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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아웃4/스압] '팀 왈도'의 번역 시스템, 그리고 집단지성
게시물ID : gametalk_27988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eEtranger
추천 : 15
조회수 : 2223회
댓글수 : 14개
등록시간 : 2015/11/10 20:2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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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트 찍으려고 번역하는 변태집단, '팀 왈도'의 가을 출타 4(Fallout 4) 번역이 정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디씨 특유의 실사구시 문화와 '일해라 핫산'등의 디씨발 드립이 군데군데 버무려진 번역 페이지가 인상적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질이 높으면서도 빠른 번역을 위해 집단지성을 이용한 크라우드 방식(혹은, 클라우드 방식)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 큰 감명을 받았기에 이 글에선 이에 대해 얘기해볼까 합니다. 


지금까지 여타 게임들의 비공식 한국어 번역 방식은 마치 조모임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습니다. 전체를 n등분으로 쪼개고, n명이 맡은 분량을 각자 번역한 뒤 하나로 합치고, 최종 검수를 진행하는 방식이었죠.  특히 번역의 높은 질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이 검수 과정이 굉장히 중요한데, 가장 큰 이유로 한국어에는 타 언어엔 없는 '존댓말'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검수를 거치지 않으면 직전에 반말을 했던 상대가 바로 다음 문장에서 존댓말로 말하는 등, 여러 어색한 장면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특히나 폴아웃과 같이 npc와의 다양한 상호 작용을 제공하는 게임은 주인공의 행보와 대화 선택지에 따라 주인공을 대하는 태도가 급변하는 경우가 많고, 이를 적절하게 표현해주는 것은 게임의 몰입도에 직결되기에 최종 검수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외에도 최종 검수가 중요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 오탈자를 방지할 수 있고, 용어의 통일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Elijah, 어떻게 읽으시겠어요?
* 문맥에 따라 같은 문장이라도 유머나 비꼼 등의 다양한 언어적 표현으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behind the bar' 같은 경우 '바 뒤에서'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만 '감옥에 갇히다'라는 숙어로도 사용됩니다.
* 캐릭터의 특징적 말투나 집착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어떤 캐릭터는 비유를 꼭 폭탄으로 한다든지, 어떤 사람은 미친 소리를 하는 캐릭터로 설정되어 있다든지.
* 문장의 겉보기 뜻뿐 아니라 주변 상황과 대화 시점에 따라 달라지는 '언어적 은유'와 '숨은뜻'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shot은 의사가 쓰면 '주사'이지만 총잡이가 쓰면 '총알'이 되죠.
* 대화에 숨은 복선이나 암시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또한 대화 중에 드러나는 감정이나 대화의 주제에 대한 좋고 나쁜 감정, 뉘앙스 등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 무엇보다 '게임'이라는 가상의 상황이기 때문에 어떤 개 같은(...) 상황이라도 일어날 수 있으므로, 상황과 작품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되지 않은 번역은 질적 하락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 선생님 완전 호랑이야 호랑이'를 현실에선 '정말 무서운 선생님'정도로 에둘러 이해하지만, 게임이라면 선생님이 진짜 호랑이일 수도 있다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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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수를 거치지 않으면 대화의 주체와 객체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최종 검수는 산산이 파편화된 번역의 조각을 모아 하나의 완성본으로 승화시키는 굉장히 중요한 과정입니다. 이 검수를 하지 않아서 벌어진 재앙이 뉴 베가스 비공식 한글판의 절망적인 번역 수준입니다. 번역이 100% 이루어졌지만 본편의 검수가 63%밖에 진행되지 않아 용어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번역 수준 또한 엉망진창입니다. 문 안과 문 밖에서 나타나는 '같은' 지명의 이름이 서로 다르고, 같은 퍽이라도 퍽을 찍을 때와 핍보이에서 확인할 때의 명칭이 제각각이죠. 

하지만 이 검수 과정은 번역을 처음부터 하는 것과 다름없을 정도로 많은 시간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번역을 빨리 끝내려면? 번역에 참여하는 n명을 늘리면 됩니다. 당연하지요. 하지만 번역에 참여한 n명이 많을수록 검수에 들어가는 시간은 길어집니다. 번역의 파편화 정도는 n제곱에 비례하거든요. 번역의 높은 질과 빠른 속도는 어찌 보면 동시에 달성하기 힘든 상충관계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팀 왈도의 이번 번역 시스템은 '집단 지성'을 활용한 실시간 공동번역으로 이 달성하기 힘든 두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시스템은 쉽게 말해 '만인의 만인에 대한 오지랖'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그 세부 프로세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번역 사이트 대장이 모든 영문 대사 스크립트를 긁어 짧은글, 긴글로 분류해서 팀 왈도 번역 사이트에 올립니다. 팀 왈도 페이지 내에는 사전이 제공되며, 게임에서 사용하는 특정 용어를 묶어 설명한 단어장도 존재합니다.

