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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소설 <검은새>
게시물ID : art_344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날라가붕게
추천 : 5
조회수 : 1066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2/04/24 18:41:42
부끄럽지만 누군가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싶어서 글을 올립니다.





chapter. 1 검은새

1
 청년은 들판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바람이 불어와 드러난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불안이 엄습해 왔다. 사슴을 들쳐맨 어깨에서 열기의 땀이 아닌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무엇에 몸을 숨길 수도 없고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도 분명치 않은 이 상황이 청년에게는 부담이 되었다. '어머니 산으로'라는 말을 청년은 되내었다.
 주변을 살피며 익숙한 산 능선을 눈으로 훑었다. 다행이 기억에 있는 산 끝자락이 눈에 들어오자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허벅지 사이로 오그라든 불알이 느껴진다. 청년은 겁을 먹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나 집단을 만나기라도 한다면... 끔찍한 상상에 발걸음은 더 빨라졌다. 한참을 걸어 자신을 스치는 나뭇가지를 피부로 느꼈을 때가 되어서야 안도가 찾아왔다. 이제야 어깨에 진 사슴의 가치와 그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오그라든 불알이 못내 마땅치 않아 조물락 거리며 긴장을 풀었다. 오늘은 누구의 집에서 밤을 보낼 수 있으려나. 가슴은 커야 해. 동네에서 큰 가슴을 가지고 있는 처자들을 생각해보고 흐뭇한 생각이 들었다. 사슴이 두 어깨에 짊어지고도 품이 남을 정도이니 일주일 동안은 살 냄새 가득한 생활을 할 수 있겠네. 콧구멍은 절로 커졌다.
 청년은 익숙한 능선을 따라 걸으며 목적지를 마을 공터로 정했다. 마을 처자들이 청년을 가장 잘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가야했다. 처자들 중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사람만한 사슴을 들쳐맨 날 붙잡으며 자기 집으로 안내하겠지. 아무렴, 이 정도 사슴이면 그 정도의 수고는 해야지. 물론 가슴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신념을 접은 것은 아니지만 심사숙고하여 결정해 둔 처자들 중에서 자신을 붙잡는 이가 있으면 인심을 쓰는 척, 마지못해 가는 척 할 준비는 되어 있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연기를 해야 할 테지만... 어깨어 절로 힘이 들어가는 것을 청년은 의식하지 못했다.
 그런데 마을 다다라 갈 수록 청년은 무엇인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마을 입구에 다다르기 전부터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고 귀에 까마귀 소리만 들려왔다. 뭐야 재수없게, 카악 퇫! 침을 뱉고 한 껏 턱을 세우며 불알을 세심하게 펴 분질렀다.
 넓어진 콧구멍에서 김을 뿜어대며 마을 안으로 걸어들어 갔을 때에 발 밑으로 끈적한 촉감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드문 드문 붉은 웅덩이들이 땅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고여 있었다. 까마귀 소리는 부르기라도 하듯 멀리서 울렸다. 홀리듯 다리는 움직여 소리의 근원지인 산신낭으로 움직였다.
 청년은 수많은 이들이 벌이는 난교의 현장에 서 있었다. 마을에 있는 남녀란 남녀들은 죄다 모여 벌거벗고 산신낭 앞에서 살을 섞으며 뒹굴고 있었다. 한 번 쯤 상상해 본 광경이기도 했으나 눈에 비치는 모습은 상상보다 끔찍했다. 늙음과 젊음이 한 데 어울려 몸을 섞는 광경은 왠지 모를 역겨움을 만들었다. 게다가 누가 누구인지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모두들 머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청년이 겨우 풀어놓은 불알은 한겨울 냉수를 들이부은 듯 급격히 오그라들고 좆은 자라의 머리마냥 불알로 파고들었다.
 산신낭에는 그들의 머리가 내걸려 있었다. 붉게 상기된 얼굴로 자신들의 몸뚱아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몇 몇은 진득한 입맞춤을 하며 혀를 빨았고 그 사이에는 피가 흘러내려 산신낭 밑으로 웅덩이를 만들었다. 청년은 도망가야 할지 이대로 상황을 지켜봐야 하는지도 구분하지 못했다. 도중에 청년을 알아챈 머리가 소리를 질렀다. '끼야야아악' 몸뚱아리들이 신기하게 알아듣고 청년을 향해 돌아섰다.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끼며 청년은 몸이 굳었다. 그러다 그년과 눈이 마주쳤다. 왜 그년이라고 생각했을까? 청년은 스스로의 생각을 의심했다.
 그러는 동안에 그년이 다가왔다. 북이 울린다. 탐스런 유방을 흔들며 진득한 엉덩이 고랑을 벌리고 그년은 다가왔다. 신기한 일이었다. 저 멀리 얼굴과 눈을 마주하며 씰룩거리는 몸뚱이를 곁눈질하고 있자니 무서움 보다도 민망함이 일었다. 얼굴은 안심시키듯 밝게 웃는다. '넣어봐' 스쳐지나가는 입술의 모양만으로도 청년은 그 의미를 파악했다. 북 소리가 격렬해진다. 모든 머리 없는 몸뚱이들이 살을 다시 섞기 시작한다. 그러나 모든 머리들은 청년을 바라본다. 까마귀도 운다. 그년의 몸이 다가와 뒤에서 청년을 안아 손으로 오그라든 분신을 만지작 거렸다. 급격하게 부풀어 오르는 분신에 자신이 놀라 신음한다. 어루만지고 지긋이 짜내는 듯한 손길에 청년은 의식이 아득해졌다. 때문에 자신의 목을 향해 날아드는 도끼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죽어버린 청년은 '보았다'. 머리가 없어진 청년의 몸은 다른 이들의 몸처럼 다시 살아나 광란의 씹을 하지 못했다. 머리가 없어진 후 피를 쏟고 정말로 죽어버린 몸뚱이었다. '그년'의 몸뚱이는 죽어버린 청년의 몸에 흥미를 잃었는지 이내 다른 이들의 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서 청년은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잠에서 깨어났다. 어이 없게도 청년의 좆은 부풀어 오를 대로 부풀어 오르다 못해 검붉은 방망이가 되어 있었다.

