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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문] 아무것도 아닌
게시물ID : readers_2771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manbokii
추천 : 6
조회수 : 496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7/02/14 11:25:18



  아무도 아닌의 목차를 읽다가 실소했다. 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아 읽었던 단편을 처음부터 다시 읽고는 하는데, 이 책은 대부분 읽었던 것들이었다. 굳이 찾아 읽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계간지라던가 다른 수상 모음집에서 읽은 것 같았다. 작가란에 황정은이라고 써있으면 일단 펴보는 태도가 아니었을까. 상행, 상류엔 맹금류, 명실, 누가, 누구도 가본 적 없는을 알고 있었고 양의 미래, 웃는 남자, 복경을 처음 읽었다. 책은 일주일에 걸쳐 목차에 적힌 순서대로 읽었다. 해설과 작가 이력이 없는 것을 수상하게 여겼고 읽은 단편들을 다시 읽으며 큰 감동을 받았다. 8편 중 5편을 알고 있었으나 책은 제값을 치렀다고 생각했다. 나는 황정은을 좋아한다. 


  분명 나 말고도 많은 분들이 칭찬하겠지만 굳이 한 번 더 언급하고 싶다. 황정은이 직조한 단어에는 확연히 다른 힘이 있다. 발음하는 즐거움을 처음으로 알게 된 단편은 양산펴기였다. 착하고팟(팟하고 착이던가?), 하며 화자는 양산을 폈다. 나는 그 단편을 읽은 뒤로 한동안 착하고팟, 팟하고착이라고 중얼거리고 다녔다. 착팟, 착팟. 그것이 입에 배어 터무니없는 시간과 공간에서 소리내기도 했는데, 심히 부끄러웠지만 황정은을 아는 사람들은 양해해줄 것 같았다. 오히려 착하고 팟이라고, 이렇게 정확히 양산을 펴야한다고 지적해주지 않았을까? 황정은의 문장에는 삶을 즐겁게 만드는 신비함이 깃들었다.
  음... 모든 단편에서 재미있는 단어들이 하나씩은 있기 때문에, 그냥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단편에서 꼽아보겠다. 나는 ‘누가’를 제일 좋아하는데,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노인처럼 스무스하게 당도할 것이다.’에서 놀랐다. 이 문장을 소리 내어 읽고 탄식했다. 
  언젠가는 노인처럼 되고 말 것이라는 화자의 체념이 절절하다. 직접적인 묘사나 다른 방식을 쓰지 않고, 스무스하게 당도할 거라는 무척이나 유화한 표현을 쓰는 데, 나는 이 문장이 매우 적합하다고 느꼈다. 지금 쓰면서 알맞은 표현이 생각났다. 황정은이 쓰는 단어와 문장은 장면에 ‘잘 어울린다.’
  황정은이 작가인데 당연한 소릴하네, 라고 할 수도 있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황정은에게는 뭔가 다른 구석이 있다. 그것이 입에 착 달라붙는 것처럼 그것이 소설 속 화자와 배경에 착하고 달라붙는 것이다. 마치 그곳에다 쓰라고, 그곳 아니면 어울릴 데가 없다고 태어난 것처럼... 나는 그런 작법을 좋아하고 그것이야말로 황정은만이 쓸 수 있는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한다. 대개 소설을 읽다보면 먼저 울거나 웃거나 감정을 느껴야 하는데, 황정은의 소설은 먼저 아름답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칭찬은 그만하고 내적인 측면을 살펴보자. 복경을 마지막으로 읽고 느낀 점을 요약하자면, ‘저변에 깔린 분노’ 다. 물론 여러 갈래로 분노가 표출되긴 하지만, 나는 그것보다 광대하고 음울한, 섬뜩한 폭력성을 느꼈다. 아무도 아닌의 모든 단편들은 참을 수 없이 화가 났지만 애써 참으면서 차분히 웃는다. 그녀의 초기 작품들과는 많이 다르다. 초기에는 그야말로 폭력 그 자체, 직접적인 감정의 표출이라고 한다면 이제는 전반적인 세계에 대한 분노 혹은 정치로 집약된다. 
  세월호 이전의 단편들은 더 직접적으로 표현된 반면에, 이후의 단편들은 오히려 표현을 자제한다는 점이 재미있다.
  상행에서는 오제가 그게 경제다, 라고 말하고 누가에서는 자신이 계급적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웃는남자와 복경에서는 그런 것들이 없다. 다만 소심하게 저항하며 거짓말할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마지막 두 편에서 더 큰 분노를 느꼈다. 공포... 같기도 하고. 아무튼 무지막지하게 크고 한눈에 들어오지 않아 그 피부만 더듬어 짐작할 수 있는 분노가 느껴졌다. 앞의 화자들은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신산한 삶을 참을 수 있지만, 뒤편의 화자들은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금방이라도 범죄를 저지를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더 큰 범죄, 예를 들면 살인 같은 것들 말이다.
  아마도 황정은의 기분 아닐까? 정도로 마무리 짓겠다. 이전까지 그녀의 분노는 적당한 수준의, 어떤 단편들을 통해서 해소 가능한 것들이었다면, 세월호 이후의 분노는 단편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 이 정도로 화났어라고 말해주진 않지만, 그리고 이런저런 면이 마음에 안들어라고 말해주는 대신에 비싼 침대를 그어버리고 저도 모르게 혁명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는다. 그것은... 나 같은 무지렁이 범인들은 차마 상상조차 못할 정도로 커다란 분노 다.


  아무도 아닌을 사람들이 자꾸 아무것도 아닌이라고 읽는다고 겉장에 썼다. 나는 이 문장이 재미있어서 여러 번 읽었다. 아무도 아닌이라는 말이 입에 배지 않아 그런 것 같지는 않고,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아무도 아니라는 것은 정체성의 부정이다. 사람들은 그걸 무서워하고 회피하려 한다. 그것은 본능적이고 범죄도 아니기에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아무것도 아닌은 되는가? 우리는 아무도 아닐 순 없지만 아무것도 아니어도 되는가? 아무것도 아닌은 부재와 약간의 무시를 내포한다. 겉장을 읽고 상행을 읽기 시작할 때 이런 고민이 들었는데, 다 읽고 나서는 느낌이 바뀌었다. ‘아무도 아닌’은 아무도 아닌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을 위해 쓴 것이라고. 
  그것을 알아채자 나는 갑자기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된 것 같아 무서웠다.  





  어떻게 끝내야할지 몰라 제일 좋아하는 문장을 써본다.
  내가 정말 미친 것 같은 얘기 해줄까? 어떤 할아버지가 여기 살았거든? 근데 지금은 어디 갔는지 몰라. 나는 모르고 어쩌면 그 노인도 몰라. 나는 그 노인보다 낫지만 지금의 나하고 그 노인 사이엔 거의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으니까 언제고 나는 그 노인이 있었던 곳에 스무스하게 당도할 것이다. 그 거리를 최대한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돈뿐인데 나는 돈이 없지. 이상하게 지금 돈이 없고 어쩌면 영원히 없지. 그러니까 말하자면 방법이 없는 거야. 나는 미래에 아주 매끄럽게 그 노인처럼... 어? 그렇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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