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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근대산업도입에 대한 간략한 이야기
게시물ID : history_2718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역둔토
추천 : 3
조회수 : 606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6/11/27 18:26:01

구한말, 고종과 집권층은 근대화노력의 일환으로 근대산업의 육성이 시도했다. 근대산업 육성의 시작은 영선사,

조사시찰단, 보빙사 등의 파견으로 시작되었다. 이들은 다른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지만, 서구과학기술과 산업의

발달을 목격하고 이것을 조선-대한제국에 이식하고자 하였다. 이런 움직임은 1880년대부터 점진적으로

추진되고 있었다.

 

1880년대의 조선정부는 서구의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근대산업을 이식하고자 3가지 방법을 구사했다.

 

첫 번째는 정부가 주도하는 것이었다. 이는 18849, 고종의 식산흥업을 국책으로 명시한 칙령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이런 움직임으로 기기창(1883), 전환국(1883), 농무목축시험장(1884), 직조국(1885), 전운국(1885),

종상소(1886), 조지국(1887), 광무국(1887), 조선정보총국(1887) 등이 설립되었다. 기기창에서는 청에서 물자와

기술자를 초빙하여 운영하도록 하였고 전환국은 일본에서 기계를 들여와서 시범운영하였다.

농무목축시험장에서는 미국으로부터 농기구, 종자, 가축을 수입하여 시범적으로 운영하였고 전운국에서는

소형기선을 수입하여 조세 운반, 일반 화물, 여객운송을 시도하였다. 종상소는 양잠과 제사 등 비단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독일인을 초빙하여 설립한 곳이었으며 조선전보총국은 조선 독자적으로 전신선을 설치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이런 정부 주도하의 시도는 1880년대 말, 1890년대 초가 되면 성과를 내지 못하고 좌초한다. 이는 정부가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어 설립한 시설들에 투자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근대기술교육을 받은 인력이 부족하여

시설이 갖춰있어도 그것을 가동하지 못하는 점, 외국에서 초빙하는 기술자들의 급료가 높아 시설마다 1, 2

정도 밖에 초빙하지 못한 점, 근대자본주의를 경험한 인물이 거의 없어 경영상의 어려움, 정부의 근대 산업 도입

의지 부족 등이 이유였다.

 

농무목축시험장은 인재의 부족, 정부가 농업분야에 대한 관심이 적고 투자의지가 없었던 점,

초빙한 외국기술자가 사망함에 따라 지리멸렬하여 사실상 중단되었다. 비단산업 육성을 위한 종상소는 조선정부가

재정난에 시달리자 독일인 기술사를 해고하여 사실상 유명무실화 되었다. 근대직조산업 도입을 위해 설립한

직조국은 1880년대 후반에 이르면 정부가 재정난으로 외국인 기술자, 한국인 직조공들의 월급을 체납하여

업무가 마비된 실정이었다. 기기창도 설립 이후에 유명무실화하여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운국도 미국에서 소형기선을 도입하여 사업 확장에 나섰다가 경영실패로 자금난을 겪고 있었다.

 

두 번째 방법은 민간자본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조선 내부의 자본축적이 미약하여 근대기술을

도입하지 못한 수공업에 기반 한 회사들, 독점판매권, 조세 운반권 등을 노린 조선 후기의 도고가 이름만 바꾼

상업회사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기선을 도입하여 운영한 몇몇 운송회사만이 서구의 근대기술을

도입한 회사였다.

 

세 번째는 외국자본에 전적으로 일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880년대, 1890년대 초의 외국자본이 설립한

회사들은 대개 무역회사들이었기 때문에 산업기술 도입에는 실패했다. 이들은 물품교역에는 큰 관심을 보였지만

대규모 투자를 동반해야하는 산업투자에는 매우 미온적이었다. 유일한 예외는 미국의 타운센드회사가 인천에

설립한 타운센트 정미소(1892)이었다. 그러나 이 타운센드 정미소는 기술자가 모두 외국인이었고 조선인들은

노동자에 불과했기 때문에 기술축적이나 기술도입은 불가능했다. 또한 인천에 타운센드 정미소가 들어선 이유도

일본이 경기, 황해의 쌀을 인천에 집산하여 일본으로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수요를 노린 미국회사가

