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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수집-301] <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
게시물ID : readers_2790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문장수집가
추천 : 1
조회수 : 25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03/06 17:5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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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국가에 저항하지 않을 때만 '국민'이다. (214)


2) 열등감과 욕망은 언제나 하나의 뿌리를 가진다. (199)

 

3) 사람이 비상식적인 행위를 할 때는 다 그럴 이유가 있다. (230)

 

4) 행복은 결코 개인적인 결단으로만 가능한 문제는 아니다. (238)

 

5) 문화는 지배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저항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11)

 

6) 어떤 것을 화면에 담는 행위는 반드시 다른 어떤 것을 담지 않을 때만 가능하다. (93~94)

 

7) 중요한 것은 징후를 읽어내고 그 과정을 통해 본질을 성찰해서 보편성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124)

 

8) 값싼 희망이 아니라 철저한 절망이 절실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개 실재를 대면하기를 두려워한다. (28~29)

 

9) 폭동과 반란은 기존의 질서가 보장하지 않던 것을 요청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현실의 결핍이 무엇인지를 혼란 속에서 가장 극명히 드러낸다

   (141)

 

10) 현실을 지배하는 우파의 신화를 완전히 깨버리고 새로운 신화를 만들 상상력이 없을 때 

     좌파는 영원히 자신의 세상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다. (165)

 

11) ‘민족’, ‘국민’, ‘국가는 사실 근대 이후의 발명품이고 실체가 모호한 상상의 공동체에 가깝지만

     그것은 역사화 과정을 통해서 과거부터 언제나 있어온 실체가 된다. (183)

 

12) 타인의 존엄성을 해치는 폭력을 저지르면서도 성찰할 줄 모른 채 

    그저 관습적으로, 재미로, 심심하니까, 본능이니까 한다면 그게 바로 가장 무서운 악의 얼굴이다. (253)

 

13) 자잘하고 변태적일수록 더 크게 보이는 게 폭력의 한 속성이다

    미군이 이라크에 폭탄을 퍼부어 민간인 수천 명이 죽는 것보다는 

    우리 동네에 살던 한 사람이 칼에 난자당한 채 발견되는 게 더 무섭고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이다. (132)

 

14) ‘유학파는 국내파보다 수준이 높을 것이라는 이 판타지는 교수 사회에서 가장 맹위를 떨치고 있는 가설이다.

     이 가설은 증명이 거의 불가능하지만 오랫동안 상식이 되어 한국의 국내파 박사들을 비정규직 자리에 묶어두고 있다. (117)

 

15) ‘자기관리라는 말은 마치 개인이 자신의 운명을 통제하는 절대적 자유를 가진 것 같은 뉘앙스를 담고 있다

    그러나 자기관리에 대한 강박은 또 다른 억압이고 통제다

    자기관리라는 말이 가리고 있는 우리 삶의 진정한 관리자는 자본이다. (50)

 

16) 내쳐지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극단적인 공포와 두려움을 일상으로 여기며 산다

    공포와 두려움이야말로 권력이 손대지 않고도 사람들을 통제하는 핵심적 수단이다

    각자가 각자를 통제하면서 움직이는 사회 전체, 이 끔찍한 체제에 균열을 내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 (145)

 

17) ‘자기관리의 시대에는 관리, 자원, 투자, 경영 등의 단어가 일반화된다

    자기를 관리하는 것이 신성불가침의 성공법칙이 되는 현상은 사회적 연대에 관한 개념 자체를 폐기한다

    성공과 실패가 자기관리에 달려 있다면 실패의 책임도 개인이 지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49)


18) 서바이벌 엔터테인먼트가 지배적 대중문화 형식이 될 수 있는 이유는 한국 사회가 거대한 서바이벌 게임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서바이벌 엔터테인먼트는 경쟁을 통한 삶과 죽음이 일상화된 서바이벌 자본주의의 문화적 형식이자

    그 처절함을 감동과 낭만과 도전의 서사로 뒤바꾸는 판타지다. (37)

 

19) 진보와 보수라는 기준으로 보면 한국인은 진정 보수적이다

    누군가가 분수를 모르고 막 나간다 싶으면 진보냐 보수냐를 막론하고 일단 제지하는 태도가 그것이다

    1987년 이후의 역동적 정치 변화 속에서 한국인에게는 서구와 같은 좌우의 정치적 이념이 확고하게 들어선 것이 아니라

    변화의 속도를 제재하는 보수적 태도가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155)

 

20) 몸개그에서 나오는 빅 재미는 다른 어떤 계산된 유머보다도 강력하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원초성에는 어떤 처절함이 담겨 있다

    연예노동자들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팔아야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기 몸이다. 몸은 결국 자신들이 가진 유일한 생산수단이다

