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혐오사진 有)2차 대전 기간 동안의 세르비아인 학살
게시물ID : history_2781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역둔토
추천 : 10
조회수 : 1806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7/04/05 14:19:25


1941~1945년 사이에 세르비아인 학살은 크게 나누어 2지역에 각각 이루어졌다.

하나는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에 대한 야합으로 세워진 우스타샤 정권 치하의 크로아티아 독립국,

다른 하나는 나치 독일의 군정 치하에 들어간 세르비아 영토에서 세르비아인에 대한 학살, 가혹한 탄압이

이루어졌다. 후자가 주로 경제적 착취와 강제수용소 노동에 의존하였다면, 전자는 광범위하며

조직적인 학살을 자행했다.


Ndh_1941.png


1941년 크로아티아 독립국,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하여 인구의 약 30~35%가 세르비아인이었다.


크로아티아 독립국에서는 크로아티아인이 약 310만명,  세르비아인은 약 185만명이었다. 크로아티아인들은

새로 구성된 크로아티아 독립국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국가 안에, 세르비아인이 너무 많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크로아티아인들의 경계심을 높이던 점은 새로 구성된 크로아티아의 많은 지역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민족이거나 두번 째로 많은 민족이었다는 점이다. 크로아티아에 합병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지역에서 세르비아인들은 45%로 가장 많은 민족단위였으며 크로아티아의 일부인

크로아티아-크라이나 지방에서는 크로아티아인에 이은 2번쨰로 많은 민족이었다.


Croatia-Serbs-2011.PNG

파란색이 진한 부분 중심으로, 크라이나-세르비아 지역


Serbian_language_in_municipalities_in_Croatia.jpg
유고슬라비아 내전 이후, 많은 세르비아인들이 크로아티아에서 추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크라이나 지역의

일부는 여전히 세르비아인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초록색이 여전히 세르비아어를 주요 언어로 사용하는 지역


200px-Srem_in_Serbia.svg.png
 스렘지방


5678.png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일부가 된 스렘지방,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크라이나 지역의 일부 이외에도 스렘지역에서도 세르비아인은 50%를 훌쩍 넘는

가장 많은 민족이었다.


300px-Ante_Pavelić.jpg  파벨리치, 전범, 학살자


Ustaše_symbol.svg.png 우스타샤, 크로아티아 극우조직, 적극적으로 전쟁 범죄에 가담


세르비아인 문제에 봉착한 우스타샤의 안톤 파벨리치에게 히틀러가  세르비아인 문제 해결을 위해

독일이 지금 폴란드와 독일 내부에서 자행하고 있는 것들을 모방하라고 충고했다.

두 인간 백정은 이 모임에서 순혈국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파벨리치와 우스타샤는 학살을 결심했다.


크로아티아 순혈국가, 순수한 가톨릭 국가를 건설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자 저항세력인

세르비아인을 굴복시키고 '청소'하기 위해 국내에서 협력자를 구했다. 파벨리치와 우스타샤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안정, 세르비아인에 대한 효과적인 학살을 위해 무슬림들과 협력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보스니아 무슬림들이 비록 종교는 다르지만  '순수한 크로아티아인으로 순혈 크로아티아인들

중 하나'라고 선언했다. 일부 무슬림들은 오랫동안 같이 살아온 세르비아 이웃에 대한 증오 선동,

배척 등을 거부하였지만 많은 무슬림들은 크로아티아인들과 손을 잡고 우스타샤 정권에 협조하고

세르비아인 학살에 나섰다. 무슬림 중 일부는 후에 크로아티아아인들과 같이

나치 독일의 <SS 한자르 사단>에 가입해  크로아티아를 넘어 발칸 전역에서 벌어질 전쟁범죄에 한 몫을 담당했다.


