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 지원 아래 추진됐던 미국 하버드대 한국고대사(EKPㆍEarly Korea Project) 사업 지원이 지난해 중단됐다. 한사군 가운데 하나인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내용이 문제였다. 학계에서 한탄이 나왔다. “해외 연구자들이 1920, 30년대 일제시대 일본학자들이 간행한 영어논문 밖에 접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 학자들이 만든 최신 연구 성과를 외국에 소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 사업은 국내뿐 아니라 하버드대와 연계한 사업이었다. 한국이 진행하는 사업은 국내의 정치적 논란에 따라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는 나쁜 인상을 남긴 셈이다. 동북아역사재단 지원 아래 8년간 추진되던 ‘동북아역사지도 편찬사업’도 좌초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이 지도에도 역시 낙랑군이 평양에 표기되어 있다.
두 사건 모두 재야사학자들의 빗발치는 항의와 이에 호응한 국회의 움직임이 있은 뒤 일어난 일이다. “비록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해도 이 사업들 모두가 향후 연구를 위한 디딤돌들인데, 정치적 힘을 등에 업은 여론 공세에 좌초됐다”는 아우성이 학계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민족주의 열풍, 그것도 ‘유구하게 이어져 내려온 반만년 민족사’ 같은 얘기만 나오면 ‘박정희식 파시즘’의 냄새를 맡고 진절머리를 칠 것만 같은 소위 ‘진보’도 이 문제에 관한 한 예외가 아니다. 참여정부에 참여한 경제학자인 이정우 경북대 명예교수는 경향신문 2월 19일자 기고 ‘한국은 아직 식민지인가?’라는 글에서 법원이 ‘김현구 고려대 교수가 임나일본부설을 지지했다’는 허위 사실을 유포한 혐의로 ‘재야사학자’ 이덕일씨에게 내린 유죄 판결을 비판했다.
여기서 이 교수는 이덕일을 “한국사 분야 최고의 역사학자”로까지 추어올렸다. 하지만 이에 대한 역사학계의 평가는 차갑다. “사이비 역사학이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것이 ‘민족주의’와 ‘반식민사학’이다 보니 친일파 청산을 주장하는 이들에게서 쉽게 공감대를 이끌어 낼 뿐 아니라, 진보적이라는 이들조차 민족주의에 얼마나 취약한지 잘 드러내는 사건”이라는 설명이다.
1990년 평양 고분에서 나온 '초원 4년 호구부' 기록. '초원 4년'은 한원제 재위기인 기원전 45년을 뜻한다. 한제국의 행정력이 평양 일대에 미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자료로 간주된다. 역사비평 제공.
이른바 ‘재야사학’을 두고 “상대할 가치가 없다”며 대면조차 피해왔던 강단사학계가 최근 발행된 계간 ‘역사비평’ 봄호에서 이를 정면으로 문제 삼고 나섰다. 낙랑군 위치 설정 문제 하나로 학계에서 그간 쌓아온 모든 연구가 단 번에 무산되고 학문적 기반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그간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점잖게 에둘러 쓰던 용어인 ‘재야사학’을 버리고 아예 상대를 ‘사이비 역사학’이라 규정한 뒤 신랄하게 비판한 것에서 학계가 느끼는 위기 의식의 강도를 짐작할 수 있다.
고대사를 전공한 한 사립대 교수는 “근ㆍ현대사 문제는 조금만 삐끗하면 곧바로 정치적 논란으로 이어지니 모두가 조심스러워하는데, 고대사는 크게 부풀리고 ‘사상 최초’라고만 하면 무조건 애국이요, 좋은 일이라는 이상한 논리가 횡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심을 잡아줘야 할 국회나 언론도 이런 여론에 휘둘리거나 눈치 보기는 매한가지라는 설명이다.
