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박 4일 일정으로 내한한 할리우드 스타 러셀 크로우. 자신의 감독 데뷔작 <워터 디바이너>의 홍보차 많은 일정을 성실하게 소화했다. 그 중엔 물론 방송 인터뷰도 포함돼 있었다. 출국일이던 20일 저녁 JTBC <뉴스룸>에 녹화분으로 러셀 크로우는 한국의 시청자들과 만났다.
"한국(축구팀)은 최고의 강적이죠. 한국과 호주가 만났을 때 호주는 잘 싸우지 못하는 것 같아요. 한국팀의 경기력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죠. 그래야 다음 경기에서 만났을 때 또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요?"
▲JTBC <뉴스룸>에 출연한 러셀 크로우.
ⓒ JTBC
한국에 오기 전 러셀 크로우가 올린 트위터 글에 관한 첫 질문을 제외하고, 앵커 손석희의 한국과 관련한 질문은 "호주 럭비팀의 구단주이기도 하고 FC 바르셀로나의 열혈팬으로도 알려져 있다. 한국 축구팀에 대해도 알고 있나요?"가 전부였다.
이어 자연스레 한국 축구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김치 좋아하세요?"나 "싸이를 알고 있나요?"와 같은 촌스럽고 직접적인 질문 없이도, 러셀 크로우가 호주 출신이란 사실을 활용해 자연스레 한국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 낸 것이다. 손석희의 질문 몇 개를 더 살펴보자.
"<워터 디바이너>는 당신의 첫 연출작인데 어떤 동기로 하게 됐나." "여전히 사람들은 당신의 강한 남성미를 보고 싶어 한다." "<레미제라블> 속 당신의 노래 실력이 좀 더 좋았더라면… 이런 아쉬움을 나타낸 관객들도 있다. 화내지는 말아 달라." "사회 이슈를 다루는 영화를 좋아하는 편인가."
그렇다. 좋은 질문이 가야 좋은 답이 돌아오는 법이다. 인터뷰의 절대 법칙 중 하나다. 인터뷰어의 역할이 중요한 건 그래서다. <뉴스룸>의 손석희가 그랬다. 영어로 진행된 이 인터뷰에서 러셀 크로우는 <뉴스룸>이나 손석희의 한국 내에서의 위치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의견과 견해를 진중하게 피력했다. 허나, 내한한 모든 외국 배우들이 이런 인터뷰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 주말 방송된 KBS <연예가중계>를 보면 알 수 있다.
키아누 리브스 웃기기 위해 온 인터뷰어 김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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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연예가 중계>에 출연한 키아누 리브스
ⓒ KBS
지난 17일 방영된 <연예가중계>는 영화 <존윅> 홍보차 내한했던 키아누 리브스를 인터뷰했다. 인터뷰어는 난데없는 개그맨 김영철. <연예가중계>의 고정 리포터도 아닌 그는 대놓고 "당신을 웃기기 위해 왔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이날 인터뷰의 핵심 키워드는 김영철의 가수 셀린 디온의 성대모사, 키아누 리브스 뱀파이어설, 방송인 신동엽과의 외모 비교, 그리고 김영철의 '특급칭찬'이 전부였다. 어쩌면 키아누 리브스의 대답보다 질문이 우선이고 분량마저 대등한 이 인터뷰는 왜, 무얼 위해서 한 것일까.
김영철이 성대모사를 하는 동안 키아누 리브스의 황당한 표정은 둘째 치고서라도,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배우에게 굳이 외모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도 모자라, 누군지도 모를 한국 방송인과 직접 비교하는 패기는 어디서 연원한 것일까.
백미는 물론 김영철이 키아누 리브스의 볼을 꼬집는 행위였다. 자신의 유행어인 '특급칭찬'을 거론하기 위해 우리 나이로 52세인 이 외국 배우의 볼에 손을 가져다대는 건 화면 그대로 코미디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 장면을 보고 유쾌할 이가 과연 누가 있었을까. 만약, 중국과 같은 국가에 영화 홍보차 들른 송강호나 김윤석에게 외국인 리포터가 다짜고짜 저런 무례를 범한다면 한국의 네티즌들이 들썩이지 않겠는가.
답변 들을 줄 아는 <뉴스룸> 인터뷰어 손석희
▲러셀 크로가 출연한 JTBC <뉴스룸>의 한 장면.
ⓒ JTBC
사실 한국 예능 프로그램이 내한 스타와의 인터뷰에서 주객이 전도된 편집으로 일관하는 것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대체로 짧은 내한기간 탓에 인터뷰 시간이 길지 않고 여건이 녹록치 않다는 것을 이해 못하는 바 아니다. 영화의 과도한 홍보가 시청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는 점도 충분히 감안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연예정보 프로그램을 비롯해 예능에서 내한한 배우들이나 스타들을 활용하는 방식은 도를 넘어서고 있다. 진지함이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예능의 성격을 잠시도 잃으면 안 된다는 강박 때문에, 녹화시간이나 촬영 여건이 여의치 않다는 변명이 이러한 무례나 어이없는 편집의 방패가 되어줄 순 없다. 김영철의 '특급칭찬'이 그 정점을 보여준 셈이다(<연예가 중계>의 인터뷰 편집은 5분 여, <뉴스룸>은 11분 여를 배정했다).
다시 <뉴스룸>으로 돌아가 보자. 지난 9월 방송시간을 확대한 <뉴스룸>엔 그간 많은 배우와 감독들이 출연했다. 최근 개봉한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의 김혜자나 엄용훈 제작자를 비롯해 <상의원>의 한석규나 <카트>의 염정아, <제보자>의 임순례 감독 등이 손석희 앵커의 날카로운 질문에 응수해야 했다. 지난 11월엔 제임슨 므라즈나 호세 카레라스와 같은 음악인들도 스튜디오를 찾았다.
사석에서 만난 한 영화감독은 <뉴스룸> 출연했던 경험에 관해 "손석희 앵커의 아우라는 분명 절대적인 부분이 있고 자기 위주로 분위기를 이끄는 데 달인이더라. 분명 유하게 대하는데도 그랬다. 그래도 <뉴스룸>의 인터뷰는 소중한 기억이다"라고 귀띔하기도 했다. 여느 연예프로그램과 달리 질문을 하고 출연자의 답변을 '들을' 줄 아는 방송이라는 거다.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인의 특징에 대해 '우리'나 '한국'을 너무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두 유 노우 김치"나 "두 유 노우 강남스타일" 등은 이러한 경향을 자조적으로 반영한 농담이기도 하다. 여전히 많은 기자들이 내한 스타의 기자회견장에서 한국 관련 질문을 하고 그걸 기사의 헤드라인으로 뽑곤 한다.
외국인이 보는 한국, 외국에 비춰지는 한국, 한국인이 여전히 중요해서다. 예능 프로그램이 외국 배우나 스타들을 인터뷰하는 방식도 다를 것 없다. 그들이 우리를 얼마나 아느냐가 뭘 그리 중요한가. 혹은 왜 듣지 않고 우리에게 친숙한 것만 묻고 답을 끌어내려고 하는가. 예능을 뭘 그리 심각하게 보느냐고?
그 예능 프로그램에도 평소 한국인들의 국수주의나 자국중심주의가 깔려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50대 외국배우의 볼을 만지는 인터뷰어를 다시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외국 인터뷰이들은 과연 손석희와 김영철, 둘 중 누구를 선호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