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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일부로 편입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해방시키고
민족 단위를 하나로 통일하는 것을 가장 큰 과제로 여겼다. 그러나 세르비아 단독으로는 그러한 목표를
달성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세르비아 정부는 발칸의 남슬라브 영역을 점거하고
있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유의미한 행동을 취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 때, 1914년, 세르비아인들의 가장 큰 축일중 하나인 비도브단 직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시행했다.
이 군사훈련은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인들에게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국력을 과시하고
유사시 있을 수 있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향한 세르비아의 도발을 억제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제국은 남슬라브인 권역인 발칸반도에서 자국의 완전한 이익을 위해서
세르비아와 전쟁을 해야만 한다는 인식이 높았다. 제국 지도자들은 발칸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족 문제, 미래에 일어날 민족문제는 세르비아와의 전쟁으로 최종 해결할 수 있으며 전쟁을 하지
않는다면 발칸반도에서 자신들의 영토와 이권이 성장하는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하는
발칸반도 국가들에게 위협받을 것이며 최종적으로는 열강 지위에서 탈락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와중에 1914년 6월 28일, 군사훈련을 마치고 사라예보에 방문한 황태자 부부 암살 사건이
일어나면서 세르비아를 비롯한 발칸반도, 더 나아가 세계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당시 세르비아의 상황은 절체절명이었다. 오브레노비치 왕가에서 카라조르제비치 왕가 교체시기
유혈사태와 폭력적 왕조교체로 세르비아는 유럽 외교에서 상당히 고립된 상태였기 때문에 세르비아는
유럽 열강들과 동맹을 맺고 있지 않았다. 남쪽의 그리스와의 방위동맹만이 세르비아의 유일한
안전핀이었지만 그나마도 세르비아가 불가리아의 선제공격을 받았을 때에만 발동하는 것이었다.
러시아가 1909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양보하는 대신 세르비아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약속했던 것만이 세르비아가 기대할 수 있는 열강의 유일한 도움이었다.
근처 이웃 중에서는 몬테네그로만이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침입을 받을 경우 적극적으로
세르비아를 도와줄 유일한 나라였다. 그리스가 눈을 감는다면 북쪽의 오스트리아-헝가리 뿐 아니라
친 독일, 오스트리아이며 2차 발칸전쟁을 설욕하려는 불가리아와 서남쪽의 독일계 귀족이 왕이
되었고 코소보 문제로 갈등하고 있는 알바니아의 3면 공격에 노출될 수 있다는 위기감은 세르비아를
위기감에 빠지게했다.
<세르비아는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오스트리아-헝가리의 프로파간다
반면,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와 국력차, 불가리아-알바니아와의 연대 가능성, 그동안 노려온
발칸반도의 완전한 장악 등을 위해 전쟁을 원하고 있었고 이런 속내를 가진 군부는 세르비아를
완전히 굴복시키는 위해 정부에 세르비아가 받아들일 수 없는 최후통첩을 세르비아에 제시하여
자연스럽게 전쟁을 일으키고자 했다. 군부의 계획에 독일제국이 지지를 보내자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914년 7월 23일, 세르비아에게 10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최후통첩을 보냈고, 이에 대해 48시간 안에
회답할 것을 요구했다.
1.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한 증오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영토(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대해
선동하는 출판물의 출판을 금지할 것
2. 세르비아 민족주의 단체를 해산할 것
3.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반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세르비아 교과서, 공공문서의 파기
4.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원하는 세르비아 공무원, 장교의 파면
5. 극단적이고 체제 전복적인 움직임을 억제하기 위한 오스트리아-헝가리 관리의 세르비아 주재
6. 사라예보 암살사건 수사와 심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사법기관 참여
7.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암살사건의 배후로 지명한 지명수배범 2명의 신속한 체포
8.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로 넘어오는 세르비아의 무기, 폭발물에 대한 세르비아 정부의 엄격한 관리,
그동안 무기와 폭발물을 눈감아 준 세르비아 국경 관리들의 파면과 처벌
9.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적대감을 드러낸 세르비아 관리들에 대한 진술서를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제공할 것
10. 앞서 제시한 것들에 대한 실행 방법을 즉시 알릴것
세르비아는 최후통첩을 받은 직후, 러시아에, 러시아가 예전에 약속했던 세르비아의 독립 보장의
유효함을 확인함과 동시에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세르비아의 자주권을 직접적으로 훼손하는 6항을
제외한 나머지 조항을 수락한다고 통보했다. 통보와 동시에 영국에게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제시한
최후통첩의 조항을 협상을 통해 수정한 후에 받아들일 수 있다며 영국에 중재를 요청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의 답신을 받은 직후, 대사를 소환했다.
