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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의 교훈, 전쟁하지마라
게시물ID : history_2730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역둔토
추천 : 7
조회수 : 1685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6/12/22 12:01:49




trianon_by_pepebezfetory-da52yvf.jpg


구글에서 찾은 그림( 오늘의 교훈을 담은 그림이라 가져왔습니다.)



트리아농조약.png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완전한 해체는 헝가리의 운명을 결정한 트리아농조약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승전국들은 헝가리왕국의 잔존 혹은 제대로 처리하지 않아 전후에 부흥할 경우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부흥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헝가리의 완전한 거세와 혹독한 전쟁책임 부과만이 이를 막을 수 있다고 인식했다.


1920년 6월 베르사유의 트리아농 궁에서 체결된 조약은 헝가리 왕국의

약 66%를 주변국가에 넘겨주었다.


트리아농 조약의 문제점은 비 헝가리인(루마니아인, 이탈리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슬로바키아인,

독일인)이 살고 있는 지역 뿐 아니라 헝가리인이 다수를 이루는 지역도 포함되어 전리품으로 넘어갔다는 점이다.


미국과 영국, 특히 미국은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따라 최소한 헝가리인들이

헝가리 국가를 이루는 것을 원했다. 그러나 미-영을 제외한 승전국들의 요구(특히 프랑스)와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를 완전히 약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으로 말미암아 미-영이 자신들의 원칙을

포기하였고 헝가리는 가혹한 운명을 맞이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 되었다.


트리아농조약은 이러한 배경속에서 체결되었다.


트리아농 조약의 첫 장은 국제연맹의 헌장을 담고 있었으며

두 번째 장은 헝가리의 영토와 국경변화를 규정하고 있었다.


헝가리 왕국의 영토는 패전 이전, 28만 2,000에서 9만 3,000㎢로 1/3이하로 줄어들었으며

인구는 1,820만명에서 790만명으로 이전의 43% 수준으로 감소하였다.


헝가리가 토해낸 영토와 국민은 승전국과 신생국들이 나눠가졌다.


Romania_territory_during_20th_century.gif

(분홍색 지역이 헝가리로 부터 얻은 영토)

루마니아 왕국이 10만 3,000㎢와 약 500만명의 인구를 얻음으로서 가장 큰 파이를 얻었다.


Czechoslovakia01.png

(슬로바키아와 카르파티아 영토를 헝가리로부터 획득)

1281px-Czechoslovakia_1930_linguistic_map_-_created_2008-10-30.svg.png

(체코슬로바키아 국경 안에 남겨진 헝가리인의 분포)


250px-Hu-sk-1910enthnographics-with-current-borders.png

(헝가리인들은 다른 국경 변화보다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국경변화를 매우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많은 수의 헝가리인이 헝가리 국경 바로 밖에 위치했을 뿐 만 아니라

자신들이 이질적이라고 인식하던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연합국가를 구성하는 것 때문이었다.)


체코는 헝가리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며 헝가리화의 채찍을 휘두르던 슬로바키아를 체코슬로바키아를

구성함으로서 6만 1,000㎢와 350만명 인구를 차지했다.



Banat05.png

(유고슬라비아가 트리아농으로 획득한 서부 바나트 지방)


Banat_ethnic2002.png


(헝가리가 이곳을 넘겨주진 100년이 훌쩍 넘었음에도 바나트 지방 곳곳에는

헝가리인들이 거주하고 있다.)-2002년 인구조사-


유고슬라비아는 2만㎢의 영토 150만명의 인구를 획득했다.

(이 수치는 헝가리가 소유하는 크로아티아 왕국이 제외된 수치이다, 크로아티아 왕국은 패전 직후

이미 세르비아가 주도하는 유고슬라비아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Deutschösterreich1.png


(빨간 선 안쪽에 색깔이 칠해져 있지 않은 흰색 부분이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로 넘어온 부르겐란트 지역)


옛 동군연합이던 오스트리아도 트리아농 조약으로 4,000㎢와 30만명의 인구를 얻었다. 이 국경변화는

이 지역이 헝가리 왕국의 영토였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인이 다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index.jpg


폴란드는 타트라 산맥 북쪽의 폴란드인 거주지역을 통해

589㎢와 2만 4천명의 인구를 얻었다.


Freistaat_Fiume_1920-1924.png

이탈리아는 그토록 원하던 달마치아를 획득하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헝가리의 일부였던 피우메 시를 가져갈 수 있었다.

피우메 시의 확보를 통해 이탈리아는 21㎢, 5만명의 인구를 얻었다.


트리아농 조약 3장에서는 헝가리가 이행해야만 하는 의무들에 대해 규정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헝가리는 국제연맹의 동의 없이 독립을 포기하거나 국가연합을 구성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는 오스트리아와의 재 연합을 막기 위한 조항이었다.


두번째로 헝가리 내부에 아직 남아있는 소수민족에 대한 보호를 국제연맹의 감시하에 이행해야 했다.

헝가리의 불만은 헝가리는 국제연맹의 감시하에 소수민족을 보호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국경 밖의

헝가리 동포들에 대해서는 국제연맹이 외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국제연맹이 헝가리 국경 밖에 있는 헝가리인들의 헝가리 국적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헝가리의 불만이 매우 고조되었다.



이어 헝가리군은 3만 5천명으로 제한되며 징병제도가 완전히 금지되었다.

또한 장갑차, 전차, 전투기 등을 만들거나 구입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여기에 중요한 군사 인프라로 여겨졌던

철도에도 제재를 받았다. 헝가리는  트리아농 조약으로 복선 철도의 가설이 금지되었고

철도의 추가 가설은 국제연맹의 감시하에 놓였다.


3장에는 또한 배상금 조항도 포함되어 있었다. 헝가리는 1921년부터 30년간 갚아야할 보상이 있다고 명시되었다.


이 결정에 따라 헝가리는 1926년 8월까지 유고슬라비아에게 880톤의 석탄,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그리스에

각각 2만 8,000두의 가축을 인도해야만 했고 1926년 까지의 배상과 30년간의 배상을 보증하기 위해

모든 헝가리 국유재산과 원천 소득을 압류하여 배상금 위원회의 감독 아래 두어야만 했다.



헝가리는 소수민족관리를 위한 국제연맹 위원회의 상주 뿐 아니라 군비감시, 오스트리아와의 외교감시 등을

감독하기 위한 국제연맹 조정위원회의 상주, 배상금 위원회의 상주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헝가리는 가혹한 처분아래 놓이게 되었고 독일, 오스트리아와 마찬가지로

승전국과 국제연맹 체제에 대해 매우 강렬한 증오를 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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