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2287년의 커먼웰스를 여행하느라 여가시간을 전량투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즐기고 계시는지요.
지금 제 진행률은 중반 정도로, 인스티튜트에 들어갔다 나오기까지 했습니다.
스토리 진행의 핵이 되는 세 조직 - 브라더후드, 레일로드, 인스티튜트를 모두 만났고, 각각의 대의와 목표를 충분히 들었는데요.
과연 어느 쪽 조직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 맞을지 참 고민이 됩니다.
아, 물론 폴아웃이 한 번 하고 치울 게임도 아니고, 언젠가는 세 루트 다 해 보겠죠. 사실 이것저것 다 하다가 최종분기점 직전에 저장 한 번 하고 불러오기로 때우면 되는 부분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스토리와 컨셉에 몰입해서 하는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어려운 선택인 듯 합니다.
일단 브라더후드 오브 스틸. 인스티튜트가 보유하고 있는 기술의 위험성과 신스의 위협에 군사적으로 대응하려고 하고 있죠. 3편 시절에 호감을 샀던 라이언스의 이념은 버려진 듯 하지만, 여전히 서부에 비하면 황무지의 질서와 안녕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하는 집단임은 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황무지인들에게 쓸데없이 적대감을 사지 않기 위해 처음 등장할 때부터 평화의 제스처를 취하는 것도 그렇고요. 그리고 아서 맥슨의 말마따나 사실 신스는 인간에게 있어 정말 위협적인 존재입니다. 폴아웃 1의 마스터와 슈퍼뮤턴트가 생각나지 않나요? 인간보다 더 강하고 빠르며 우월한 존재. 이제 거기다가 이들은 인간과 잘 구분되지도 않습니다. 사실 인간과 유사한 기계라는 테마는 현재의 안정된 세계에서 등장한다는 가정 속에서도 사람들을 섬뜩하게 하고 다양한 논쟁을 낳는데, 핵전쟁에 의해 질서가 무너진 상황에서의 등장이 얼마나 큰 위협일지는 상상조차 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브라더후드의 목표는 분명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브라더후드의 두각이 달갑지 않은 측면도 분명 있습니다. 일단 레일로드와의 가장 큰 쟁점, 신스의 인권 문제가 있겠죠. 과연 자의식을 형성하게 된 기계를 단순한 기계 내지 무기로 간주하는 것이 맞는가? 큰 틀에서 볼 때는 그렇게 간주하는 것이 최대 다수의 가장 적은 리스크를 보장한다는 점에서 브라더후드의 대의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나, 그 과정에서 희생되는 수많은 자유의지들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더욱이 주인공을 브라더후드로 인도한 댄스가 사실 신스였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일어나는 혼란은, 심지어 브라더후드조차도 이 문제에 대해 가슴깊이 고민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일깨웁니다.
게다가 어쨌든 라이언스의 이상론에서 벗어나온 브라더후드는 빼박캔트 군벌이요 군사집단이에요. 이들을 지지하는 것이 커먼웰스의 자유와 황무지인들의 복리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큰 미지수입니다. 농장 접수하는 퀘스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총칼 든 자들의 '필요'라는 것은 언제든 강압적으로 관철될 여지를 남깁니다. 커먼웰스 민병대 같은 사적 무장 조직을 남겨둘 친구들도 아니고, 다이아몬드 시티나 굿네이버의 자치 역시 콧바람만 불면 날려버릴 수 있을 겁니다. 200년의 시간을 넘어 황무지에 내던져진 나를 도와주고 함께 호흡했던 지역민들에게 브라더후드의 철권통치를 선사하는 것이 과연 할 짓인가, 어떤 개연성과 사고과정을 통해 그것이 가능할까를 생각해 볼 때, 무작정 브라더후드에 충성하기는 좀 애매합니다.