대사가 소환되자 세르비아도 즉시 수도를 베오그라드에서 전쟁 수도인 니쉬로 천도했고 닥쳐오는
전쟁에 준비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와의 전쟁을 시작할 준비를 진행하면서 세르비아를 완전히 고립시키려는
시도를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몬테네그로를 세르비아에게서 떼어낸다면 세르비아는 완전히
고립될 것이며 바다로의 통로도 완전히 차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가
무색하게도 막대한 국력차에서 오는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와 협력하기로 결정했다.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의 운명이 몬테네그로의 운명이며 유리함, 불리함을 떠나 세르비아와 함께할
것이고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형제임을 선언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몬테네그로가 최소한 중립을
선언할 것을 요구했지만 몬테네그로의 니콜라 1세는 중립 제안을 거부했다.
이런 와중, 세르비아가 유일하게 믿고 있던 러시아에서 회답이 왔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어떠한 경우에도 러시아는 세르비아와 함께할 것이라고 답하면서 유럽이 1차 세계대전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7월 28일, 세르비아가 6조를 제외한 나머지를 수락한다는 전보를 받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에 선전포고 했다.
선전 포고 직후 전쟁 수도 니쉬에서 니콜라 파쉬치는 국왕과 각료들이 모인 회의에서
세르비아의 입장을 밝히는 발언을 했다.
" 세르비아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세르비아는 1912년, 1913년 연달은 전쟁으로 지치고 약해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민족의 명예와 국가의 주권을 수호하기 위해 그들이 강요한 전쟁을
시작해야만 한다. 나라가 아니라 개인이라도, 만약 그 사람이 다른이에게서 공격을 받는다면
비록 자신을 공격한 상대가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하더라도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그 사람과 싸울 것처럼 우리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유럽 국가들이 우리를 오스트리아-헝가리
의 자의적인 처분아래에 놓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를 도우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전 유럽이
설사 우리를 돕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 홀로 남겨진다 하더라도 모두가 쓰러지는
순간까지 싸울 것입니다."
세르비아의 왕세자 알렉산다르는 대국민선언에서 세르비아인들에게 자신의 힘으로 조국과
세르비아 민족을 수호할 것을 호소했고 세르비아 사회 전 계층은 정부, 왕실의 결연한 자세에
발 맞추어 총동원령에 호응했다.
그러나 세르비아인들의 결연한 자세, 굳건한 의지와는 별개로 세르비아는 전쟁을 치를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연이은 전쟁으로 재정은 한계에 도달해 있었고, 한계에 이른 재정으로 군비마저 불충분했다.
발칸전쟁에서 손실한 장비들을 1년여가 지난 1914년 여름까지 완전히 보충하지 못해 상비군과
예비역들을 위한 소총마저 10만여정 이상 부족했으며 중화기는 더욱 심각한 상황이었다.
또한 상비군 일부가 발칸전쟁에서 입은 부상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로 상비군 전체가 전쟁에 나설
수도 없었기 때문에 세르비아군은 인력, 장비 면에서 불리한 상태였다.
여기에 1913년 새롭게 세르비아에 편입된 남부지역은 세르비아인 만이 거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케도니아인, 알바니아인 등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르비아는 북쪽의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전력을 집중하는 것이 어려웠다. 특히 이 지역의 알바니아인들은 민족적으로 세르비아인들과 유사하고
종교가 같은 마케도니아인들에 비해 세르비아에 매우 적대적이었다. 알바니아인들은 코소보,
마케도니아서부에서 1913년 합병이래 무장한채 세르비아 중앙정부에 저항하고 있었다.
이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알바니아, 오스만 투르크의 지원 아래 세르비아를 약화시키고 전력을
분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1914년은 앞에서 언급한 악재들이 곂치면서 많은 사람들이 1914년을 세르비아가 멸망하는 해라고
생각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71만여명을 동원하여 세르비아 전역을 2주안에 정리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며 세르비아를 향해 밀고 들어왔다. 이 때 세르비아의 유일한 위안거리는 세르비아 주력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주력과 정면대결을 회피하고 신속히 회피하여 주력을 거의 온전히 보존했다는
것이었다.
주력을 보전한 세르비아군은 1914년 8월과 9월에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추가 진격을 좌절시키고
오히려 점령당했던 세르비아 영토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일대로 진격하는데 성공했다.
사라예보 인근까지 진격한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이 일대에서 세르비아인들의 열렬한 환영과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전열을 재정비하고 반격하기 시작하자 전체적으로 전력이
부족한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1914년 10월부터 다시 후퇴를 시작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다시 점령한 보스니아와 북부 세르비아에서 난민, 낙오병, 주민들은
국가를 수호하고 침략자를 격퇴하기 위해 게릴라 부대를 조직했다. 지역에 근거를 두고 지역민들의
지원과 지지를 받는 게릴라 부대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후방을 지속적으로 교란하고 보급선을
위협했다.
