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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근평(시진핑)이 삽질했던 흑역사(?)
게시물ID : history_2746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고금통감
추천 : 7
조회수 : 1525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7/02/04 00:2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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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국 국가 주석 습근평의 아버지 습중훈(시중쉰)은 공산주의 중국의 개국 공신입니다. 13세때부터 교사였던 엄삼목의 영향으로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어서 공산주의 투쟁에 투신하여, 유지단 휘하의 유격대에서 투쟁하면서 중국 서북지역, 그러니까 섬서성과 감숙성 일대에서 공산주의 점령지대를 만드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 결과로 섬감(섬서성-감숙성) 소비에트 주석이 되었는데 그때가 겨우 겨우 19세 때였습니다. 이곳이 어떤 곳이냐하면 삼국지 시대로 비유하자면 한중~장안 이 일대입니다.

대장정을 마친 모택동, 주은래, 주덕등 중국 공산당 중앙세력이 최종적으로 들어간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도올 김용옥은 이를 두고 모택동을 비롯한 중국 공산당 주요 세력이 습중훈의 품안으로 들어간 셈이라고 쓰기도 했습니다. 이때 습중훈은 우파 척결 투쟁에 휘말려서 죽을뻔했는데, 모택동이 그 목숨을 구해주었습니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 승리하며 공산당이 장개석을 대만으로 몰아내고 대륙을 차지하자, 서북지역 총책임자가 되어서, 서북왕으로도 불렸는데, 곧 중앙으로 들어왓습니다. 이를 5마진경이라고 하는데 습중훈, 등소평,고강등 5명의 걸출한 지방책임자들을 북경으로 불러들인 것입니다. 모택동은 표면상 "동지들같이 훌륭한 사람들이 지방에서 썩게 둘 수 없소, 중앙에서 나를 도와주시오."라고 한것이나...실상은 중앙에 불어들여서 자기곁에 두고 감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습니다.

습근평이 태어난게 바로 이 즈음이었습니다. 당시 습근평은 개국공신들의 자녀들만 다니는 최고급 유치원에 다니면서 행복했다고 하지만, 누나 물건을 물려받아 사용하는 것에대해서는 애들이 놀린다고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고강(까오강)-요수석(랴오수이스) 사건이라고 해서 동북왕이라고 불리우던 고강 일당이 중국 동북세력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반당, 반국가 행위를했다는 죄목으로 제거당했고 여기에 습중훈이 말려들어간 것입니다. 습중훈의 유격대시절 상관이던 유지단에대한 전기 소설을 쓰는데 관여했는데 그 소설에서 고강을 높였다는 트집을 잡힌 것입니다.

그리고 여산 회의에서 팽덕회가 모택동을 심하게 비판하자 모택동이 팽덕회를 "저 넘은 해로운 넘이다."라고 벼르고 있었는데 습중훈이 팽덕회를 감싸주었다는 이유로 모택동과 모택동의 암묵적 지지로 숙청을 주도하던 강생(캉셩)에게 "습중훈,저거도 해로운 인간이다."라고 찍힌 것입니다. 이로인해서 중앙 권력에서 밀려나고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하남성 낙양 공장으로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공장까지 쳐들어온 홍위병들에게 걸핏하면 끌여다니면서 목에 "저는 반동분자입니다. "라는 명패를 걸고 고깔을 쓰고 욕을 먹고 구타를 당해야 했고, 결국 그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구금에 처해졌습니다.

어찌보면 한 고조 유방, 명 홍무제 주원장의 공신 숙청의 전통을 잇는 모택동 황제의 공신숙청에 걸린 것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모택동은 습중훈의 공산당 당적은 유지시켜 주었습니다.