세르비아인에 대한 조직적 학살과 추방, 학대를 준비하며 크로아티아 정부가 취한 첫번 째 조치는

강제개종 법령이었다. 정교를 믿는 세르비아인들을 강제로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법률은 앞으로

진행될 세르비아인 학살에 가톨릭 교회와 성직자들이 협력하게 하는 출발점이었다.


이어 크로아티아 전역에 임시 재판소가 설치되어 세르비아인을 겨냥한 국가 보안법이 선포되었다.

이 보안법에 따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비롯한 크로아티아 지역에 살던 세르비아인들은 증거와 증인,

적법한 재판 절차 없이 구금, 총살될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초기에 피해를 많이 입은 것은 세르비아인

중산층과 유대인인데, 크로아티아 하층민들이 세르비아 중산층과 유대인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 허위로

그들을 임시 재판소에 고발하면, 그들은 속전속결로 반역죄를 선고받아 총살에 처해졌고

그들의 재산은 신고한 자에게 돌아갔다.


임시재판소로 부족했던 크로아티아 정부는 크로아티아에 사는 세르비아인의 사법절차를 일반 재판소에서

군사재판소로 변경하였다.


1941년 이러한 조치들이 연달아 성공적으로 취해지자, 파벨리치는 크로아티아인들에게

세르비아인들을 괴롭히고 살해할 것을 부추겼다. 이어 1941년 가을, 우스타샤 대집회에서 매우 나치 독일적인

세르비아 문제 해결방안이 선언되었다.


<세르비아인 1/3은 죽이고, 1/3은 추방하고 1/3은 동화시킬 것이다.>


이후 우스타샤는 세르비아인들을 차별하기 위한 여러 조치를 취하였다.

세르비아어를 표기하는 키릴문자의 사용을 금지하고, 세르비아 정교 명칭 대신 그리스 정교라는 명칭을

부여하였으며 세르비아인들의 야간통행을 금지하고 나치독일과 크로아티아에서 유대인들이 노란 별을 달았던

것처럼 세르비아인들은 파란글자의 P(정교도)를 달고 다녀야 했다.


Ustaše_militia_execute_prisoners_near_the_Jasenovac_concentration_camp.jpg


내부방침이 정해지고 세르비아인에대한 구별이 생기자 본격적인 학살이 시작되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559명의 노인, 여자, 어린이가 집단 학살된 것이 시작이었다. 그들은 영문도 모른채 집에서 끌려나와

살해당하고 미리 우스타샤가 파논 구덩이에 한데 파묻혔다.


41년 후반기에만 약 8만 여명의 학살이 우스타샤 주도로, 나치 독일의 지원 아래 행해졌다. 

조직적인 학살 이외에도 세르비아인들을 말려죽이고 동화시키기 위한 수용소가 1941년 곳곳에 세워졌다.


수용소 밖에서 벌어진 학살 이외에도 우스타샤는 1941년 동안, 수용소에서만 35,000명을 학살했다.

우스타샤는 세르비아인을 학살한 것 뿐 만 아니라 크로아티아 일대에 사는 유대인들을 매우 자발적이며

협조적으로 나치 독일에 넘겨 주었다. 1941년 한 해에만 약 7,000여명의 유대인이, 45년까지 수만 명이

나치 독일의 수용소로 이감되었고 대부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Children_in_Sisak_concentration_camp.jpg

수용소에는 크로아티아 각지에서 잡혀 온 세르비아 어린이들도 무차별적으로수용되었다.

이들은 굶주림과 학대, 질병으로 죽었다. 3천 여명의 어린이들을 수용하던 크로아티아의 한 수용소에서는

수용자의 절반 가량이 굶주림으로 나머지는 학대와 질병으로 사망했다.


Serb_family_killed_in_their_home,_1941.jpg
집에서 살해된 세르비아 가족


Ustaše_sawing_off_the_head_of_a_Serb_civilian.jpg 우스타샤의 만행


1941~1942년간 우스타샤는 약 30만명에서 40만명( 추산에 따라 70만명까지도)에 달하는 세르비아인을 학살했다.

