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본인의 이익을 위해 투표 할껀데, 왜 투표된 이익의 손익계산은 실제 사람끼리의 손익계산과 다를까?
다시 말해, 30명이서 단체로 밥 먹으러 갔을 때, 20명이 짜장면을 원하고 10명이 짬뽕을 원하며, 다수결로 결정하기로 했다면, 20 : 10으로 나와서 짜장면으로 결정되야 한다. 그런데, 실제는 안 그런다. 분명 20명이 짜장면을 원하고 필요한데 투표는 짬뽕이 20명 나오는 경우가 상당하다.
내 생각에 또는 객관적으로, 저 양반은 B당을 찍는게 본인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고 풍요롭게 할껀데, 그 양반이 A당을 찍는단 소리지. 그래서 처음엔 아 세상엔 무식한 사람이 많구나. 저 양반은 지가 뭐가 이익인지도 모른갑다. 하고 말았다. 부자를 위한 정당에 부자가 아니면서, 부자당을 찍는 사람도 많았다. 이것을 처음 느낄 때가, 노무현 정권시절 만들어진 종부세 문제다. 이상하게 한 채의 집도 없는 사람들이, 평생 일해도 지금의 경제구조에서 아파트 한 채 얻기 힘든 사람들이, 기를 쓰고 종부세를 반대하더라. 나는 그때 느낀 아이러니가 참으로 야리꾸리 했다. (물론, 종부세문제는 이 것을 넘어 더 많은 쟁점들을 갖고 있는 것 알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나보다 똑똑한 사람들도 자기의 이익을 반해서 찍던 것이 보였다. (경제적 이익보다 공공의 이익, 사회적 가치를 더 중시 여겨 찍는 것은 분명 아니였다.) 그 사람들까지 멍청해서 그런다고 치부하기엔, 내가 그 사람들보다도 무식하더라.
작은 해답은, 신문에서 왔다. 어느 날 집어든 신문이 그 답을 조금이나마 말해줬다. 전에 나는 신문은 어느 정도의 팩트를 담보할 줄 알았다. 근데 아니더라. 이빨만 가득하고 팩트는 하나도 없는 기사들도 가득 하더라. 그런데 우리가 거짓말 하는 이유가 뭐냐? 결국 남을 속여 내 이익을 꾀함이 아닌가? 신문도 나 같은 하나의 사람이더라. 그러니까 언론은 B당 찍을 사람을 A당 찍을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존재했다. 정확한 팩트를 가지고 정당한 근거를 들어 그 사람을 A당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었지만, 팩트없이 이빨로 가득한 기사들도 많더라. 나는 그때 언론도 거짓말 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언론은 진실하다는 교과서속 이야기고, 실제론 언론은 진실하면 좋은 것이었다.
중앙일보를 구독하는 독자들은, 그 성향이라서 중앙일보를 구독하는 게 아니다. 중앙일보를 읽어서 그 성향이 되는 거다. 한겨레일보를 구독하는 독자들은, 마찬가지로 한겨레를 읽어서 이 성향이 되는 거다. 그래서 중앙일보는 끈임 없이 자신의 이익을 관철시키고, 한겨레일보는 쉴새 없이 자식의 이익을 너에 이익이라 외친다. 내 생각에 이거 크다. 분명 옆집 할아버지는 찢어지게 가난해서 진보당 찍어야한다. 근데 보수당 찍는다. 그 할아버지가 읽는 신문 필히 보수일간지다.
언론은 이렇듯, 하나의 정치적 주체로서, 또 다른 정치적 주체들을 설득시킨다. 간혹 세뇌도 시킨다. 기만도 한다.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신문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 그 때부터였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비판의 눈을 갖고 보기 시작한 것은 TV였고, 인터넷 이였으며, 모든 매체였다. 이것을 알고부터, 나의 정치 관념은, 이익이라는 한 축만을 가지는 수직선에서, 설득이라는 한 축을 추가한 좌표평면이 되었다. (지금은 몇 개의 선이 더 추가된 몇 차원의 공간으로 갖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언론은 공정하지 않지만 공정해야 한다. 언론의 운동은 공정이라는 방향성을 갖고 움직여야한다. 최소한 팩트를 왜곡하고 부정하여 정치적 주체를 기만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진영으로 끌어들이면 안된다. 이것이 언론의 가치 방향성이라 생각한다. 언론은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고 사람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최소한의 팩트를 담보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설득하여야한다.
보수당 찍는 할아버지한테, 보수당을 찍을 때 이익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나서 설득해야 한다. 그런데 기만은 그 할아버지한테, 없는 이익을 있는 것처럼 속이는 데서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