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KARMA
[2부-끝의 시작]
아카스_네팔
그때였다!
방구석에 던져두었던 휴대폰이 적막함을 깨뜨리고 울리기 시작했다. 영훈이었다.
“...여보세요?”
“천지냐? 나다!”
“어...그래...만났어?”
옆에서 그녀의 웃음소리가 잠깐 새어나왔다. 영훈의 말이 이어졌다.
“야..그런데 큰일 났다. 천지야!”
“왜? 뭐가?”
“하하. 별건 아니고, 근데 이 친구가 말이야 죽어도 너 만나러 왔으니까 널 보고 가겠다는 거야. 막무가내인데 어떡하냐? 뭐 그래서 너 보러 가고 있다. 대충 치워놓고 있어!”
“뭐? 너...너 지금 어디야? 지금 어디까지 왔어?”
“한 삼십 분 안에 도착할 꺼야. 같이 술 한 잔 하자”
“그..그래? 그리고, 영훈아, 내가 주라던 것은 줬냐?”
“당연하지. 근데, 보고는 깜짝 놀라더라? 그거 보고는 더 보채기 시작 하는 거야. 널 보겠다고. 암튼 금방 갈께. 끊는다!”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안돼! 피해야돼! 지금 그녀를 다시 만나면 모든 것이 되풀이 되는 거야. 더 이상...더 이상은 안돼!’
삼십 분이면 온다했다.
정신없이 가방을 챙겼다. 지갑, 휴대폰 아무렇게나 집어넣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어 가는 것 같았다. 밖으로 무작정 내달렸다. 얼마나 달렸는지도 모르게 쓰러질 듯 전봇대에 기대면서도 괜히 청승맞게 나오는 눈물 때문에 혼났지만 일단은 오로지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만이 뼛속까지 가득차 있었다. 어쩌면 소용없는 짓일지 모르지만 그외에는 이순간을 벗어날 방법이 없었기에.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덧 달은 밤을 새우면서 치울고, 나는 어느새 무작정 잡아탄 목포행 기차 안에서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바다를 바라보며 죽고 싶다!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며, 백년에 걸친 인연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싶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밀려드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백사장에서 고요히 누워 맞이하는 죽음.
그렇다!
나는 무작정 떠나왔지만, 이젠 방황하지 않으리라.
어느 누가 나의 결심을 충동적이라 말할 수 있는가?
나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반드시 만나야 할 누군가를 향해 먼 여행을 떠나려는 것뿐이다!
결심이 조금씩 더 단단해 지고 있었다.
자정, 목포역 광장.
낯선 도시는 그래도 항구라는 모양새를 내는 듯, 비릿한 공기부터 서울과는 달랐다. 한 무리의 택시기사들이 자판기앞에서 커피를 뽑아먹으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아저씨, 바닷가로 가 주세요.”
“아, 예. 바닷가도 여러 군데라서... 어느 쪽으로 갈까요? 뭐, 아침나절 관광선을 타실 계획이면, 여객선터미널로 가셔야겠고, 바닷바람을 쐬려면 유달 해수욕장도 있지요.”
“그냥 민박집들 있는 한적한 바닷가로 가 주세요.”
택시는 한적한 도로를 시원스레 내달렸다.
“아저씨. 해수욕장가면 탁 트인 바다를 볼 수 있겠죠?”
“허허. 목포에 그런 바다는 없어요. 여기가 원래 푹 파묻힌 모양이라 근처 바다는 다 주변이 섬이고 육지에 둘러 싸여서 탁 트인 맛이라고는 없지요. 뭐, 그나마 넓은 바다를 보려면 톱머리쪽으로 가야되지만.”
“톱머리요?”
“예, 바닷가가 톱같이 생겼다고 해서 그렇게 불러요. 좀 멀기는 한데... 그쪽으로 가볼까요?”
톱머리라는 곳은 시내에서 좀 떨어져 있어 택시는 고즈넉한 도로를 한참이나 내달렸다.
“민박은 있겠죠?”
“예, 호텔 같은 것은 별로 없지만 민박치는 집이 몇 채 있지요. 여행 오셨는가 봐요?”
“예. 괜히 목포가 오고 싶더라구요. 휴가라서.”
“하하. 혼자 다니는 여행이 진짜라던데 여행 다닐 줄 아는 분이네요.”
적절한 설레발이 있는 사람이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그런 저런 얘기가 삼사십 분 이어지고 나서야, 택시는 한적한 바다마을 귀퉁이에 멈추어 섰다.