레일로드를 볼까요. 사실 레일로드는 척 보기엔 굉장히 선한 조직입니다. 컨셉부터가 노예해방 비밀결사에서 나왔고, 자기 목숨을 걸고 다른 의식적 개체의 안녕을 바란다는 것은 인간이 가진 최고의 가치니까요. 게다가 이들은 신스의 해방에 관심이 있을 뿐 쓸데없는 정치적 압력이나 자기 목표 추구는 생각하지 않으니, 오손도손 모여 사는 황무지인들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도 없습니다. 인스티튜트만 쓸어 버리면 더 이상 추가적으로 신스를 만들 애들도 안 남을 테니 훗날의 위협도 크게 생각할 필요가 없죠. 이렇게만 본다면 레일로드를 돕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결국 레일로드의 비전은 너무 모호하고, 커먼웰스를 위해 할 수 있는 바가 전혀 없다는 한계를 가집니다. 이들은 몇몇 소수의 신스의 삶과 권리는 지킬지 몰라도, 커먼웰스 전체의 발전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습니다. 심지어 이들에 의해 새로운 자의식을 가진 신스들이 그 우월한 능력을 토대로 범죄 행위를 저지르기 시작하는 순간 커먼웰스는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들 가능성도 있습니다. 게다가 인스티튜트 멸망 이후 새로운 신스가 나오지 않는다 해도, 어쨌든 신스는 기계인만큼 기본적으로는 오래 살아요. 과연 수백년 이후까지 살아남을 신스들, 의식을 갖고 인간세계에 침투한 그들이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요? 인류 사회가 지금처럼 탄탄한 체계를 갖춘 것도 아닌 상황에서, 소수의 능력이 다수를 휘두르기 충분한 상황에서 말이죠. 어쩌면 레일로드 루트를 탄 커먼웰스는 100년 후 신스 독재자에 의해 통치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자유의지, 자유, 이것들은 굉장히 중요한 것들이지만, 제 한 목숨 지키기도 어려운 필부들에게 그것은 기본적인 질서 위에 마련되지 않을 경우 오히려 심각한 위협으로 다가올 수도 있는 것인 법입니다.
인스티튜트의 경우, 껄끄러운 이유부터 얘기해야겠군요. 뭐 길게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파이퍼 말마따나 이들은 "커먼웰스의 도깨비(boogieman of the commonwealth)"니까요. 납치, 살인, 사람 바꿔치기 등 이들이 저지른 범죄행위는 수두룩빽빽합니다. 실제 인간들의 삶이 치열하게 이루어지는 지표에 대해선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으면서, 자신들은 안전한 곳에 머무른 채 탁상공론으로 세상을 주무르고 싶어하는 이들의 스탠스는 전형적인 사악한 높으신 분들이죠. 당장 다이아몬드 시티부터가 그렇잖아요. 대체 얘네가 맥도너를 통해 다이아몬드 시티를 뭘 어떻게 하고 싶어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런 꼭두각시 시장이 멍청한 연설을 해대며 집권을 하고 있는 것이 딱히 건강한 자치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파이퍼도 이런 상황을 답답해 하고 있고요. 게다가 대체 얘네가 자신들의 고귀한 목표라고 얘기하는 "인류의 재정의(redefine of mankind)"는 구체적으로 뭘 말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신스가 왜 그것의 방법인지도 모르겠어요. 인스티튜트 쪽 퀘스트를 더 전개해 나가다 보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기계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겠다는 발상이 곱게 보이진 않네요. 인류를 신스로 대체할 생각일까요?
하지만 또 "너희 악당! 꺼져!"라고 하기에도 좀 그런 것이.... 어쨌든 인스티튜트의 수장은, 주인공의 아들이란 말입니다. 오직 아들을 찾겠다는 일념 하에 200년의 세월을 넘어 커먼웰스를 들쑤시고 다녔는데, 그렇게 해서 만난 아들이 좀 구려 보이는 조직에 속해 있다고 해서 꺼져 이 악당아 할 수 있을까요? 주인공의 심정에 이입해서 볼 때 이 부분이 영 꺼림칙합니다. 솔직히 인류의 안녕이나 커먼웰스의 미래 뭐 다 중요한데, 당장 주인공을 이렇게 움직여 왔던 가장 핵심적인 동력은 아들에 대한 사랑이니까요. 아무리 그 아들이 어차피 오늘내일 하는 노인네라지만, 그게 그렇게 칼같이 잘라낼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게다가 어쨌든 인스티튜트는 브라더후드와 달리 과학기술집단이기 때문에, 아무리 커먼웰스를 배후에서 조종한들 직접적인 통제는 할 수도 없고 할 생각도 없으며, 실질적으로 커먼웰스의 복리에 가장 큰 도움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질서 자유 뭐 다 좋은데 일단 먹고 살아야지요. 게다가 레일로드 같은 낭만주의에 빠지지 않고 신스를 잘 통제해서 사용한다고 하면 이는 분명 핵전쟁 이후 인류에게 있어 획기적인 노동력 공급원이 될 겁니다. 오히려 이런 통제를 통해 신스의 위험성을 제어할 수도 있고요.
과연 내가 유일한 생존자라면, 과연 어떤 조직에게 커먼웰스의 미래를 맡길 것인가. 내가 한 때 행복했던 고향을 누가 회복시켜 줄 것인가. 아내와 아들의 추억을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이런 고민을 하게 됩니다. 확실히 최선/최악의 선택이 명료했던 3편과 뉴베가스에 비해 이야기의 깊이가 깊어졌네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p.s. 민병대는 아마 안 될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