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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현계(顯界)] 8. 분노를 감추는 자
게시물ID : readers_2794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아카스_네팔
추천 : 2
조회수 : 25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03/11 19:06:44
The KARMA
[3부-현계(顯界)]
                                                          

아카스네팔



8. 분노를 감추는 자


"우리를 부르는 건 자네들이야. 자네들이 절대로 가져선 안 되는 것을 가졌을 때."

남자는 아무 대꾸도 없이 조용히 잔을 비웠다.

"운달, 은솔의 일탈에 대해 정녕 할 말이 없는가?"

남자의 이름은 운달이었다. 그는 들었던 소주잔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조금의 미동도, 표정엔 조금의 변화도 없었지만 그의 눈빛은 옆자리에 앉은 묻는 자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너는... 새파란 놈이...말이 참 많구나."

무심하게 던지는 말엔 아무런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지만 그의 입가엔 희미하게 미소마저 번지고 있었다.
운달은 독백처럼 말을 이어갔다

"불신을 먹고 사는 놈들. 서장옥을 기억하는가? 그의 핏덩이가 아직도 제도(濟度)를 거부하니 스스로 폭주한 것이 아니겠는가? 제도 받지 못한 영이 이승의 때가 오래 묻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을 텐데?"
"여섯 번이야. 여섯 번을 혼자 했다는 걸 믿으라는 말은 아니겠지?... 운달, 우리의 발자국엔 무게가 없다는 걸 잊지 말게. "

운달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기왕에 남자의 다음 질문에 대해서도 쐐기를 박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남자를 기다리다 미쳐버린 거겠지. 그리고 나에 대한 의심의 대가는 꼭 갚도록 하지. "

그리고 그들의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운달, 아니 운달이라 불린 남자가 무너지듯 포장마차 바닥으로 쓰러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혼자 남은 남자마저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기절해 버리자 정적 속에 주인장의 외침이 포장 밖으로 터져 나왔다.

"으아아악! 시발 뭐야!"

어디선가 어색한 인사처럼 낯선 까마귀 소리와 그 뒤를 따르는 익숙한 밤의 고양이 소리가  찬 공기 사이로 들려왔다.
                                    .
                                    .
                                    .
표 팀장 일행이 안가로 돌아온 것은 어제와 비슷한 시각이었다.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저녁을 먹고 응접실에 다시 모였을 때, 표 팀장은 변함없이 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엔 물음표가 낮보다 커져 있었다. 매사 일처리에 빈틈이 없어야 만족할 수 있었던 그였기에 오늘의 물음을 남겨두고 내일을 맞이할 순 없었다. 잠시 후 김 여사가 응접실로 나왔고, 뒤따라 며칠 새 마른 체구가 더 야윈 듯한 멍한 표정의 연옥이 어제처럼 머리를 푼 채 김 여사 옆에 앉았다. 모두들 오늘의 일정이 고단했던지 말들이 없었다. 침묵이 잠시 동안 흘렀다. 

"머리가 아파요. 속도 메스껍고."

연옥이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힘없이 내뱉었다. 

"니가 아직 은솔이 낯설어서 그래. 둘 다 힘든 하루였으니까 더 그렇겠지. 허주라도 들었다면 큰일이었을 텐데...그래도 선한 영이 깃들어서 다행이야. 빨리 제를 올려야 할 텐데."

김 여사는 연옥을 무척 아꼈다. 그녀는 지금도 습관처럼 연옥의 손을 감싸고 있었다. 

"연옥씨, 은솔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에헤이! 힘들다지 않은가?"

보호본능처럼 튀어나온 소리에 김 여사도 스스로 놀랐다. 엉겁결에 표 팀장은 그만 궁금한 걸 못 참는 아이의 표정이 되었다. 오래 표 팀장을 알아 온 김 여사는 그 표정이 직업적 본능에서 온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조금 미안해졌다.

"표선생. 모두들 많이 피곤했지 않은가? 은솔이 받은 충격도 적지 않았을 테고... 오늘은 쉬고 내일 하지 그래?"
"이미 알고 있답니다."

연옥이었다.

"원래 사람속이 그렇게 다 들여다보이는 건가...?"
"자신과 관련된 생각일 때에만. 그리고 상대가 자신에게 마음을 열었을 경우에만 보인데요."
"흐음. 이것 참..."

그렇게 이야기는 은솔에 의해 이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은솔은 연옥의 몸속에 침잠한 채 자신을 직접 드러내지 않고 옥을 통해 말하고 있었다. 그럴수록 연옥의 두통과 메스꺼움이 심해졌다. 급기야 김 여사가 오른손에 수인을 맺어 연옥의 정수리에 기를 불어 넣으면서 은솔의 영을 달래기 시작했다.