2
 소리에 놀라 깨었다. 눅눅한 빗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드문드문 구름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높은 비명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 또 시작이지. 옆에 누운 '곰살'은 그렇게 맞받아치고 다시 돌아 누었다. 청년은 그 끝을 알지만 수풀더미로 만들어진 집에서 수풀더미를 벌려 밖을 바라보았다. 밖에는 또 그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소녀가 물웅덩이에 구르고 있었다. 일어나 앉아 몸을 웅크렸지만 배를 걷어차는 발길질에 또 다시 웅덩이를 굴렀다. 눈이 저절로 찡그려 졌다. 또 시작이네. 붉은개의 가슴에는 또 하나의 머리가 그려질 것이다. 아마도 코가 뭉툭한 소녀의 그림이 그려지겠지. 머리채를 부여 잡힌 소녀가 일어섰다. 다리 사이에서 지난 밤을 알려주는 끈적거림과 붉은 핏기들이 함께 흘렀다. 얼굴을 몇 대 더 쥐어 맞고 소녀는 또 다시 진탕에 빠졌다.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지 하늘을 바라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눈동자에 빗물이 그대로 떨어졌다. 작작 좀 하지. 분이 스며든 목소리는 청년의 입 안을 맴돌 뿐이다.
 청년은 시선을 돌려 다른 남자들의 눈치를 살폈다. 드문드문 수풀 뒤에 숨은 눈동자들이 보였다. 눈동자는 있어도 입은 드러나지 않았다. 붉은개가 쇳사람이기 때문일 테지. 붉은개는 그 시선들을 알고 있었다. 그 시선들이 자신을 해치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자랑스럽게 쇠를 벗어서 비어있는 가슴 언저리 부분을 지긋이 가리켰다. 그 곳에 들어갈 거라는 뜻이었다. 붉은개는 머리채를 쥐고 오른손으로는 칼을 꺼내 돼지를 썰 듯 소녀의 모가지를 썰었다. 두 세 번의 칼질로 목은 떨어져 나가고 뿜어져 나오는 피를 뒤집어 쓴 붉은개는 웃으며 주변을 돌았다. 사냥감을 자랑하는 양, 소녀의 머리를 높게 들어 올린 채로...
 보는 눈들이 사라져도 청년은 붉은개가 하는 양을 바라보았다. 던지고 밟고 드러난 구멍에 손을 넣고 후비며 즐거운 기색이었다. 정말 그런 행위를 즐거워하는 것인지 그런 행위가 주는 두려움을 좋아하는 것인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아마도 둘 모두인 것 같았다. 그러다 붉은 개와 눈이 마주쳤다. 황급히 수풀을 가려 놓았지만 멀리서 물을 밟는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돌아눕는다. 한동안 소리가 없어 다시 돌아앉았지만 그 순간 수풀 안으로 둔탁한 덩어리가 들어왔다. 소녀의 머리였다. 얼떨결에 두 손으로 머리를 안아든 청년은 소녀와 눈을 마주보게 되었다. 수풀 사이로 붉은개의 머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선물이야. 선물. 구멍에 좆이라도 끼우면서 놀아. 그년이 코가 별로이긴 한데, 입구멍은 조임이 좋더라고.”

