차 발칸전쟁이 시작되었다. 발칸 국가들은 이미 허약해질대로 허약해진

오스만 군을 격파하고 발칸반도 전역을 해방시켰다. 세르비아는 3백만 명의 총인구 중 약 40만명이 전쟁에 참여하였다.

세르비아군은 남부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일대, 코소보, 알바니아로 진격하여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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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발칸전쟁, 오스만투르크의 참패 



1차 발칸 세르비아 점령지.png

1차 발칸전쟁 당시 세르비아의 영토


  

세르비아가 알바니아 북부 일대를 점령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912년 알바니아 왕국을 만들면서, 독일의 오래된

슈탄데스헤어였던 비트 가()를 알바니아의 국왕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들은 알바니아를 강하게 만들어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그 밖의 다른 발칸 국가들을 견제하고 발칸반도에서 그들의 유력한 동맹국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이러한 의도는 당연히 다른 발칸 국가들도 알게 되었고 알바니아의 확장이 그들의 이익에 매우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알바니아가 건국되면서 바다로의 진출이 좌절되었고 영국과

프랑스도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충돌을 피하라고 조언하면서 세르비아는 런던회의의 합의를 수락하여 알바니아에서

철수하였다.

 


런던조약.jpg


위 지도가 런던조약으로 확정된 분배지

아래지도가 부쿠레슈티 조약으로 확정된 발칸반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요구대로 알바니아가 건국되면서 세르비아-불가리아 간의 새로운 갈등요소가 생겼다.

세르비아는 마케도니아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알바니아 북부를 차지하기로 했었는데, 알바니아 북부를 가질 수 없게

되면서 다른 지역에서 보상을 바라고 있었고 불가리아는 오히려 세르비아에게 알바니아와 접경할 수 있는 지역을

요구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리스와 불가리아 사이에서도 테살로니카를 놓고 다툼이 일어났다.

 

이들의 후원국이었던 러시아는 이들을 화해시키려고 노력했지만 발칸 동맹을 약화시키려는 목적을 가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불가리아를 지원했고, 이 지원에 힘입은 불가리아가 1913630일 세르비아와 그리스를

선전포고 없이 기습공격 했다. 2차 발칸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패기롭게 2국가를 공격했던 불가리아는 세르비아에게

패배하고 그리스에게 밀림과 동시에 루마니아와 오스만 투르크가 세르비아와 그리스 편으로 참전함에 따라

1913810일 세르비아-그리스-루마니아-오스만 투르크에게 항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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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잡지의 삽화, <세르비아는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2차 발칸전쟁은 세르비아를 견제하기 위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원이 있었고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간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발칸반도에 강력한

세르비아가 존재하는 한, 남슬라브족이 사는 지역을 이중제국이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세르비아를 약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고 세르비아는 세르비아 민족, 더 나아가 남슬라브 민족의 진정한 해방과 국가의

방위를 위해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전쟁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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