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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고백할 것이 있다.
나는 작년 강의에서 “상류엔 맹금류”를 해부한 적이 있었다.
맹금류의 축사에서 내려오는 똥물을 받아먹는 것을, 나와 학우들은 강요된 세습 혹은 가난으로 보았다. 그 모습에는 기성세대에 대한 적개심이 만연했다. 하지만 교수는 그 속에 들어 있는 어떤 것을 보라 했다. 도의적으로는 유감스러우나 법적으로는 굳이 상환하지 않아도 될 채무를, 부득불 되갚으며 소신을 다하는 부모의 모습을 말이다. 그 순수함에 주목하라, 교수는 말했다. 순수하고 착한 사람들이다. 상류의 맹금류에게 착취당해도, 그저 순수함을 지키려 하는 그 모습. 1인칭 시점으로 바보처럼 묘사되기만 한 그 모습. 그 모습이 진정으로 텍스트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 교수는 우리에게 말했다.
살부殺父의 각오로 임해라. 스승을 죽여야만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미 군림하고 있는 기성세대의 문화를 배반하고 침략하여 점령해야만, 우리는 기성세대로 살아남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살부의 각오로 세상을 살아야만 한다. 이러한 각오는 기성세대에 대한 존경의 기저에 자리 잡은 적개심이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데 필수적인 그 적개심은, 황정은의 소설을 오독하는데 매우 크게 작용했다. 그래서 나는 황정은 소설집, “아무도 아닌”을 매우 곱씹듯이 읽어야만 했다.
어머니는 병에 걸리고 아버지는 나약하다. 가난은 대물림 되고 나는 세상에서 도태되거나 고립되거나 분노로 관념화 된다. 그리고 그것들의 촉발점은 굉장히 사소한 생활의 한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황정은의 소설들을 두루뭉술하고 과격하게 표현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중에서도 한 가지에 집중했다. 그것은 가난이었다. 가난은 쉬이 세태문학으로 변질될 수 있는, 어려운 소재다. 그렇다면 세태라는 것은 무엇인가. 세태라는 것은 대중이다. 흔하디 흔한 것들, 바로 옆에서 볼 수 있는 것들. 아무런 의미나 그 가치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들. 그것들이 세태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세태는 “아무도 아닌” 것이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닌” 것일 수도. 그럼 가난은 무엇일까.
가난을 통해 ‘월식(이상)’을 볼 수 있고(‘상행’), 가난은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외로움)’게 만들며(‘양의 미래’), 가난은 ‘노인을 내쫓았다는 기분(죄의식)’을 들게 만들며(‘누가’), 가난은 ‘막연하게 위축되(단절)’어 아내에게 버림받고(‘누구도 가본 적 없는’), 가난은 ‘내 잘못이 무엇인(세대갈등)’지 생각하게 만들고(‘웃는남자’), 가난은… 가난은… 가난은….
가난은 모두가 가지고 있는 질병의 근원적 그 무언가를 촉발시킨다. 그럼으로써 우리를 “아무도 아닌” 것으로 “단순화” 시킨다. 단순화된 우리들은 가난이 촉발시킨 그 무언가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채,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며 그저 울뿐이다. 가끔씩 울분이 쌓여 천장으로 물건들을 내던지거나, 소파를 너덜너덜할 정도로 찢어낼 정도로 분노에 가득차기도 한다.
외로움과 소외. 그로인한 단절.
황정은의 소설은, 고요한 칼날로 가슴 한편이 아릴정도로 헤집는다.
질문 : 잊힌다는 것은 망각되는 것이다. 망각은 주로 인간에게 축복으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명실이 세태 속에서 잊히는 것은 축복으로 봐야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