설립한 것이었기 때문에 타운센드 정미소는 조선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런 움직임에 변화가 생긴 것은 1894년 갑오 개화파 정권이 들어서면서였다. 이들은 정부조도의 개발보다는

민간바존을 이용한 회사설립, 산업발전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 이들은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육의전의 금난전권을 페지하고 포구의 공용화, 이전시기부터 폐단이 누적되어 온 상업회사들의 상품독점권,

포구징세권 박탈 등을 통해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근대자본주의를 신속하게 도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갑오 개화파 정권이 친일이라는 태생적 한계로 2년여 만에 붕괴하였지만, 2년 사이의 성과도

매우 실망스러웠다. 우선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조선의 자본축적이 저조했기 때문에 자력으로 근대산업을

도입, 육성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민간에 맡긴 수운업 등도 근대자본주의에 익숙한 민간상인이

적었기 때문에 경영난으로 파산 위기에 몰렸다.

 

이런 움직임에 또 변화가 생기는 것은 대한제국 선포, 광무개혁의 시작이었다. 광무정권에는 갑오 개화파 정권의

일부 개화파 관료들이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갑오시기 실패를 거울삼아 관료와 상인을 하나로 묶어

회사를 설립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상업자본의 부족을 메꾸고 정부의 지원도 담보할 수 있는 합동회사들은

정부의 각종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정부의 보증으로 외국인들의 투자도 받을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1897년 설립된 대조선저마제조회사는 모시, 삼을 외국에 수출할 목적인 회사로 정부의 보증아래

외국인 투자, 관료들의 참여가 바탕이 되었다. 1900년에 설립된 인공양잠합자회사는 고종의 개인적인 후원과

정부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회사였다. 대한협동우선회사(1900)도 정부의 후원아래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들은 이시기 이미 일본자본이 장악한 한국 근해 해운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며

정부의 기선을 헐값에 불하받고 우편업무를 위탁받는 등 막대한 특혜를 받았다. 이 시기 조선은행(1897),

한성은행(1897)이 관료, 상인 자본의 합자로 창립되었으며 고종의 측근 관료, 상인들이 합자한 대한천일은행은

황실의 투자가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조세 취급권한 같은 다양한 특혜가 부여되었다.

 

이런 방법은 일부분야에서는 진전을 보였으나 대규모 자본과 기술이 필요한 분야에는 적용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었다. 더욱이 민간자본과 관료자본, 정부자본을 합친다고 하더라도 절대적인 부족으로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제국은 외국자본의 투자를 절실히 원하고 있었다. 직접투자나 합자형태로 외국자본이

투자되는 분야는 대개 막대한 자본과 근대기술이 필요한 분야였다. 이시기부터 광산개발에 외국자본 투자가

매우 활발한데, 이는 광산채굴권과 면세권 등의 특혜를 부여하는 형태였다. 황실이나 정부는 광산채굴권을 미국,

영국, 독일, 일본 등에게 넘겨주고 이익의 일부(대개 25%)를 받는 방법이었다.

 

이런 방법은 국내외적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기 때문에 산업발전을 위해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찾은 해결책은 1880년대와 1890년초에 했던 정부주도의 근대산업도입이었다. 이는 국내정치와도 밀접하게

연관이 있었다. 민간을 중시하는 개화파관료들이 독립협회해산과 맞물려 실각하고 황실측근세력이

정국을 주도하게 하면서 황실 주도의 근대산업도입이 다시 시작되었다.

 

궁내부와 내장원의 역할이 증가하는 것이 이시기이다. 내각이 지휘하던 각종 식산흥업기관과 회사들을

궁내부 소유로 이관시키고 정부 소유의 광산을 궁내부 소속으로 이전시킴으로써 궁내부는

대한제국의 식산흥업을 담당하는 기구로 전면에 등장하였다. 이와 맞물려 그동안 법제적인 기관으로 대한제국의

식산흥업을 담당하던 농상공부는 업무가 축소되었다.

 

그러나 궁내부로 일원화한들, 부족한 재정상황은 여전했기 때문에, 식산흥업정책을 성공적으로 밀고나가기

위해서 재원 마련이 매우 시급했다. 재원 마련은 내장원이 담당하였는데, 내장원은 다양한 명목으로 재원을

확충하여 대한제국 정부재정을 위협하고 황실재정을 급팽창시킨다.

