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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전에 있었던 일
게시물ID : lovestory_2735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아저씨
추천 : 14
조회수 : 856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09/05/15 02:34:38
해마다 가정의달 5월이 오면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떠오른다. 
20년 전 까지만 해도 5월 15일 스승의 날이 되면 내 마음엔 작은 갈등이 일어나곤 했었다.
초등학교 6년 중고등학교 6년 그리고 대학 지도교수 1명. 최소한 담임만 13명인데 
어느 선생님께 문안하고 인사를 드려야 하나...... 하는 갈등이었다.
딱히 마땅한 한분이 떠오르지 않는 까닭에 나는 친구들이 먼저 연락이 오는 데로 따라 다니다보면 
주로 대학교수나 고등학교 3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인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솔직히 크게 존경하는 마음보다는 일종의 불편한 의무감으로 우루루 몰려가 인사를 드리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럴 것이 아니라 스승의 날이 오면 가장 존경스럽고 감사한 한분의 스승을 정해야겠다는 필요를 느껴 
곰곰이 한 분 한 분 추억을 더듬어 가게 되었다. 
나의 소질을 묵살해버린 선생님... 있는 듯 없는 듯 무심했던 선생님... 어머니 같이 친근하셨던 선생님.. 
변태였던 선생님 도둑 같은 선생님.. 
그러다가 나에게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주신 선생님과의 도무지 잊지 말아야 할 큰 은혜의 사건을 기어이 기억해내고야 말았다.

초등학교 시절까지 나는 비교적 부유했던 집에서 자라나 극심한 고생을 모르고 성장했었다. 
그러다 초등학교(국민학교) 4학년 때 집이 어려워졌고 
중학교 1학년이 되어서는 집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 싶어 부모님 몰래 신문배달을 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이 되어 만나게 된 박청일 담임선생님...

역사와 도덕을 가르치시면서도 수업이 끝나면 영어와 수학을 가르쳐주시고 
미술시간에 들어오셔서 아이들의 그림을 손봐주시다가 아이들의 성화로 내 그림을 보구선 
당신보다 잘그리신다며 그냥 지나치시던 35살의 패기와 의욕이 넘치던 선생님... 

1975년 가난한 시절에 중학교 2학년이던 우리는 수학여행을 가게 되었지만 
집이 급격하게 어려워진 나는 그만 수학여행을 포기해야만 했었는데 
그때 담임이시던 선생님께서 자신의 지갑을 열어 수학여행을 갈 수 없었던 3명의 학생을 지원해주셨고
그 중 나와 또 한명이 선생님의 개인 돈으로 수학여행을 가게 되어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었더랬다. 
하지만 중학교 2학년이란 다 큰 것 같지만 여전히 어른들의 도움에 익숙한 철부지 나이인지라 조금 감사한 마음만 가졌을 뿐이었었다. 

그리고 군 제대 후 나는 대학생이 되어 필요에 의해 억지로 떠올린 기억으로 결정된 선생님께 안부전화만을 드리다가 
정작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원이 되어 돈을 벌고서야 
자신의 지갑을 열어 남을 위해 보상 없는 지출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게 되었다. 
결국 수학여행을 다녀온 지 16년의 세월이 흐르고서야 나는 진심으로 선생님의 마음에 감동을 받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감사한 마음이 자꾸 자라면서 어느 날 인천에 살던 나는 시간을 내어 부산에 있는 모교로 달려갔다. 
중학교 시절 때 계셨던 여러 선생님께서 여전히 그 자리에 계셨는데 학생의 주머니를 털어가던 선생님은 여전히 평교사였고
자신의 주머니를 비워 내어준 박청일 선생님께서는 어느새 교장 없는 학교의 교감선생님이 되어계셨다. 

