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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대전 전후 헝가리 간략한 이야기, 혁명과 반혁명의 시대
게시물ID : history_2735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역둔토
추천 : 7
조회수 : 935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7/01/04 17:05:38





헝가리인들은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동맹국에 대한 증오에 불타는
승전국들에게 이중제국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며,
유지해봐야 막대한 불이익을 받으리라고 예상했다.그렇기 때문에 전후 불리한 입장에 처할
 
가능성을 최소화 하기 위해서
카로이 미하이의 지도하에 헝가리 민주 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하였다.


1919년 1월, 헝가리민주공화국의 건국이 헝가리 내부에서 완벽히 인정받았다.



220px-Mihaly-karolyi--outlawsdiary00tormuoft.jpg  미하이 카로이


헝가리 민주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인 미하이 카로이(Mihály Károlyi)는 매우 부유한 귀족가문 출신이었지만

가난한 농민과 낙후된 농촌문제에 관심이 많은 인물로서 출신계급과는 다르게 사회개혁을 주장하는

인물이었다. 1차 세계대전 중, 전쟁을 반대하기 시작하면서 주목받았던 그는 전쟁 중지, 이중제국의 해체 혹은

연방화 같은 분리, 여성 투표권, 헝가리 왕국에 존재하는 민족차별의 완화 등을 주장했다.


이런 인물이었기 때문에 헝가리인들은 그가 승전국들과 원활하게 대화할 수 있으며 새로운 헝가리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승전국들은 헝가리인들이 그렇게 생각하던 것과는 별개로 헝가리에게 막대한 전쟁책임을

부과하기를 원했다.


미하이 카로이와 그를 돕던 중도, 우익은 그들 스스로의 한계라기보다는 헝가리에게 매우 적대적인

국제적 환경으로 헝가리 내부에서 인기가 폭락했다.

( 헝가리 왕당파와 극우세력은 미하이 카로이를 선호하지 않았는데, 그가 왕정에 부정적이었던 점,

민족문제에서 전향적인 인물이었기 때문)


헝가리인들은 새로 집권한 세력이 무력하게 승전국들의 요구를 수락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헝가리인들, 특히 도시에 사는 헝가리인들은 미하이 카로이와 집권세력 이외에서

대안을 찾고자 하였다.


그때 등장한 것이 헝가리 공산당과 헝가리 사회민주당이었다. 도시에 거주하는 헝가리인들은 헝가리의 보존과

변화를 좌익이 지켜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에 러시아에 포로로 잡혔다가 러시아가

소비에트 연방으로 바뀐 뒤, 볼셰비키에 포섭되어 볼셰비키군에서 백군과 싸우던 헝가리 포로들이 귀환함에 따라,

헝가리 좌익은 일시적으로 매우 강해진 것처럼 보였다.



Bela_Kun_(cropped).png  쿤 벨러


1918년 3월, 소련에서 설립된 헝가리 공산당은 쿤 벨러를 중심으로 러시아에 있던 헝가리 포로들을 포섭하여

그들의 일원으로 만든 후, 헝가리에 귀국하여 정권을 장악하려 하였으나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으로

국제사회에서 극좌세력에 대한 경계심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대적 배경으로 말미암아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하이 카로이는 집권당의 지지가 폭락하자 좌익 일부와 연대하여 지지를 회복하고

헝가리의 분열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미하이 카로이는 온건한 사회민주당과 연대하여

연립내각을 구성하였다.


내각에 참여하게 된 헝가리 사회민주당은 지지기반 확대, 부족한 영향력

보충, 헝가리가 처한 불리한 국제환경 극복을 위해 협력자를 찾고 있었다.

사회민주당은 사방이 헝가리의 적이고 모두가헝가리를 회치고 싶어하는 상황에서

헝가리의 영토 상실을 최소한으로 막고 헝가리와 연합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라고 생각한 이제 막 태어난

신생국 소련과 손을 잡기를 원했다.

이러한 이유로 사회민주당은 소련과 결성되었으며, 소련과 깊은 연관이 있는

헝가리 공산당과 손을 잡고 그들을 연립내각의 일원으로 참여시켰다.


개혁적인 성향으로 사회민주당의 온건파와는 긍정적인 관계를 구축했던 헝가리 민주공화국 대통령

미하이 카로이는 그가 경계하던 공산당을 연립내각에 포함시키는 좌익세력의 연합을 보고 받지 못했다.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은 사회당으로 비밀리에 합당하고 미하이 카로이를 쿠데타로 끌어내렸고

그들의 위협을 받은 미하이 카로이는 파리로 탈출했다.



125px-Socialist_red_flag.svg.png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의 국기, 리비아?



이런 과정을 거쳐 1919년 3월 역사상 2번째 공산국가인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이 탄생했다.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이 2번째 이기는 하나, 오래 지속되지 못했기 때문에

1924년 탄생한 몽골 인민 공화국을 2번 째로 보기도 합니다.)


쿤 벨러가 중심이 된 헝가리 소비에트는 러시아 혁명을 모델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신속하게 이룩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헝가리 국내에서 많은 반발을 일으켰다.


또한 쿤 벨러와 헝가리 공산당은 연립하여 정권을 장악한 온건한 헝가리 사회민주당을 사실상 거세하여

쿠데타 직후 공산당이 헝가리를 완전히 장악했다.


헝가리 소비에트는 정권 장악 직후, 사유재산의 국유화, 토지의 국유화를 선포했다.


