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도 얘기했던 적 없었던 것 같은데, 나는 당신을 다시 만난 그날 이미 당신에게 반했어요.
신촌의 백화점 앞에서 만나기로 했고 내가 조금 더 일찍 왔었죠.
그리고 당신이 나타났고, 아마도 한 여름이었나봐요.
내가 기억하는 당신은 검정색 반팔티셔츠에 모자를 쓰고 있었어요.
넓은 어깨와 티셔츠 밖으로도 느껴지는 단단하고 넓은 등이 너무나 든든해서
나는 이미 그 순간 당신에게 반하고 말았어요.
그래서 지금도 내 꿈에 당신은 뒷모습만 보여주나봐요.
단 한번도 내 앞에 선 사람의 얼굴도 보지 못했고, 목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나는 그 사람이 당신이라는걸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 등을 만질수도, 당신을 부를수도 없습니다.
뒤돌아 선 당신의 표정이 두려워요.
날 미워하고 있겠죠? 미움이 사치일만큼 날 지워냈을지도 모르죠.
이제와서 뭘 어쩌겠어요.
한참이나 지난 바래버린 분홍인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