    논두렁에서 쓰러지고 물공을 헤딩하다 넘어지는 몸개그에는 몸을 유일한 생산수단으로 가진 노동자들의 처절함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77)

 

21) 개인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열등하지 않다는 점을 계속해서 증명해야만 한다

    모두 평등하고, 누구나 쾌락을 추구할 자유가 있는 체제에서 다른 사람보다 못 가지거나 못 올랐다는 것은 자신의 열등함을 보여주는 꼴이다

    이 평등의 체제에서 지배적인 감수성은 수치심이다

    자신이 남보다 못났다는 사실을 아는 것 자체가 존재를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수치심은 자신을 학대하는 것을 넘어서 특정한 이를 향한 폭력, 나아가 불특정 다수를 향한 무차별 폭력을 낳기도 한다. (24)

 

22) 왜 행복한 삶과 삶을 향한 의지가 우리의 목표인 것처럼 이야기되는 세상에서 죽음의 그림자는 오히려 더 짙어지는 것일까

    우리의 삶은 삶이 희망이라고 말하는 담론을 번성시켜서 우리를 더욱더 삶에 묶어두는 어떤 권력 장치에 포획돼 있을 공산이 크다

    우리가 열심히 살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만 생산은 지속되고 소비가 이어지며 자본은 회전하고 사회는 유지된다

    삶은 자본의 무대이고 권력의 관리 대상이다. 사람들을 삶에 묶어두되 그 삶의 진정한 의미를 묻지 않게 하는 것이야말로 권력 장치의 목표다.

    (260~261)

 

23) 살기 위해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곳은 전쟁터다

    신자유주의 글로벌 시대에 부가가치를 창출할 능력이 없거나 돈 많은 부모를 만나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삶은 사실 전쟁터와 같다

    하루하루 살아내야 하는 삶, 죽지 못해 사는 삶,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사는 삶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언제나 불안에 허덕이며 내일을 걱정해야 하는 철거민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런 철거민의 삶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이게 세상의 이치려니 하면서 산다

    그렇게 교육을 받았고 그렇게 신문에서 읽었기 때문이다

    권력자들이 교육과 언론을 자기 손 안에 두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1차원적인 오락으로 사람들을 시청자로 만들며 텔레비전에 묶어두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215~216)

 

24) 시대는 개판인데 멘토들은 다 착하다. 

    사회적 모순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희망과 창조를 말하고 자기 혁명의 기술을 전수하는 이 착한 멘토들은 

    개판이 되어버린 시대와 정면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처럼 부드럽고 조용하게, 착실하고 성실하게

    ‘착하게이 고통을 견뎌내고 승리하라고 조언하는 것이다

    이 착한 멘토들은 마치 카페인 없는 커피같은 정치의 대체제다

    멘토들은 자기관리를 통한 사회적 성공을 원하면서도 지나친 갈등과 위험부담은 피하고 싶은 사람들의 탈정치적 선택이다

    이 멘토들은 성공과 실패의 모든 원인을 개인에게 환원하는 신자유주의 시대가 절실히 요청하는 정치적 선택이기도 하다

    시스템 자체의 모순 속으로 파고들기보다는 적당한 사회적 책임과 적당한 개인적 성공을 조합하라고 조언하는 멘토들이야말로 

    시스템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가장 좋은 선택인 것이다. (326~328)

 

25) “즐겨라!” 이것은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강력한 발화다

    즐겨야 하는 시대에는 정치도 여기에 맞게 전환된다

    온몸을 불사르며 독재 타도를 외치는 데모와 투쟁의 정치는 한물 간 것이 된 지 오래다

    투사가 멘토로, 거리 시위가 토크콘서트로, 정치적 비판이 정치 엔터테인먼트로 변한 상황

    잘못된 권력을 향한 투쟁과 평등에 대한 요구로서의 정치가 부드럽고 유연하고 시끌벅적한 즐거움의 정치로 변한 상황

    지금까지 하던 방식을 바꿔서 더 즐겁게, 더 신나게, 더 부드럽게 또는 더 강하게 감성을 자극하고 웃음을 유발하고

    감동을 시키고 그래서 즐거워지면 그것이 정당하고 옳다는 사고가 이 안에 들어 있다

    그러나 언제나 우리를 들뜨게 하는 이 즐거움의 정언명령은 더욱 가혹해져가는 자본주의와 

    더욱 공고해져가는 대의제 정치라는 이 시대의 진짜 핵심을 세련되게 감춘다

    즐겨라라는 명령이 잦아질수록 삶은 더욱 공허해지며 그 공허에서 벗어나려고 우리는 다시 즐거움을 찾는다. (84, 85, 87)

출처 문강형준 지음, <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 이매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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