토지의 국유화는 헝가리 농촌의 농민들을 실망시켰고 헝가리 농촌을 반공(反共)의 거점으로 만들었다.


미하이 카로이는 토지 개혁이 헝가리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토지 재분배 정책을 추진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헝가리 농촌에서 헝가리 민주공화국에 대한 기대가 상당했었고, 이를 파괴하고

국유화를 제시하는 헝가리 소비에트에 대한 헝가리 농촌의 거부감이 매우 고조되었다.


사유재산, 토지의 국유화를 밀어 붙이기 위해 헝가리 소비에트는 이전에 존재하던 모든 행정기관을 파괴하고

행정에 경험이 적거나 전무한 공산주의자들이 중심이 된 혁명행정위원회를 설치했다.

이는 당연히 왕국 시절부터 이어온 구 행정기관들의 사보타지와 격렬한 저항으로 이어졌고

헝가리 소비에트는 즉시 혹란에 빠졌다.


이와 발 맞추어 헝가리 소비에트는 도시에서 자신들이 지지 받았던 가장 큰 이유인 헝가리 영토의 보존과

헝가리 이익 수호를 위해 승전국이 제시한 최후통첩을 거부했다.


소련에서 돌아온 포로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헝가리 군대가 창설되었고 헝가리 영토를 지킨다는 표어를 내세워

구 왕국 시절 장교들도 일부 참여했다.

Fegyverbe!.png

<무장하라> 헝가리 소비에트의 프로파간다


군사 모험주의라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음에도 불구하고 헝가리 국내에서 헝가리 공산당에 대한

적대감이 높아졌다.


자본가, 금융가, 귀족들은 사유재산 몰수로 분노했고, 농촌의 농민, 농업노동자들은 카로이가 약속한

토지 분배를 공산당이 망쳐놓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로 농촌에서 반혁명세력이 결집했다.



여기에 이상주의적이던 헝가리 공산주의자들이 시행한 많은 조치들도 헝가리 소비에트 정권에 대한

적대감을 키웠다.


금주령은 헝가리 농촌과 도시의 주류업자들 뿐 아니라 술을 소비하는 국민들에게서도 저항을 불러왔고

공산주의자들 특유의 반종교 정책은 헝가리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가톨릭 교회와 가톨릭 신자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내부적 반발에 직면한 헝가리 소비에트는 반대 목소리를 찍어 누르기 위해 헝가리 전역에서

우익, 귀족, 가톨릭, 농민단체 등을 상대로 적색테러를 자행했으며 언론의 자유 폐지,

정치적 표현 자유 제한 등의 폭압적 조치를 취했다.


여기에 폭주하기 시작한 헝가리 공산당을 제압하기 위해 헝가리 사회민주당 계열이 시도한 쿠데타가 실패하면서

헝가리 공산당의 일당독재가 거의 완성되었다. 헝가리 공산당은 사회민주당세력을 포함한

이른바 <반혁명 분자>들에 대한 혁명재판소를 이용한 대대적인 숙청에 나섰다.


내부의 혼란과 맞물려 승전국들은 중부유럽 한 가운데에 공산정권이 수립된 것에 대해 큰 충격을 받았고

이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분쇄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프랑스의 후원 아래 헝가리 반혁명세력을 지원하고 헝가리 소비에트를 무너뜨리기 위한 간섭 전쟁이 시작되었다.


신생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가 헝가리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330px-Nepkoztarsasag.png



헝가리는 신생 체코슬로바키아의 취약함을 파고들어 슬로바키아 일대에서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유고슬라비아와 루마니아에게 패배했다.


헝가리 소비에트와 공산주의자들이 믿고 있던 소련의 개입은 소련의 불개입 선언으로 끝이났고

헝가리 소비에트는 국제적으로완전히 고립되었다.



Thiz_river.jpg


또한 외국군이 밀고 들어오자 내부의 반혁명 세력들도 농촌에서

일제히 봉기했고 간섭전쟁의 주역을 맡은 루마니아 군이 1919년 7월 20일

티소강을 건너 헝가리 중심부로 밀고 들어왔다.


1919년 8월 1일 헝가리 소비에트의 지도자 쿤 벨러가 퇴진하고 소련으로

망명함에 따라 헝가리 소비에트는 약 140일만에 몰락했다.


이후 전후관리를 위해 루마니아 군이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 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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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의 루마니아군 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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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에서 치안활동 중인 루마니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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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의회 앞 루마니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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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군의 부다페스트 입성



누군가에게는 최악의 일이 다른 이에게는 최고의 순간일 수 있는 것처럼

헝가리 역사에서 최악의 순간 중 하나로 꼽히는 루마니아의 부다페스트 입성은

루마니아 역사 최고의 순간 중 하나이다.


헝가리령 트란실바니아에서 동포, 루마니아인을 착취하고 차별하던

헝가리에 대한 완전한 보복과 승리,


그래서 헝가리 네오나치들은 이웃국가 중 특히 루마니아에 대한 분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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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란실바니아..


250px-Horthy_the_regent.jpg

후 헝가리는 구 귀족, 자본가, 가톨릭 교회 등의 지원을 받는 해군 제독 출신 호르티 미클로시가 집권한다.

1944년까지 내륙국의 해군제독은 합스부르크왕조가 폐위됨에 따라 공석이 된 헝가리 왕의 섭정으로

헝가리를 통치한다. 왕은 없는데 섭정은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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