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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은 왜 후계자가 되지 못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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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고금연구가
추천 : 3
조회수 : 1672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7/02/15 01:36:12
저번주 토요일에 주간 경향판으로 박근혜가 이사로 있었던 시절 유럽코리아 재단을 통해서 김정남을 중개인 삼아서 북한 정권의 핵심인 김정일, 장성택, 김경희와 소통을 했다는 뉴스가 났었을 때 김정남 관련 글을 써볼까 하다가 마침 오늘 고인이 되었다고 하기에 씁니다. 

주제는 왜 김정남은 장남인데도 불구하고 김정일의 후계자가 되지 못했고 결국 암살이라는 수단으로 죽어야만 했는가 입니다. 

첫째 김정남의 출생 배경 때문입니다. 김정남의 어머니 성혜림은 김정일보다 5살 위였고 영화배우였습니다. 그런데 김정일과 만나기 시작할 시점에 성혜림은 유부녀였습니다. 성혜림은 이평이라고 하는 본남편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이옥돌이라고 하는 딸까지 있었는데, 시동생 이종륜이 김정일과 친구였고 이로인해서 김정일과 연결되어 이것이 연애관계로까지 발전하였고 그렇게 낳은 아들이 김정남입니다. 김정일과 성혜림이 연애를 시작한 시점이 1969년이고 

즉, 김정남은 출생부터가 불륜의 결과로 나온 것이었고, 김정일을 장가보내려고 했던 김일성은 성혜림과 김정남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대노했으나, 이미 낳은 애를 어쩌겠냐라면서 그래도 큰손자라고 많이 예뻐래줬다고는 합니다. 그러나 김정일 1973년 김영숙이라는 다른 여자와 결혼했는데, 한때 고용희의 존재가 알려지기전 김정일의 정처로 알려졌던 인물이 김영숙이었습니다. 

즉 성혜림이 아직 건재함에도 김영숙이라는 정처를 다시 맞이했다는 것은 성혜림이 김일성 집안에서 그다지 대접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시사하고, 김정남은 결국 사생아, 서자 정도밖에 되지 못한 것입니다.

둘째 김정남의 외가 성분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 일단 성혜림의 아버지 성유경이 지주 집안 아들에 남로당계열이었습니다. 남로당은 한국전쟁 직후 박헌영과 이승엽이 미국 간천질했다는 혐의로 숙청당하면서 같이 숙청되었습니다. 성혜림의 친정도 이때 피해를 많이 입어서 시골로 쫓겨나거나 한직으로 좌천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그친 것이 아니라...

비록 본남편과 강제이혼시켜 김정일과 정식 혼인까지 시켰고, 다들 김정남을 예뻐해주긴 했지만 김일성과 그 집안 식구들은 성혜림을 못마땅해했습니다. 숙청당한 남로당 잔당집안인데다, 유부녀아닙니까. 결국 1973년 김일성의 직접간택으로 김영숙이 정처로 낙찰되면서 성혜림은 김일성 집안에서 강제축출당하고 아들인 김정남마저 빼았겼습니다. 이로인한 공포증으로 신경쇠약에 시달렸고 그리고 김정일과 김영숙이 결혼하고 1년뒤에 성혜림은 1974년 모스크바로 치료를 위해 떠났다가 2002년에 그곳에서 사망합니다. 

성혜림의 언니인 성혜랑도 1996년에 북한을 떠나 어느 스위스를 거쳐 어느 서방국가로 망명하여 숨죽이고 살고 잇고 그의 아들 이일남, 그러니까 성혜림의 조카이자 김정남의 이종사촌형이죠. 그도 1982년 한국으로 망명했죠 이 사람이 1997년 자택 앞에서 총에 맞아 사망한 이한영입니다. 북한 자객들 소행이란게 정설이나, 러시아 마피아 소행이라는 소수설도 있습니다. 