2) 이렇게 분류되어 올라온 영어 원문을 번역 참여자가 자유롭게 번역합니다.

3) 번역한 글은 바로 '제출'하거나, 번역의 질에 자신이 없을 경우 '제안' 상태로 보류할 수 있습니다. 제출된 번역은 권한이 있는 운영진의 판단에 따라 정식 번역으로 채택됩니다.

4) 팀 왈도의 핵심입니다. 번역의 채택은 운영진만 할 수 있지만, 채택 및 제출, 제안된 번역은 사이트 이용자 모두가 열람할 수 있습니다. 번역 참여자는 이 번역안이 부족하거나, 부적절하다고 판단하였을 경우 새 번역을 제안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제안된 번역 역시 모든 이용자가 열람할 수 있으며 더 나은 번역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5) 이렇게 번역은 마치 '비트토렌트'나 '조각 모음'와 같이 전 부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며, 그 번역에 대한 피드백과 제안 역시 실시간으로 이루어집니다. 번역 프로젝트 전체에 일정한 수준 이상의 질적인 보장이 확보되며, 용어와 분위기의 통일 역시 한 방향으로 향합니다. 왜냐구요? 누군가 틀리게 번역하면 득달같이 달려와 수정하거든요.


결과적으로 다수 번역에 의해 발생하는 검수의 질적 하락과 증가하는 시간을 똑같이 다수의 검수자를 이용해 줄일 수 있게 되고, 번역 프로젝트 전체가 하나의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됩니다. 지금도 가히 엄청난 속도로 번역이 진행되고 있고, 폴아웃 4가 나온 지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았고 참여자가 아직 적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 속도는 갈수록 빨라질 것이라 생각됩니다.

사실 이런 집단지성을 이용한 프로젝트 진행 방식에 문제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큰 것 하나만 생각해보자면, 참여자가 저조할 경우 이 방식은 의미가 없죠. 하지만 팀 왈도는 번역에 앞서 전담 번역 참가자를 200명 가량 모아뒀습니다. 이 사람들은 특성상 폴아웃에 사용되는 용어와 세계관을 줄줄이 꿰고 있는 코어 유저일 것이고, 이 '핵심 번역자'들에 의해 프로젝트 전체의 질적 수준이 유지되고 있으며 번역의 속도를 높이는데 이들이 톡톡히 기여하고 있습니다. 폴아웃을 한번도 안해본 사람들이 볼트를 '금고'로 번역해둬도 이 핵심 유저들이 그 부분만 수정해주면 되거든요.

또 다른 예상되는 한 가지 문제는 '반달' 문제입니다. 제출된 번역을 운영진만 채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반달 유저가 급속히 늘어날 경우 운영진이 처리해야 할 업무량이 늘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꼭 반달이 아니더라도 번역자가 점점 늘어나면 그에 비례해 제출되는 번역물 역시 많아질 것인데, 번역 참가자에 비해 운영진의 수가 부족하면 운영진 쪽이 병목이 되어 전체적인 속도가 느려질 우려가 있습니다. 제가 운영진이 아닌 관계로 제출-채택 시스템을 알아볼 수는 없지만, 반달은 차단으로 해결하면 되고 (요새 위키백과에서도 반달이 그닥 문제되지 않는 형국에..) 운영진의 채택 시스템도 참여자의 증가에 따라 시스템적 보완이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됩니다.

사실 이런 시스템적으로 해결 가능한 문제보다 가장 크게 우려되는 점은 '다양한 의견의 충돌'입니다. 위키에서 이른바 '수정전쟁'으로 지칭되는 그것입니다. '편집'에는 편집자의 주관이 반영되기 마련입니다. 누군가 A로 생각하고 편집한 앞쪽의 번역분이 있고, 다른 누군가가 B로 생각하고 편집한 뒤쪽의 번역분이 있다면 그 둘은 언젠가 서로 충돌하게 됩니다. 그동한 굳건히 그렇게 믿고 편집해온 자신의 번역분을 가지고서요. 위키백과를 위시한 각종 위키 시스템에서도 가장 큰 진통을 겪는 것이 이 부분입니다. 대부분은 위키 게시판이나, 문서의 토론 란을 통해 총의를 모으게 됩니다만 팀 왈도의 시스템에는 토론란이 존재하지 않네요. 이 부분을 어떻게 해결할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생각입니다.


폴아웃이라는 게임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이번 번역 방식은 이전에는 미처 몰랐던 새로운 시스템을 활용하기에 더욱 주목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번 번역은 며칠만에 끝날까요? 팀 왈도는 '왈도체'가 아닌 훌륭한 퀄리티의 번역을 뽑아낼 수 있을까요? 함께 지켜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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