1974년 국사교과서 국정화와 함께 수면 위로 등장한 재야 사학의 주장은 계속 반복돼온 것이다. 고조선은 강대국이었고, 백제는 중국 동남부를 지배했고, 낙랑군은 중국에 있었고, 통일신라는 한때 중국까지 진출했다는 주장이다. ‘안호상-윤내현-이덕일’을 큰 뼈대로 삼아 그 외 역사학에 관심 있는 여러 아마추어 학자들이 나름대로 문헌을 해석한 뒤 책을 내는 방식으로 주장을 확산시켜 왔다. 한 고대사 연구자는 “고조선 관련 기록을 다 끌어모아도 한자로 100자 남짓인데 이 자료를 가지고 의미 있는 연구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기록 당시 정황을 잘 맞추어봐야 하는데 입맛에 맞는 부분만 떼내 확대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런데도 학계가 그간 대응하지 않았던 것은 ‘1987년 트라우마’ 때문이다. 당시 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주최로 강단ㆍ재야학계 토론회가 열렸는데, 청중들은 강단사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모욕적인 인신 공격을 퍼부었다. 이후 학계는 이 문제는 아예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 툭하면 내놓는 ‘공개토론하자’는 얘기는 ‘일단 불러낸 뒤 청중을 동원해 망신을 주겠다’는 말과 동의어가 되어버렸다. 토론 참가 경험이 있는 한 학자는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토론하면 되지 않겠냐는 생각에 참여했는데, 이 부분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질문을 해도 대답은 안하고 식민사학에 찌들었다는 소리만 반복하고 야유만 보내는 데 무슨 토론이 되겠냐”고 말했다.
정면 대응했다가는 재야사학쪽에 되레 훈장을 달아줄 수 있다는 우려도 작용했다. 강단사학계가 나서서 ‘희생양’ ‘순교자’를 만들어 줄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이 때문에 최근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한 식민사학자로 명예훼손 당했다고 소송을 제기해 승소한 김현구 고려대 교수 경우는 학계에서 매우 이례적인 사안으로 받아들여진다. 한 학자는 “‘식민사학자들이 단체로 자기들을 탄압하고 있다’는 선전 소재로 쓰일 게 뻔하다고 주변에서 말렸는데 본인이 도저히 참을 수 없다며 소송을 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낙랑군의 지배층 무덤에서 나온 부장품들. 세형동검 등 한 눈에 봐도 고조선계 유물이다. 한나라의 사군현이 설치되어 있었다 한들, 낙랑군은 엄연히 고조선계 주민들이 지배층이었다는 의미다. 한나라가 낙랑군으로 통해 강압적으로 통치했다는 일제 식민사학의 주장을 뒤엎은 자료들이다. 역사비평 제공
北 낙랑군 인구 조사 담은 목간 이미 공개
이런 상황에서 역사비평 특집에 글을 실은 3인의 학자는 문제가 된 낙랑군 평양설을 되짚고 있다. 우선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주장은 일제가 날조한 게 아니라 조선 후기 때부터 있었다. 위가야(성균관대) 박사는 ‘한반도 한사군설은 식민사학의 산물인가’라는 글에서 이를 밝혔다. 재야사학쪽은 낙랑군이 요동에 있었다고 주장한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을 내세우지만, 이익의 주장이 왜 잘못됐는지는 다산 정약용 등이 이미 충분히 반박했다.
다만 이 반박도 문헌 분석 수준에 그치는 것이어서 확정적이라고까지 말하기는 어렵다. 이어 일제강점기에 발굴 작업이 본격화되면서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설은 확정 단계에 접어든다. 초기 발굴 과정에서는 평양이 고구려의 수도였다는 점 때문에 일본 학자들조차 유물을 고구려 것으로 봤으나, 중국계 유물이 워낙 많이 나와 결국 낙랑군쪽으로 방향을 틀었을 정도다.
유물 중 결정적인 사례는 1990년대 초 북한이 발굴해 2000년대에 공개한 낙랑군 목간이다. 이 목간은 요즘으로 치면 낙랑군 인구센서스 자료다. 낙랑군 25개 현의 구역별 인구 분포 등이 상세하게 나오는데 이를 들여다보면 중국 한나라의 지방 통치 형태가 낙랑군에도 고스란히 관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재야사학쪽은 “남한을 식민사학에 묶어놓기 위해 북한이 일부러 공개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흔히 ‘식민사학계의 거두’라고 불리는 이병도가 1976년 ‘낙랑군고’에서 한사군의 위치를 정하면서 “수성현은 자세하지 아니하나 지금 황해도 북단에 있는 수안에 비정하고 싶다”라는 표현을 쓴 이유를 알 수 있다. 재야사학쪽에서는 “비정하고 싶다”는 표현을 문제 삼아 이병도가 한자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아무렇게나 한반도 안에다 한사군을 구겨 넣었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강단사학계는 이미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다는 전제 아래 각 군현의 구체적 위치를 정해보는 과정에서 나온 하나의 추론이라고 반박한다.