"부적 좀 가져와"

표 팀장이 군소리 없이 김 여사 가방에서 부적을 가져왔고, 김 여사가 왼손바닥에 그것을 얹어 연옥의 등을 어루만지기 시작하자 옥의 헛구역질이 가라앉았다.

"이제 괜찮아. 내가 지키고 있으니까 그만 나와서 얘기해 보거라."

잠시 후 연옥이 얕게 한숨을 내 쉰 뒤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것을 물어 보세유. 묻지 않으면 대답할 수 없으니까."

'아...상대방 생각과 관련된 것은 질문을 해야만 말할 수 있군. 그건 다행인데.' 

표 팀장은 머릿속에 만들어 놓은 은솔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먼저 차 한 모금을 마셨다.

"은솔씨, 당신은 알고 있어. 지용이 정상적인 영혼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을 그렇죠?"
"예..."
"그건 여기 있는 김 여사님도 저도 이젠 알고 있죠. 같은 공간에서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죽어야 한다는 것...그런데 한 공간에서 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아마도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즉...희생해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죽어야 한다...맞죠?"
"예..."
"그런데 오늘 병원에서 당신은 지은이 그 사실을 알아 차렸을 때...아마도 김 여사의 생각을 지용이 들여다 보았고 그것을 지은의 주인령이 알게 된 거겠죠..."
"에휴..."

김 여사가 자책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은솔, 당신은 소리쳤어요. 더 이상은 안 된다고...더 이상 사람들에게 고통을 줘선 안 된다고...당신이 더 기다린다고 그랬죠?"
"예..."
"지은이 만약 희생을 각오한 상태였다면 어쩌면 온전한 지용을 만날 기회를 만들 수도 있었는데 왜 그렇게 말했던 거죠?"
"내 욕심을 위해서 사람들을 더 이상 죽일 수는 없어유!"

표 팀장의 얼굴에 예의 온화한 미소가 다시 돌아왔다. 

"그래서 궁금한 겁니다. 당신은 사람을 죽일 만큼 나쁜 영이 아니에요. 여섯 번의 연쇄 살인 사건에 대해 우리에게 말하지 않은 무언가가 있는 거죠?"
"....."

표 팀장이 하고 싶었던 물음을 던지자 은솔은 예정된 대답처럼 침묵을 지켰다. 조용한 시간이 잠시 지나갔고, 아무도 그 침묵을 방해하지 않았다.

"사계(死界)의 법을 어기면 벌을 받게 되유."
"사건 해결에 있어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고...내가 그럴 수 있다면 당신에게 벌을 줄 존재 앞에서 당신을 변호하고 싶습니다."
"선생님은 말을 참 잘하는 군요. 하지만 당치도 않아유. 그건 그분께서 결정하시는 거지 당신 따위가 나설 일이 아니니까."

은솔의 목소리가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연옥의 두 눈이 표 팀장을 똑바로 향했고, 그의 눈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곧 그녀는 원래의 평온함을 되찾았고 표 팀장을 향했던 시선을 거두고 말을 이어갔다. 

"모든 영은 육신을 벗어나면 사자가 나타나유. 무언가에 끌리는 것처럼. 그리고 묻죠. 너의 이름이 뭐냐고. 혼미한 영들은 그 물음에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하게 되죠. 아버지는 그걸 알고 계셨어유.....죽어서도 이승에 떠돌게 되면 점점 영이 더러워져서 결국엔 악귀가 되지만...아버지는 그것마저 벗어날 수 있게 해주셨어유."
"부적의 힘으로...?"
"예..." 
"그럼 떠도는 혼령들은 모두 이름을 말하지 않은 영인가?"
"예...하지만 사자들은 포기하지 않아요. 결국 떠돌던 영들도 거두어들이죠...저는 아버지 덕분에 그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어유..하지만 그들은 항상 제 주변을 돌아다녔죠. 그러다가...시간이 많이 흘렀는데....그들이...아니 운달이 어느 날 나를 찾아왔어유.."
"그 칠곡IC 사건에서 연옥을 끌고 갔던 그...운달?"
"예..."
"그래서 운달이 당신에게 다가와서 어떻게 했나요?"
"분노를... 넣었어요..."
"분노?..."

분노...?
표 팀장도 김 여사도 따라 되뇌었다. 지금껏 알고 있었던 어떠한 지식과 경험으로도 짐작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지금 은솔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충청도 사투리가 약간 섞인 은솔의 목소리는 더 이상 감출 게 없다는 듯 자연스러웠고 담담했다.
 