2주 안에 전역을 정리하겠다는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자신감은 박살났고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병력을
보충하고 1914년 10월 6일 재공세에 나섰다.수적 우위를 앞세운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진격에
세르비아의 평시수도 베오그라드가 1914년 11월 3일 함락당했고 이전과는 다르게 수도를 지키려던
세르비아군 주력도 상당한 피해를 입으면서 세르비아 멸망이 눈 앞에 다가온 것처럼 보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 총독을 임명하고 분할 점령을 준비하는 등 베오그라드 함락으로
세르비아 전역이 종결되었다고 생각했다. 세르비아 군부 온건파도 전쟁의 무게추가 완전히 기울어졌고
빠른 강화만이 세르비아를 파멸에서 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세르비아 총리를 비롯한
정계, 군부의 강경파는 견딜 수 있을 때까지 견디며 전쟁을 지속한다고 결정하였다.
전쟁 시작 때와 변함 없는 정부, 군의 결연한 자세는 세르비아인들을 매우 고무시켰다.
세르비아 상비군과 예비역으로는 전쟁을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이 알려지자 세르비아 전역에서
대학생, 고등학생, 중학생 등이 학도병으로 참전했다.
1914년 11월 6일, 왕세자 알렉산다르는 학도병과 새로 모집된 신병들에게 전선에서 한발짝도 물러나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고 알렉산다르의 아버지인 페타르 1세도 70세의 고령의 나이로 전선에 직접 나가
병사들을 독려했다. 세르비아는 후퇴하면서 신병을 훈련시켜 군을 재편성하고 프랑스의 보낸
군수물자가 도착하자 12월 3일,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생각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반격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은 반격으로 궤멸된 상태로 세르비아 영토에서 패주했다.
1914년 12월 12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손아귀에 들어갔던 베오그라드가 다시 세르비아의
품으로 돌아왔다.
1914년에 세르비아가 멸망할 것이라는 예측은 빗나갔으나 세르비아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를 점령할 때 세르비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르비아 민간인들을
여러 가지 이유로 학살했다. 이 학살을 피해 세르비아 전역에서 난민이 발생했다.
오소트리아-헝가리는 전쟁이 시작되자 세르비아 영토의 세르비아인 뿐 아니라
보스니아와 헝가리 영내의 세르비아인들에게도 혹독한 탄압을 가했다.
세르비아군에게 협조할 수 있다는 이유로 보스니아에서 세르비아인들이 죽어나갔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인을 탄압하기 위해 보스니아에서 크로아티아인과 무슬림으로 구성된
자경단을 조직해 세르비아인들을 재판 없이 처형하거나 구금했다. 또한 보스니아와
헝가리 일대의 세르비아인을 탄압하기 위해 수용소가 설치되었고 수십만명의 세르비아 민간인들이
20여개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이 수용소에서 열악한 위생상태, 음식, 학대 등으로
많은 세르비아 민간인들이 죽었다. 세르비아인들을 고분고분하게 만드려는 조치로 세르비아
지식인들도 많은 탄압을 받았다. 교수, 교사, 성직자, 대학생 등 세르비아 지식인들은 법적 증거 없이
부당한 재판을 받고 사형이나 중형을 선고받았다.
가혹한 탄압 속에서 세르비아인들은 이 전쟁이 단순한 전쟁이 아닌,
세르비아 민족 전체의 운명을 걸고 있는 전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14년 12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세르비아에서 다시 물러난 이후 1915년 10월까지 전선은
소강상태가 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동부전선에 집중해야만 했고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해 공세를 취할 상황이 아니었으며 코소보, 서 마케도니아 일대의
알바니아인 게릴라들이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오스만 투르크의 지원 아래 세르비아 영내에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쪽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915년 중반,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단독으로 세르비아를 공격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세르비아를 증오하고
친독적인 불가리아를 동맹으로 끌어들여 세르비아를 양면에서 공격하려 계획했다.
1915년 중반,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불가리아간에 세르비아 분할 계획이 교환되었고
불가리아가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915년 10월, 북쪽에서는 독일군의 지원을 받은 오스트리아-헝가리군과 동쪽에서는 세르비아 분할을
약속받은 불가리아가 공격해왔다. 불가리아의 참전은 세르비아에게 매우 큰 악재였는데,
그리스를 통해 프랑스로 부터 받던 군수물자와 식량 지원이 불가리아군이 마케도니아를점령하면서
불가능해졌다. 1915년 겨울 양면에서 공격받고 지원이 막히자 세르비아군은 정부와 군의 결정에 따라
몬테네그로와 알바니아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주력을 수습해 질서있게 후퇴한 세르비아군에 비하여
몬테네그로군은 독일군의 지원을 받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게 궤멸당했고 몬테네그로군은 해산하고
항복했다. 해산된 몬테네그로군은 대부분이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수용소에서 최후를 맞이했지만 탈
출에 성공한 일부는 세르비아군에 합류했다.