“조용하게 있다가려면 민박이 낫죠. 잘 쉬다가세요.”
기사는 꽤나 친절했다. 택시를 내려서니 갑자기 바닷바람이 시원스레 다가왔다.
항구라고 노래까지 지어 부르는 도시가 목포라더니, 실상 그런 소문이 무색할 정도로 마을은 너무 조용했다. 아마 밤이 늦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길은 바다를 왼쪽에 끼고 뻗어있었다.
호텔 간판을 단 건물이 멀리 몇 보였지만 - 사실 전혀 호텔 같지 않았지만 - 모두를 지나치고 바닷가가 내다 보일 듯한 민박집 하나를 골라 들어섰다. 구멍가게랑 한데 붙어 있는 아담한 민박집이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머니 한분이 여닫이 방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방 구하려고?”
“예, 할머니. 좀 쉬다 가려구요. 방있나요?”
“그럼. 저 끝방으로 가요. 내가 이불하고 갔다 줄 테니.”
“바다 보이죠? 바다가 보였으면 좋겠는데.”
“바다야 나가서 보면 되지. 방에서는 푹 쉬는 게 상책이야.”
방으로 들어서자 할머니는 이내 이불보따리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옥수수 두개를 가지고 뒤를
따랐다.
“뭔 청승으로 이 늦은 밤에 혼자 돌아다녀?”
“꼭 같이 다녀야 여행인가요? 휴가라서 서울서 놀러왔어요.”
“목포까지 멀리도 왔네.”
“서울역에서 열차시간표보고 무작정 잡아탔어요. 재미있잖아요?”
“아직 젊구만... 젊다는 게 그런거여. 옥수수 맛 좀 보아. 시내 가서 몇개 사왔는데 맛이 좋아.”
할머니는 연신 입가에 주름진 웃음을 띠며, 방바닥을 손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방은 따뜻하니까 푹 쉬어.”
“예, 고맙습니다. 쉬세요. 할머니도. 아, 그리고 할머니. 저 여기서 며칠 쉬다가 갈 수도 있어요. 근처에 식당이 있나요?”
“식당까지 뭐 하러 가? 우리 집에서 먹어. 어차피 손주놈하고 둘이 사는데 잘 됐네, 밥값은 많이 안 받을 테니까.”
할머니가 방으로 돌아가고 나서, 나는 그제야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어느새 밤이 깊어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방은 괜찮았다. 벽에 기대고 앉아서 방문을 열어놓으면 멀리 파도소리가 낮게 들리는 방이었다. 가방 속에서, 출발할 때 미리 사둔 소주를 꺼냈다. 여러 번 여행을 하면서 자연스레 몸에 밴 습관이랄까, 흔히 밤늦게 여행지에 도착하면 술담배 사기가 곤란한 경우가 많아서 사 온 것인데 아주 잘한 일이었다.
그리고 수면제 100 알.
집에서 나와 기차역까지 가면서 몇 군데를 돌고 돌아 조금씩 산 것이었다.
담배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방안에는 대충의 술자리가 마련되었고, 이미 낮부터 겹쳐있던 피곤함이 무거운 듯, 눈을 지긋이 감은 채 나는 물컵으로 쓰라고 준 유리잔에 소주를 가득 부었다.
허무한 웃음이 가볍게 새어나왔다.
‘인생 참 힘들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군.’
안주대신 담배를 세차고 들이마셔도 더 이상 답답할 것이 없는 가슴.
그녀와 영훈은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난장판이 된 방안 꼴하며, 꺼놓은 휴대폰에 몇 번이고 메시지를 집어넣으면서 나를 찾았겠지.
그리고 지금.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별일 없이 헤어졌을까?
아니면...아니면, 내가 그녀를 작년 처음 만났을 때처럼 함께 있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리고 이것이...이것이 시작일까? 아니면 끝일까?’
PET병으로 산 소주가 밑창 빠지듯 위장 속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그예, 열 개들이 수면제 캡슐을 기어이 집어 들었다.
똑...똑...똑......
하나를 꺼내고, 또 하나를 꺼내고.
방바닥엔 어느새 새끼 손톱만한 수면제 알갱이들이 소줏잔 속에 소복하게 담겨 있었다.
그래, 그를 만나자!
그리고 소주 한잔. 그리고 또 소주 한잔.
시간이 깊어지면서 극심한 피곤함이 기승을 부리는 지, 눈꺼풀이 한 없이 무거워졌다.
‘기다려라...기다려...’