나는 선생님을 보자마자 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 주변 여러 선생님들이 부러워하는 분위기를 느끼면서 나의 선생님이 더욱 자랑스러워졌다. 
그날 선생님과 술좌석을 가진 후에 난 선생님께 자주 편지를 드리며 
진심으로 존경하고 감사하다고 말할 수 있는 스승이 계시다는 사실만으로도 선생님은 저의 기쁨이 됨을 고백하고 
같은 이유로 나도 선생님의 기쁨이 되길 바란다고 적곤 했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나는 돈을 많이 벌어 여유가 생기면 꼭 보답을 하리라 다짐을 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세월만 흘러가 나도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근처에 사시는 누님의 심부름으로 몹시 가기 싫은 길을 온 짜증을 다 내며 차를 몰고 나서다 그만 불법 유턴하는 차량에 받치고 말았다. 
차가 오래된 편이고 폐차장에서 자주 부품을 가져다 손보던 터라 
내심 보상을 받고 폐차장에서 고치면 남은 돈은 제법 여유 있게 용돈으로 쓸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생겼다. 
과연 얼마나 챙길 수 있을까 싶어 연락처를 주고받고 오면서 견적이 궁금해 정비소를 찾았는데 바로 교회 옆이었다. 

정비소에 파손된 차를 몰고 들어가면 그들이 기대를 할 것이 부담스러워 가격만 물어보려고 교회에 주차를 하는데 
마침 그 교회가 부흥회를 하는 날이라 주차요원이 오늘은 주차하면 안된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때 그만 나도 모르게 나의 주차의 정당성을 변명한다고 불쑥 내뱉는다는 것이 "저 부흥회 왔어요!"라고 말해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교회에 안가면 결혼할 수 없다는 아내의 등쌀에 마지못해 교회에 나간 내가 처음으로 부흥회라는 것에 참석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부흥회 설교자가 너무 지루하고 미지근하게 설교를 하여 많은 사람들이 다 졸고 있었는데 유독 나에게만 또렷하게 전달되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예수님께서 5천명이 넘는 사람들을 보며 
"이 사람들을 다 먹이려면 얼마나 들겠는가?" 라고 하니 머리가 아주 좋은 제자가 재빨리 계산하여
 "수 백 만원이라도 모자라겠습니다." 라고 대답했고 
단순하고 머리가 별로 좋지 않은 다른 한 제자는  "먹을 것이라곤 이것 뿐 인데요" 라고하면서 
소녀가 도시락으로 가져온 빵5개와 생선2개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것으로  5천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였다는 기적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아주 작은 실천보다 못하다는 요지의 설교였는데 
그 지루한 설교가 여유가 생기면 선생님의 사랑에 대해 보답하리라 다짐하면서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던 
아이큐 160이 훌쩍 넘는 멘사회원인 교만한 나에겐 충격적이고 감동적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그리고 엉뚱하게 참석하게 된 그 부흥회를 나서는 내 머리엔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바로 방금 일어난 사고에 대한 보상금이 떠올려졌다. 
이 후 난 그 보상금을 수학여행을 가지 못하는 학생을 위해 사용해달라고 모교로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이 일을 멈출 수 없어 다시 수학여행 때가 되어 돈을 보내게 되었고 
몫 돈을 보내는 것이 회사원인 나에게 부담스러워 선생님의 이름을 따 청일 장학금이란 통장을 만들어 매달 일정액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 신문에 조그맣게 실린 이 내용의 기사조각을 선생님으로부터 팩스로 받았고 선생님은 교장을 거친 후 은퇴하셨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지금도 여전히 회사원인 나는 적은 금액을 송금하고 있지만 난 소망을 가지고 있다. 
작은 열매하나를 먹어버리면 그 달콤함은 그때뿐이겠지만 
이 열매가 땅에 떨어져 죽어 그 씨앗이 싹을 내게 되면 더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이 작은 행동이 지금은 몇 명만을 위해 쓰일 테지만 그 몇 명들 중 몇 명이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게 되고 
그리하여 언젠가는 사랑이 전파되는 큰 나무로 변할 것이라는 소망이다. 
박청일 선생님께서 34년 전 봄날에 몇 잔의 달콤한 술로 바꾸어버릴 수도 있었던 얼마의 사랑이 
내 인생에 큰 의미와 감사의 열매를 가져다 준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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