이 학살은 수용소에서 벌어진 것 뿐 만아니라 우스타샤와 독일군의 협력으로 민간인들을 마치 사냥하는

습격한 것들도 포함된다. 또한 크로아티아 각지에서 사로잡힌 세르비아 민간인들은 수용소로 이동하는 도중

'행방불명' 되었는데, 대부분은 이송도중의 고문과 학대로 사망했거나 비밀처형으로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우스타샤는 민간인을 상대로 만행을 자행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세르비아 민족을 파괴하기 위해 세르비아 민족

정신의 구심점인 세르비아 정교를 완전히 말살하고자 하였다.


NDH_-_salute.jpg

우스타샤에 협조한 크로아티아 가톨릭 교회


우스타샤는 세르비아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세르비아 정교를 이끄는 정교회 대주교들을 잔혹하게 살해하거나

추방했다. 주교들을 공격한 것 뿐 아니라 가톨릭 교회의 협조 아래 우스타샤는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정교회 교회를 파괴했다. 가장 심했던 지역에서 189개의 정교회 교회 중 45년까지 파괴 당하지 않은 교회가 단지

14개소 뿐이었을 정도였다. 세르비아인의 구심점인 정교를 약화시키기 위한 성직자 살해, 교회 파괴는

우스타샤가 세르비아인 학살과 더불어 가장 중점적으로 시행했던 것으로 세르비아 정교 유산이 상당수

파괴되었음은 물론이거니와 정교 교회의 자선에 의존하고 있던 세르비아 피난민, 빈민층의 아사에

간접적 영향을 끼쳤다.


Glina_church_massacre.jpg
세르비아인들이 강제 개종을 위해 가톨릭 교회에 모인 모습,


우스타샤와 크로아티아 가톨릭교회는 정교 성직자 살해, 교회 파괴 뿐 아니라 기초에서부터 세르비아인의

정교신앙과 민족정신을 파괴하기 위해 강제 개종과 유아납치를 광범위하게 자행했다. 세르비아 민간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종교를 바꿔야 했다. 또한 여러가지 이유로 고아가 된 세르비아 어린이들을 강제로

크로아티아 가톨릭 교회 소속의 고아원, 혹은 크로아티아 가정으로 보내 개종과 동시에

그들을 동화하고자 하였다.


살해와 동화작업이 진행되면서 그들이 목표로 했던 나머지 1/3을 위한 해결방안도 시행되었다.

죽일만한 필요도 동화할 만한 가치도 없다고 생각된 세르비아인들은 조상의 땅에서 쫒겨났다.

토지, 건물, 가구 등 소유하고 있는 재산 일체를 몰수당한 채로 20만 여명의 세르비아인들이

추방당했다. 그들은주로 크로아티아와 마찬가지로 가혹한 착취와 학대가 자행되고 있는 독일군정 하의

세르비아로 추방되었다. 입고있던 옷과 몇 가지 물건만을 들고 쫒겨난 세르비아 민간인들은

1942년 겨울, 1943년 겨울 많은 수가 굶어죽거나 얼어죽었다.


1941년부터 1945년간 크로아티아 독립국에서 자행된 학살은 주로 1941~43년에 집중되었다.

이시기 최소한 50 만명, 최대 75 만명의 세르비아인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발칸반도에서 크로아티아인들은 가장 대규모로 조직화된 학살을 자행했다.


세르비아인들은 1945년,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수십년 동안 우스타샤와 크로아티아인들과

그들에 협조한 보스니아 무슬림들이 자행한 만행을 잊지못했다.  보스니아 내전에서 크로아티아인과 보니아

무슬림을 상대로 세르비아인들이 격렬하게 저항하고 조직적으로 단결한 것은 그들을 향한

짧은 프로파간다 때문이었다.


"우스타샤가 돌아왔다"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