“아니, 무슨 잠을 그렇게 깊이 자?”
까마득한 어둠 저편에서 누군가 끝도 없이 부르는 손짓이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충혈된 눈을 억지로 뜬 것은 아침나절이었다. 깨질 듯한 두통에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뜬 옆에는, 얼굴이 상기된 할머니가 한참이나 어깨를 잡아 흔들고 있었던 듯,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걱정스럽게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난 또 어떻게 된 줄 알았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길래 들어왔는데. 깜짝 놀랐네 이 사람아! 밥먹고 자야지!”
“아... 아니에요. 할머니... 저... 더 자야겠어요.”
‘아... 젠장.’
금세라도 토할 것 같은 속을 억지로 가다듬고 터질 듯한 머리를 다시 뉘었다.
“에구... 징하게 한잔했구만.”
방구석에 나뒹구는 PET병을 본 할머니는 혀를 연신 끌끌 찼다.
“좀 있어봐. 죽이라도 좀 쑤어 올 테니까.”
한마디 말대꾸도 할 수 없었다.
온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서 한없이 침몰하는 기분이었다. 수면제 스무 알. 그것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할머니는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수면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벌써, 날은 밝아서 제법 따가운 햇볕이 창쪽으로 기웃거리고 있었다. 겨우 기운을 차리고 바닷가에 나선 시각은, 할머니가 그예 쑤어다 준 죽을 먹고 나서도 한참 지난 후였다.
알고 보니 짐을 푼 집은 톱머리 중에서도 가장 변두리에 자리 잡은 오붓한 가정집이라서 사람들 발길도 뜸한 곳이었다.
구름이 서서히 끼는 하늘을 이고 나는 백사장을 지나 한참을 걷다가, 물보라를 일으키고 가는 작은 바위위에 쓰러지듯 걸터앉아 모든 것을 게워냈다. 비명처럼 소리를 지르며.
조금씩 파도가 높아졌다.
망망한 수평선 끝을 계속 바라다보면 마치 내가 바다 한가운데에서 온 몸으로 파도에 맞서는 듯 한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나는 하염없이 나에게로 쏠려오는 그런 파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파도는 가마득한 곳에서 보일 듯 말듯 잔주름을 일으키며 와서는, 조금씩 조금씩 커져, 마침내는 집채 같은 크기로 내가 있는 바위를 때리고는 사라졌다. 그리고 바로 또다른 파도가
밀려오는 것이다.
억겁을 감당한 바위의 몸은 파도의 물살을 용케 헤쳐 온 흔적이 선명했다.
그게 바위의 나이였다.
온몸을 긁히고도 자신의 몸으로 나이를 보여주며 묵묵히 참아 온 바위.
뭐가 그리 못마땅하기에 억겁을 두고 내리치는 저 야속한 파도...
나는 마치 바위위에 또 다른 바위가 되어 박힌 듯 꼼짝없이 앉아 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내가 밟고 있는 이 바위만큼 단단한가?'
백 년 전의 사랑, 그리고 이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전쟁, 전쟁! 그리고 재회. 또, 이별.
그 수많은 파도를 맞아가면서 나는 바위처럼 단단했었나?
아니다!
어쩌면 나는 바위는 고사하고, 철따라 바람 따라 한 줄기 빗방울에도 온몸 휘둘리는 갈대처럼 살아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바위만도 못한 인생.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무릎아래까지 흠뻑 적셔버린 물보라는 담배연기마저 금세 흩어 버렸다.
'그래, 먼저 나의 궤적을 완성하자!'
바위가 억겁의 세월 겪어온 파도의 시련을 자기 몸 긁힘으로 보여주듯이, 나는 백년의 인연을 글로 남기자.
죽음은 그 뒤에 생각해도 늦지 않으리라.
시간이 꽤나 지나 방으로 돌아온 저녁, 내 손엔 두툼한 대학노트 몇 권과 펜 몇자루가 들려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방문을 잠그고 겉표지에다 큼직하게 "The KARMA" 라고 썼다.
.....우리는 작년 음력 9월 11일에 만났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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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역사 판타지 [카르마 ( The KARMA )] 는
문피아 일반연재 ( https://blog.munpia.com/akash_nepal )에도 올리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오늘의 유머 '책게시판'에도 올려보려 합니다. 관심가져 주시면 열심히 올려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피드백이 너무나 목말라서라는 건 비밀
문피아 (검색 : 아카스네팔 또는 카르마)에서는 카르마의 '1부 외전'과 기타 허접한 단편들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