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6년.. 당시 한국의 1인당 GNP는 79$ 세계 최하위의 가난한 국가였습니다. (필리핀 170$,태국260$,베트남240$....)
거기에 항상 틈을 보아서 공격해 오는 북한까지.. (북한이 한국에 침입해서 일으킨 테러는 셀수도 없음.. )
서독은 일할 사람이 턱없이 부족할 정도로 경제 호황 상태. 하지만,이미 과거에 외국인 노동자를 독일에 취업시켜 갖은 문제를 경험한 독일은 더 이상 주변 유럽 빈국에서 노동자들을 불러들이길 원하지 않았고,
그 대안으로 철저한 해외 분석결과, 한국에 양질의 노동력이 남아 돌고, 한국인의 범죄율이 절대적으로 낮다는 것을 높이 평가. 여러 대안책 중에 한국인을 선택해서 자국 독일내 노동력으로 활용하려 추진했습니다.
한국 정부가 한국인을 해외에 노동력으로 팔려고 내 놓은 것이 아니라, 독일 정부가 한국인을 자국내 노동력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우고, 한국 정부에 정식으로 요청했습니다. (당연하지요.. 누가 독일이 유색인종을 자국내 노동력으로 취업시킬 것이라고 생각할수 있었겠음? 아직, 인종차별이 횡횡하던 시절였는데..(당시 미국은 주법으로 백인과 유색인종간 결혼이 불법))
한국 정부는 독일 정부와 1966년 특별고용계약을 맺고, 간호사 3천명, 탄광 광부 3천명을 파견합니다.
고용 계약의 주된 항목은 3년을 일하면, 한국에 복귀, 다시는 독일에 파견할수 없음. 3년마다 새로운 한국인으로 교체 투입하는 조건 였습니다.
독일은 외국인 노동자가 자국내에 정착,정주 하는 것을 경계했고, 그 조건을 주변 가난한 유럽국가는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 조건을 들어줄 한국을 선택한 것이기도 합니다.(그리고 불체시 잡아내기 편한 눈에 띄는 유색인종) (같은 백인종이면, 잡아내기가 아무래도 곤란하죠.. 독일도 꽤나 머리를 굴린 것이죠)
이 3년 주기로 교체 방법은 전적으로 독일 정부의 재량으로 어떤 시기는 3년 교체로 한국에 복귀하는 한국인 인력이 교체되어 독일에 들어가는 새로운 한국인 노동력의 배를 넘기도 했습니다. (취업 인원은 3년마다 독일 정부 마음대로)
1977년 독일은 경제 호황이 식자, 더 이상의 외국인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한국인 노동자의 독일 취업도 끝이 납니다.
독일 파견 한국인 노동자들은 휴일이 되어서, 독일 시내로 나가려면, 전부 목욕을 깨끗히 하고, 양복을 입고 나갔습니다.
독일 시민들은 전부 편한 복장이 였지만, 한국인 노동자들은 전부 양복을 입고, 독일 시내에 나와서 휴일을 즐겼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당시는 심각했어요. )
그리고, 한번은 휴일날 나간 한국인 노동자 한명이 독일 상점에서 카메라를 훔치려다가 미수에 그쳤고, 독일 경찰서에 끌려가서 벌금을 내고 나오는 사고가 터집니다.
한국인 동료들이 어떻게 했을까요?
경찰서에서 나오는 즉시, 그는 동료 한국인 노동자에게 포위되어서, 독일 프랑크프르트 다리로 끌려 갔습니다.
그를 끌고간, 한국인 노동자들의 중론은 "한국인의 명예를 더럽힌 죄를 한국과 독일에 사죄하고, 자살하라!" 였습니다.
휴일날 나온 독일 시민과 한국인 노동자들로 군집을 이룬 가운데. 그는 실제로 사죄하고 자살하려 했고, 그것을 긴급히 달려온 독일 경찰대들이 제지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독일 신문 일면을 장식 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요...하지만 당시는 심각했습니다.)
한국인 노동자들은 단 한번도 독일 정부의 외국인 노동자 정책에 반대하지 않았고, 처음의 약속대로 3년마다 한국으로 복귀 했으며, 어떤 규칙도 어기지 않았죠.
그래서, 신뢰를 얻어 11년간이나 한국인 노동자들의 고용을 유지 시킬수 있었습니다. 1977년 독일에 대한 한국인 노동자 파견이 끝을 내는 순간에도 서로 좋게 끝났고,
독일은 이런 한국인들을 높이 평가해 주어서, 그후 독일은 한국에 막대한 자본을 투자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IMF 당시, 다른 외국은 모두 한국에 투자한 자본을 회수했지만, 독일만이 당시 한국에 더 투자를 합니다.)
이런 한국인 노동자 파견 사례는
그후에도 중동 건설붐에도 다른 국가의 노동자들을 제치고, 한국인 노동자가 먼저 유입되는 발판이 되었죠.
중동에서도 한국인 노동자들은 중동 국가들이 요구하는 규칙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건설이 끝난 즉시, 모두 한국에 복귀하고 정주하지 않았지요. (그래서 이슬람 형제를 부르짖는 중동국가 조차, 이슬람 형제국인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파키스탄등등을 제치고 한국인 노동자를 먼저 썻습니다.)
그것이 1966년 1인당 1년 수입액수 79$ 짜리의 가난뱅이들이 필리핀 170$,태국260$,베트남 240$....의 경쟁자들을 떼어 놓고 발전한 이유죠.
당시 독일 일화중에 한가지는
68혁명이 유럽 사회를 휩쓸었을때..
독일인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한국인 노동자들에게 접근해서,처우 보상,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데모를 하라고 충동질 했죠..
한국인 노동자들은 거절했습니다.
한국인 노동자들이라고 왜? 불만이 없었을까요? 그것이 어떤 독배(독이 들어간 술)인지 알았기 때문에 마시지 않았고,
그 순간의 결정 덕분에 다른 가난한 유럽인 노동자들이 독일에서 나간 후에도 한참 독일에 남아서 노동자로 일할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