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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작은 정부를 지향한 게 맞습니다.
게시물ID : history_2744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마법산
추천 : 10
조회수 : 1627회
댓글수 : 26개
등록시간 : 2017/01/29 16:37:33

조선은 정치적으론 강력한 중앙집권을 추구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작은 정부를 지향한 나라에 가깝습니다.
조선 정부가 왜 가난한가에 대해선 당시 위정자들이 많이 고민을 했던 부분이고,
당대에 원인으로는 2가지를 주목했는데,

1. 화폐 통용의 부족
2. 경제의 이권이 개인에게 있고 국가에 없음 

입니다.

조선 정부가 작은 경제를 지향한다는 언명을 한 적이 없다는 분도 계시는데 전혀 아닙니다.

조선이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는 내용의 비판적 실록 기사는 상당히 많고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임란이후 조정에서 화폐 보급을 추진했을 때 한 토론이지요.

당시 좌의정 윤승훈의 말중 일부입니다.

"우리 나라는 천하에 가난한 나라입니다. 이렇게 가난하게 된 까닭은 크고 작은 이권(利權)이 사인(私人)의 집에 있고 공가(公家)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에 물화(物貨)가 없다고는 하지만, 염철(鹽鐵)의 이로움만 가지고서도 나라를 충분히 부유하게 할 수 있는데, 지금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진실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대개 중국 조정에서는 관청에서 소금을 굽고 사적으로 굽는 것은 금지하며 백성들에게 매매는 하게 하되 한 해 농사의 풍흉(豊兇)을 보아 값을 조절합니다. 당(唐)나라의 유안(劉晏)이 재정을 담당하였을 적에 소금에서 얻은 이익이 절반이나 되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법제는 이와 다르기 때문에 그 이익을 취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유독 소금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삼(人蔘)에 있어서도 사적으로 채취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관청에서만 채취한다면 이것을 가지고 진헌하는 데에도 여유가 있게 되고 중국 관원을 접대하기에도 여유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백성들이 큰 폐해를 받으면서도 마련해 낼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이른바 이권이 공가에 있지 않기에 이런 근심 거리가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2백 년이나 전해 내려온 폐해를 인심이 좋지 못한 이런 말세에 갑자기 변경하기란 어려운 일이니, 이는 의논드리는 것이 아니고 신의 어리석은 소견만 진달하는 것입니다."


내용만 봐도 조선 정부가 경제적으로 얼마나 작은 정부를 지향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산천은 모두의 것이라는 개념이 있었기에 자연적으로 나는 상품에 대해서는 모든 백성이 같이 사용하는 것이라는 개념이 확고했습니다.

실제 윤승훈의 저 말에 대해 실록에서 사관은 굉장히 날카롭게 비난합니다.

"사신은 논한다. 대신이 일을 논할 적에는 도로써 인도하여 인(仁)에 도달하게 해야 할 뿐이다. 그러므로 맹자가 「왕께서는 어찌하여 꼭 이(利)만 말씀하십니까. 또한 인과 의(義)가 있을 뿐입니다. 」라고 했던 것이다. 이번에 윤승훈이 상신(相臣)으로서 일을 의논할 적에 소금을 굽는 일과 인삼을 캐어 이익을 독점하는 말을 가지고 반복해서 진달하면서, 심지어는 유안을 끌어다 대면서 말하기까지 하였는데, 저 유안은 당나라의 재정을 담당했던 한 신하이다. 이런 방법 말고도 어찌 재화를 생산하는 방도가 없겠는가. 더구나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은 백성과 함께 사용하는 것이 선왕들의 도인데, 어찌 관청에서 소금 굽는 일을 독점하고 사적으로 인삼 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백성의 이익을 다 긁어 모음으로써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재용을 풍족하게 할 수가 있겠는가. 옛날 당 태종(唐太宗)이 말하기를 「백성들에게 각박하게 하여 임금을 받드는 것은 마치 제 살을 베어 배를 채우는 것과 같아, 배는 부르지만 몸은 죽게 되고 임금은 부유하지만 나라는 망하게 되는 것이다. 」 하였다. 그러니 윤승훈은 맹자와 당 태종의 죄인인 것이다."

굵은 글씨만 봐도 알 수 있듯 조정이 소금이나 인삼 등의 자연적 재화를 국가가 독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은 일이라 말하고 있지요.
이게 당시 조선의 기본적 입장이었습니다.


또 조선은 극단적 농업중심국가라 재원 확보가 좋지 못했다 하는데,
전근대 시절에는 상업보다 농업에서 세금을 걷기가 훨씬 편했습니다.
당시 농업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고 농업 생산량면에선 어느나라에도 뒤지지 않았던 국가가 조선이라는 거죠.

서원에 의해 재정이 궁핍했다는 건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린데, 조선시대 서원이 문제시 된 건 숙종 이후부터입니다.
조선 중기인 명종 때만 해도 전국의 서원은 20여곳이었고 이런 서원 때문에 재정에 문제가 생겼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서원이 문제가 되는 건 숙종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아이러니한 건 숙종 때가 조선시대 최대의 경제 호황기였다는 겁니다.
게다가 전국에 7~800개가 넘던 서원을 흥선대원군은 고종 즉위 직후 전부다 박살내 버리고 47개만 남겨두는데,
이렇게 마무리 된 때가 1871년입니다. 
그렇다고 이후 조선 재정이 제대로 확보가 됐냐? 하면 생각보다 그렇지 못했지요.



조선 정부의 재화는 오직 2가지 뿐이었습니다.
당시 화폐에 가까웠던 쌀과 베, 그리고 특산물로 나는 공물이지요.
공물은 기본적으로 정부의 운용자금이라기보단 왕실의 사치품의 영역에 가까웠고 그렇기에 조선 정부가 실제 사용 가능한 품목은 쌀과 베 뿐이었습니다.

문제는 세금을 걷는다는 건 현대에도 쉽지 않은 행정적으로 가장 어려운 분야입니다.
화폐의 보급을 사람들은 경제적 편리함을 위함이라 생각하지만 오히려 화폐는 세금징수의 용의함에 엄청난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화폐경제가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던 조선에선
태종 세종 때 저화 등의 종이돈이나 동전 화폐의 보급과 화폐를 사용한 세금 징수 등의 정책을 모두다 실패하고
너무나도 불편한 곡물과 옷감만을 이용한 세금 징수를 조선 후기까지 유지하게 됩니다.


안 그래도 작은 정부를 지향한 조선에서 쉽지 않은 재원확보를 너무나 많은 비용이 지출되는 불편한 세금 징수를 하다보니
당연히 조선 정부 재정 확보가 어려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조선 정부가 가난한 이유는 정말 작은 정부를 지향했기 때문이고, 또 화폐경제 보급의 실패 때문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 이외의 다른 문제들도 존재하지만 그런 문제는 어느나라나 다 보편적으로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조선만의 특별함이 절대 아니라는 거죠.

이걸 왜 국뽕들의 자기 합리화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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