"사자(使者)들은 심부름하는 자들이지만 죽은 자의 영을 이끌어야 하기 때문에 권한이 주어지죠. 영을 제압해야 하니까유. 그들은 다시 심부름꾼으로 까마귀를 부리면서 언제 어느 곳이나 갈 수 있죠. 하지만 그들에겐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어요."
"그게....혹시..분노...?"
"그렇죠. 그들이 가져선 안 되는 감정. 분노는 그들에게 허용되지 않아요. 그래야 질서가 유지되니까요."
"만약 그들이 분노를 품게 되면 어떻게 되죠?"
"그 즉시 발각이 되요. 고양이들에 의해서..."
"참..."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이야기들. 
재미있게 꾸며낸 이야기처럼 황당한 말들의 잔치였지만, 어차피 지금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그러했으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김 여사도 처음 듣는 이야기들이 많은 듯 표 팀장과 은솔의 대화에 완전 몰입하여 듣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운달이 나를 찾아와서..."
"당신에게 분노를 넣었군요. 자신의 분노를. 들키지 않으려고."
"그...이후로 나는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없었어요. 운달이 찾아 올 때마다 나는 주체할 수 없었죠....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나면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 있었어요..."
"연쇄살인사건이... 그래서 일어나게 되었던 거로군요. 그리고 지난 칠곡 사건 이후로 일주일이 지났지만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도..."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연쇄살인사건의 비밀이 풀렸지만 표 팀장의 얼굴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결과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지만 원인은 아직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불씨가 살아 있는 이상 언제 다시 누구로 인해 터질지 모르는 위기 상황, 현 상황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 망할 새끼들은 왜 그 지랄을 했을까?"


김 여사가 흥분을 하며 끼어 들었다. 의식을 치르는 중도 아닌데 김여사 입에서 이 정도 험한 말이 나온 것은 정말 화가 났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표 팀장의 목소리는 의외로 조용하고 차분했다. 

"운달은 왜 당신에게 접근했을까요?"
"그들은 분명 무서운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요."
"그래서 저희들에게 그렇게 말했던 거군요. 그들이 꾸미는 일들을 막아야 한다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부적이에요."
"부적. 역시... 부적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말 해봐요. 부적은 정확히 어디에 쓰는 거죠?"
"아버지께서 그러셨어유. 위기에서 딱 한 번 쓰여져야 한다고."
"그리고 지금 그들은 걸림돌을 없애 버리려고 하는 군요."

또 다시 정적이 흘렀다. 모두들 나름대로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방면에 베테랑인 표 팀장에게 그 일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침묵을 깨고 내뱉은 말은 생각보다 더 심각한 것이었다. 

"큰일 났네..."
"큰일이야 났지..."

김 여사가 한심하다는 듯이 표 팀장을 바라보았다. 표 팀장은 진짜 큰일 난 표정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어젯밤 병원에 나타난 까마귀. 그들은 아마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표 팀장은 갑자기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다.

"그래서 지은이한테 고양이를 맡긴 거 아니었나?"

김 여사가 거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놓고도 그녀 또한 찜찜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방법이야 얼마든지 찾을 수 있겠죠.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표 팀장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둘 중 한 사람이 위험하다는 겁니다. 지은 씨와 천지. 그들도 지용을 통해서 부적을 찾으려 할 테니까. 어쩌면 그들은 우리가 알아서 멍석을 깔아놓기만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럼 이제 어떡해야 하나?"

사건을 해석해내는 표 팀장의 실력에 혀를 내두르면서 김 여사가 물었다. 표 팀장은 아무래도 담배 한 대를 피워야 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막아야지요. 둘이 만나는 것을."

소파에 연옥과 김 여사를 남겨둔 채 현관 밖으로 나온 표 팀장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가 전화를 건 곳은 서울이었다.

"경계에 더욱 신경 쓰고...감청 과정에서 조금의 이상이라도 있으면 즉시 보고해. 알겠나?"

이제 담배 한 대 후에 본사에 또 전화를 해야 한다. 아무래도 병원에서 천지로 가는 전화를 막아놔야 할 것 같다.
담배 연기가 허공에 흩어져 갔다. 
무엇인가 큰 것이 오고 있는 느낌이었다.

<계속>
출처 https://blog.munpia.com/akash_nepal/novel/77513/page/1/neSrl/1192363
[외전] 1부 - ROOM 읽으러 가기 http://www.todayhumor.co.kr/board/list.php?kind=search&table=panic&search_table_name=panic&keyfield=subject&keyword=ROOM&Submit=%EA%B2%80%EC%8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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