즉 외가가 모두 지주출신에 남로당 게다가 모조리 외국행을 택한 불량한 집안인 겁니다. 후계자로서는 하자가 큽니다. 

셋째 김정남의 언행입니다. 김정남도 그의 이복동생들인 김정철, 김정은처럼 스위스에서 학교를 나왔고 대학도 거기서 나왔고 1980년대 말기에 대학을 졸업하고 북한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때가 한창 이제 고르바초프와 등소평의 영향으로 공산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개혁개방이 유행하던 시기였고 유럽에서 이를 경험한 김정남도 이런 조류에 따라야한다고 강력 주장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개혁개방이라면 호환마마보다 더 경기를 일으키는 김정일은 이를 매우 좋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각종 기행들을 저지릅니다. 잘 알려진데 1993년경에 고려호텔에서 총을 들고 난동을 부렸다가 끌려가서 김정일에게 심하게 맞았다고 하는데 잘 알려진게 이정도면 알려지지 않은 기행은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래 좀 성격이 거침없고 나대는 성격이라고는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2001년 5월 일본 입국사건이 터졌습니다. 도미니카 위조 여권을 들고 일본으로 가족여행왔다가 걸려서 강제 송환당하는 망신을 당했습니다. 

김정일 입장에서는 저 녀석 그대로두면 안 되겠다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2001년 일본입국 소동이전에 이미 김정남은 후계구도에서 멀어진 것 같습니다. 이유는 김정일의 전속요리사 후지모토 겐지가 쓴 책을보면 후지모토 겐지가 1989년부터 2001년 4월까지 김정일 전속요리사로 일했는데 그는 김정철, 김정은 형제와 그들의 친모인 고용희만 보았을 뿐 김정남은 본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김정남은 스위스에서 귀국하기 무섭게 전주 김씨 왕가에서 버려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고용희가 김정일과 연애를 시작한 것은 1976년이고 김정철이 1981년생, 김정은이 1983년생(1984년 생이라고도 함)이므로 이미 김정남은 스위스에 있을 때부터 김씨 왕가의 권력계통에서 소외되기 시작한 것으로도 유추 가능합니다. 

이런 세가지 이유로 김정남은 결국 전주 김씨 조선의 왕좌를 물려받지 못하고 해외를 전전하다가 오늘 암살당했습니다. 뉴스보도를 보니 중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마카오, 일본등 여러곳을 전전하였고 김정은이 집권하고 장성택이 사형다하면서 북한으로부터의 지원도 끊기자 자금난에 허덕였고 심지어 호텔 숙박비도 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간 그가 해외 여러나라를 전전한 이유가 사업때문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김정일이 살아있었을 때의 이야기지 김정은이 집권하고 나면서부터는 그저 그간 벌어놓은 돈으로 연명하고 잇었다고 봐야하며, 자기는 여러나라를 전전하며 호텔 신세를 지고 아들은 유럽으로 유학을 보냈던 것으로보면 신변에 위협을 오래 전부터 느꼈을 거라고 판단됩니다. 


이미 김정은이 집권하기 직전에 김정은의 김정남 암살시도가 있었으나 김정남과 연줄이 있는 중국측 인사들의 방어로 실패했다고도 합니다. 


김정일의 유언으로 알려져있는 글을 보면 김정은에게 김정남을 해치지 말라, 잘 대해주라고 당부를 했는데, 어쩌면 김정일이 살아있을 때부터도 김정은은 김정남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기운을 강하게 풍기지 않앗나 싶습니다. 그러다가 경향신문 기사 내용처럼 망명, 뭐 꼭 우리나라 아니라도 미국이든 유럽이든 하는 등지에서 망명 권고를 해왔거나 김정남 스스로도 망명 고려를 하고 있었고 이는 결국 북한의 체면을 떨어뜨릴 수 있으므로 이를 알게된 김정은이 김정남을 제거한 것이 아닐까...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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