등으로 20만 명 이상의 군인과 민간인이 죽었다. 세르비아군과 민간인들은 알바니아 해안에서
연합국의 도움을 요청했다. 연합국의 요청을 받은 이탈리아가 세르비아에 도움을 주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알바니아 해안가에서만 2만 여명의 세르비아인이 굶어 죽거나 얼어죽었다.
러시아의 선량한 니콜라이 2세는 알바니아 해안에 몰려든 세르비아군과 민간인을 돕지 않는다면
러시아가 즉시 전쟁에서 이탈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러시아 황제의 선언으로 세르비아인들은
프랑스 해군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 코르푸 섬, 에게해의 섬, 프랑스 북아프리카 식민지로
피신할 수 있었다. 러시아 황제와 프랑스의 도움으로 철수에 성공한 12만명의 세르비아군은
프랑스의 군수물자 지원으로 재정비를 한 후 세르비아 탈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전투에 참여했다. 비록 프랑스를 제외한 다른 연합국은 이 전선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
지원을 꺼려했지만 프랑스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세르비아군은 불가리아군을 여러 차례 격파하는 등
상당한 활약을 하였다.
세르비아군이 적극적으로 본토를 탈환하려고 노력하고 있던 와중 세르비아에서는 광범위한 탄압이 자행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불가리아는 세르비아를 분할하고 세르비아어 사용을 금지하고 도서관, 정교회 수도원 등을
파괴했다. 또한 치안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세르비아 민간인들에 대한 재판과 적법한 절차 없는
체포, 구금, 처형 등이 광범위하게 자행되었다.
불가리아 수상은 "세르비아에 세르비아인이 존재하지 않을때까지"라고 언급하며
세르비아인에 대한 탄압을 지시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아무리 축소된 세르비아라 할지라도 독립된
세르비아가 존재한다면, 제국의 미래에 상당한 위협이 될것이며, 세르비아는 언제나 민족 통일 열망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세르비아가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혹한 탄압 와중, 불가리아가 부족한 병력 보충을 위해 세르비아에서 징병을 실시하자, 1917년 2월, 불가리아가
점령한 세르비아 일대에서 세르비아인들이 총봉기했다. 세르비아 민간인들의 봉기에 산악에 숨어서 게릴라전을
펼치던 게릴라, 낙오병, 몬테네그로 지원병들이 가세하면서 세르비아 남부 일대가 일시적으로 회복되었다.
만약 마케도니아 전선에서 세르비아군과 연합군이 북진에 성공했다면 이들의 봉기가 성공했겠지만,
세르비아군과 연합군의 전선돌파가 실패하면서 봉기도 최종적으로 1917년 겨울 실패로 돌아갔다.
불가리아군은 세르비아 일대에서 잔혹한 보복을 가했다. 여자와 어린이를 포함한 3만여명이 학살당했고
남부 세르비아의 수십개 마을이 파괴되었으며 수용소가 설치되었다.
비극과는 별개로 동맹국의 전쟁 수행능력이 바닥에 떨어지고 미국이 참전하자 마케도니아 전선에도
변화가 생겼다. 세르비아군은 미국의 군수물자 지원과 프랑스의 병력 지원에 힘입어 1918년 9월 15일
마케도니아 전선을 돌파했다.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전쟁 수행 능력이 바닥나고 불가리아는
그들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자 1918년 9월 29일 항복했다. 불가리아가 항복하고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본토로 패주하자 세르비아군은 10월 12일에 전쟁수도 니쉬를, 11월 1일에는 수도 베오그라드를 해방시켰다.
패주하는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세르비아 일대에서 다시 봉기한 세르비아 게릴라와 민간인들의
공격을 받았다.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봉기하여 세르비아군과 프랑스군, 그리스군을 환영했고 11월 중순,
전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불가리아의 손아귀에서 해방되었고 세르비아 왕국이 다시 재건되었다.
세르비아를 회복한 세르비아군은 11월, 사라예보의 세르비아인들의 요청과 연합국의 요청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로 진격했다. 11월 동안, 세르비아군은 파죽지세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점령했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지방 위원회 들은 세르비아와의
합병을 선언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뿐 아니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완전히 무너지자 세르비아군은
자그레브의 크로아티아인들이 이탈리아를 막는 것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고 크로아티아로 진격했고
11월 14일, 자그레브를 함락시켰다. 이후 세르비아군은 이탈리아군과 경쟁하며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일대까지 완전히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 세르비아인들이 그토록 원하던 남슬라브인의 통일국가
유고슬라비아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정의의 하느님( Боже правде 보제 프라브데) - 한국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