위 박사는 이 글에서 일제시대 발굴에서 식민사학적 성격이 드러난다는 점은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흔히 생각하듯 ‘간악한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조작, 위조, 날조했다’가 아니라 덮어놓고 무조건 “중국의 식민지였다”는 쪽으로만 해석하는 태도의 문제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사학계의 이후 연구는 ‘낙랑군을 비롯한 한사군이 굉장한 자율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쪽에 초점을 둔다. 이런 연구는 재야사학계가 좌초시킨 하버드대 한국고대사 사업에 제출된 논문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오영찬 이화여대 교수는 ‘낙랑군 주민과 지배세력’이라는 글에서 ‘낙랑’이란 명칭 자체가 평안도 지역 토착민들을 지칭하는 단어였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낙랑군’이라 이름 붙인 것은 지역의 자율성을 인정한 결과라고 해석했다. 여호규 한국외국어대 교수 역시 ‘낙랑ㆍ대방의 소멸과 그 영향’이란 글에서 대동강 지역이 고조선 시기 가장 융성했던 곳이기 때문에 일방적 식민지배를 받지 않았고, 고구려가 이 지역을 병합한 뒤 대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낙랑은 중국문화 한반도 흘러 드는 통로”
역사비평에 그간 낙랑군 연구 경과를 상세히 설명한 ‘오늘날의 낙랑군 연구’를 실은 안정준(연세대) 박사는 ‘낙랑군은 한나라 식민지’라는 일제 식민사학자 미카미 쓰기오의 주장이 일본 학계에서조차 받아들여지지 않게 된 것을 한국 사학계의 성과로 꼽기도 했다. 안 박사는 “고고 자료를 기반으로 한 한국 학계의 연구로 낙랑군이 중국인에 의해 운영된 중국인 사회라는 오랜 통념이 깨졌다”면서 “지배층은 중국인이요, 피지배층은 토착민이라는 일본 학계의 이원적 종족지배론도 함께 붕괴됐다”고 지적했다. 한족의 강압적 지배가 지속됐다면 낙랑군이 420여년 동안 유지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으리라는 설명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여전히 논쟁이 끊이지 않는 것은 과거사가 현재 영토문제에 고스란히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사가 영토문제로 고스란히 이어진다는 사고 자체가 대표적인 식민사학 논리다. 기어코 한사군을 한반도 내에서 몰아내야만 한다는 재야사학의 논리는 옛날에 한사군이 있었으니 조선은 중국 식민지였다는 식민사학쪽 주장과 똑 같은 논리일 뿐이다. 기경량(서울대) 박사는 역사비평에 쓴 ‘사이비역사학과 역사 파시즘’이란 글에서 이런 논리의 전도를 꼬집어 “식민주의 사학을 격렬히 비판하고 거부하면서도 다른 한편 식민주의 사학의 이론을 그대로 자기화한 기괴한 쇼비니즘이 탄생하게 됐다”고 비판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은 결국 중국 지역을 동아시아의 문화적 저수지로 받아들이는 것뿐이라는 주장도 그래서 나온다. 로마사를 유럽 각국이 공통의 역사적 기원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심재훈 단국대 교수는 “한국사학계가 낙랑군의 자율적 성격을 강조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런 주장 역시 민족주의적 해석”이라면서 “낙랑군을 통해 중국의 선진 문화가 수입돼 삼한과 일본으로 퍼져나가는 과정이 당시 역사의 전체적인 모양새”라고 말했다. 이렇게 보면 식민사학이라 비판 받는 강단사학이 오히려 민족사학이 되어버린다. 심 교수는 “그렇게 우리 역사에 자신이 없는가”라고 되묻는 쪽이다. 무조건 땅이 크고, 역사가 오래이고, 사상 처음이 우리여야만 만족하는 심리야말로 우리 역사를 부끄럽게 여기는 데서 나오는 자격지심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