아버지가 제거당하니, 습근평도 졸지에 역적의 자식이되어서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습니다. 심지어 개국공신 자녀들로 이루어진 홍위병과 그렇지않은 무배경 홍위병들간의 패싸움에 휘말려서 죽을 뻔하기까지 했습니다.그냥 왕따 정도가 아니라 교사들도 박대를 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탈출하기위해서 습근평은 지방농촌으로 내려가는 농촌봉사노동대에 자원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고향인 서북으로 내려갑니다. 기차역에서 그를 배웅하며 눈물을 흘리던 가족들에게 습근평은 "북경에 있으면 죽습니다. 살기위해서 내려가는데 울기는 왜 울어요."라면서 내려갔습니다. 당시 습근평과 그 가족들이 겪었던 공포의 수준을 짐작할만합니다. 이때가 1969년입니다.

처음에는 친척들이 사는 부평현에서 노동봉사를 하려고 했으나, 친척들마저 거세게 출입을 엄금하며 외면하는 바람에 양가하촌이라곳에서 노동을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고생이 엄청났다고 합니다. 토굴 같은 곳에서 생활했는데, 습근평 말을 빌리면 "원시인같은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험난한 농촌 노동을 당시 15세였던 도시 소년 습근평이 견딜 수도 없었고 노동강도 뿐만 아니라 생활 환경도 형편없었다고 합니다. 매일 빈대, 벼룩, 모기때문에 피부병을 달고 살았다고 합니다. 먹는 거도 쌀겨하고 깻묵내지 풀만 먹었다고 합니다.


낮에는 삽질하고, 낫질하고, 돌 옮기고 밤에는 피부병에 잠 못들고...음식도 허접하고...견디다 못한 습근평은 몰래 탈출해서 북경까지 왔다가 이모와 이모부 집에 도망쳐왔다가 "요즘애들은 나약하기 짝이 없다니까, 야 인마 우리때는 너보다 막장스러운 상황에서 게릴라 투쟁까지 했는데 그것도 못견디고 도망쳐왔냐?"라는 꾸지람에 도로 돌아가서 농촌 삽질에 매진했습니다...


그런데, 이 악물고 견디다보니 적응이 되더란 겁니다. 벼룩, 모기, 빈대도 하도 시달리다보니 피부가 아예 두꺼워져 버렸고 매일 고강도 막노동에 시달리다보니 체력와 맷집이 늘어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래 농민들하고 생활하다보니 나름 재미도 있더라 뭐 이런 거였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서 습근평은 보통 국민들의 생각과 생활에대해서 잘 이해하게되었고, 그들과 잘 어울리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임표가 반란일으키려다 실패해서 소련으로 도망가다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하고, 등소평 세력이 일부 복귀하자, 아버지 습중훈의 감금도 풀렸고 습근평도 농촌에서 떠나서 1976년 청화대학교( 청와대하고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은 그 학교입니다.)에 입학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농촌삽질 흑역사도 끝나게 됩니다. 청화대를 졸업하고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장이던 경표의 비서가 되면서 첫 공직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개국공신 아들 루비가 박힌 금수저를 타고 태어났음에도 쌩고생한 흑역사인데, 습근평 개인은 이때의 쌩고생을 자신을 단련하게 만들어주고 정치가, 행정가로서 만들어준 소중한 경험이라고 생각하더군요. 뭐 이렇게 막노동 쌩고생을 한게 습근평만 그런건 아니고 총리인 이극강(리커챵)도 안휘성 농촌에서 삽질하며 고생했고 다른 정치국 상무위원회위원들도 그런 막노동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더군요.


습근평과 이극강이 농촌에서 삽질하고 흙퍼나르고 토굴에서 밤세우던 그 시기는 박근혜가 청와대에서 공주님으로 생활하던 그 때와 동일한 시기입니다. 지금 벌어진 사태를 생각하면...열악한 농촌에서 삽질하고 허접한 음식으로 배채우며 강해진 사람과 공주대접받아가며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게된 인간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사진은 하방 당시 섬서성 양가하촌에서 삽질하던 시기 습근평과 그 친구들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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