 

내장원의 재원확보는 역둔토 경영부터 시작되었다. 정부소유였던 역둔토를 내장원으로 이속한 후

역둔토 관리인을 파견하여 중간소유주를 배재하는 등 내장원 지배를 강화했다. 또한 측량 미비, 관습 등의 이유로

역둔토냐 사유지냐의 분쟁이 일어나는 토지를 일방적으로 역둔토로 편입시켜 역둔토의 절대적인 규모도 늘어났다.

또한 역둔토에서 효과적으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역둔토의 소작료를 인상하고 토지의 결세를 소작인에게

전가하는 불법을 황실이 직접 행하기도 하였다. 역둔토 경영이외에도 내장원은 인삼재배를 통제하여 인삼세를

부과하고 홍삼 제조와 판매에서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홍삼에서 나오는 막대한 이익은 인삼을 재배하는

농민들이 헐값에 인삼을 황실에 넘기는 것에서 나온 것이었다. 여기에 광업세를 정부로부터 빼앗아

황실 수입으로 하고 어염세, 포사세, 포구세 등도 내장원으로 이속하여 막대한 재원을 축적할 수 있었다.

여기에 민중이 상품독점으로 고통 받음에도 불구하고 재원확보를 위해 상회사들의 독점권을 다시 인정하고

그들에게 영업세와 특허세 등을 징수했다. 또한 내장원은 화폐발행기관은 전환국을 장악해 인플레이션으로

민중이 고통 받음에도 불구하고 백동화남발로 막대한 이득을 취하였다.

 

재원확보로 황실이 주도하는 근대산업육성이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기기창의 정상화가 추진되었다.

이시기 대한제국에서 병농일치제적 징병제가 추진되었는데 그와 발 맞춰 기기창을 정상화하고 대대적으로

확장하여 군수물자 생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기기창의 대규모 확장에 너무 많은 재원이 필요하고 결정적으로

병농일치제적 징병제가 좌절되었기 때문에 기기창 정상화는 좌절되었다. 이후 해군함까지 건조를 담당하는

기기창 계획은 지속적으로 나왔으나 재정부족으로 1905년까지 논의에 머물렀다.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istory&no=27049&s_no=12713355&kind=member&page=1&member_kind=total&mn=702220

(병농일치제적 징병제 시도)


이와 궤를 맞춰 군복 생산을 담당할 직조국의 정상화도 추진되었다. 러시아 기술자를 초빙하고 러시아 기계를

구입하여 직조국의 정상화를 추진했으나 징병제 좌절과 재정부족으로 시범운영하는 것에 그쳤다.

 

여기에 황실이 사용할 유리 제품을 만들 공장이 1902년 용산에 세워졌다. 러시아에서 기술자를 초빙하여 설립된

유리공장은 소규모이기는 했으나 황실이 사용할 유리제품을 생산하는 것에는 성공했다.

가장 성공한 공장은 자기제조공장이었다. 개항이후 외국 자기제품이 수입되면서 침체상태에 있던 자기산업을

부흥시키기 위해 자기제조창이 프랑스인 기술자를 고용하여 1902년 설립되었다. 이외에도 평양탄광개발시도,

농업기술소 부활 시도 등이 있었다.

 

이런 산업부흥노력이 결정적으로 좌절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내장원의 재원마련때문이었다.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남발한 백동화는 대한제국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었는데 급격한 인플레이션과

환율변동은 1900년대 초반, 늦었지만 피어나나 싶었던 대한제국의 식산흥업을 좌절시켰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대한제국은 금본위권, 본위화 주조, 태환권 발행, 중앙은행 설립 등을 시도했으나 단 하나도 성공하지 못했고

일제가 주도하는 화폐정리사업이 시작되면서 대한제국의 독자적 식산흥업은 끝나게 되었다.

 


구한말 화페이야기 4, 화폐정리사업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umorbest&no=1237400&s_no=1237400&kind=member&page=1&member_kind=humorbest&mn=702220


이로서 자주적인 식산흥업은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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