붉은개는 웃으며 말했다.

“대답해. 잘 가지고 놀겠다고.”

“응...”

“그래야지. 다음에는 함부로 눈 마주치지 마. 다음에 또 그랬다간 니 잘려나간 목구멍에 내 좆을 끼우며 놀 테니까. 알아들어?”

“응...”

붉은개는 청년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가 끝까지 눈을 피하는 청년을 만족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래야지.”

붉은개의 머리가 사라지고 그 사이로 비가 들었다. 소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것이 붉은개가 무서워서인지 아니면 소녀에게 이끌렸는지도 분명치 않았다.

“어마, 씨발 그게 뭐야.”

곰살이 놀라 자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청년은 첫 나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그 자리에서 굳은 듯 소녀의 머리를 부여잡고 앉아있었다.


3
 쇳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림을 새겼다. 어떤 그림은 동물이었고 어떤 그림은 사람이었다. 듣기로는 영혼을 담는다 했다. 사냥한 동물의 영혼을 새겨 넣으면 잡귀는 도망가고 영혼이 많아질 수록 죽음은 피해간다 했다. 때로는 죽음이 그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찾으러 왔다가 그림의 영혼만 가지고 떠난다고들 했다. 이야기가 돌자 쇳사람들을 따라 돌사람들 중에서도 드문드문 그림을 몸에 새기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청년은 그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죽음이 그림은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한 번 큰 싸움이 일어나면 누구나 공평하게 죽었다. 새를 그린 사람이 맷돼지를 그린 사람의 창에 꿰이고 맷돼지를 그린 사람은 사슴을 그린 사람에게 목줄을 잘렸다. 사슴을 그린 이들은 또 물고기를 그린 이들에게 팔 다리가 뭉개져 죽었다. 대부분 쇳사람들은 살아남았다. 아마도 쇳 사람들이 살아남는 이유는 그림은 아닌 듯 싶었다. 그나마 그들의 공통점을 따진다면 모두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점일테지.
 첫 나팔이 울리고 마을 공터로 사내들이 모여들었다. 백여 명이 모였다. 그리고 사람이 아닌 이들은 그 배가 넘었다. 그들 중에 남자들은 말이 없었고 여자들은 흐느껴 울었다. 흐느껴 우는 여자들 중 하나가 베어지면 울음은 안으로 흘렀다. 그래도 울음을 그칠 수는 없었으나 그 정도면 충분한 듯 더 이상의 베임은 없었다.

 "시발 아침부터 작작 좀 하지. 미친놈아 그걸 보고 앉아 있었냐?"

 곰살은 찌푸리며 침을 뱉었다. 머리가 비집고 들어오면서 뿌린 피가 몸에 곰살에게 닿았던 모양이다. 곰살은 아침부터 수 없이 침을 뱉었다. 그리고 팔뚝에 새긴 맷돼지 그림을 문질렀다. 그 녀석의 유일한 자랑이었다. 곰살은 청년의 짝이었다. 곰처럼 덩치만 큰 녀석은 남들의 배를 먹었다. 그런 주제에 겁은 많아서 피를 보면 질색을 했다. 방패와 창 중에 녀석은 당연스럽게 방패를 잡았다. 딴에는 힘이 좋아서 짝을 잘 막아줄 수 있다는 식으로 말했으나 청년은 그 방패로 자신을 막아준 경우는 거의 없다는 걸 안다. 녀석은 자신의 몸뚱이를 가리기 위해 방패를 택했던 것이다. 그런 주제에 자신을 스스로 곰이라 불렀다. 거짓이다. 곰은 그렇지 않아. 아마도 저 맷돼지도 거짓말일 것이라 짐작했다. 청년의 짐작은 대부분 맞는다.
 붉은개가 느즈막하게 천막에서 나타났다. 그 가슴에는 어느새 그림이 추가되어 있었다. 갓 새겼는지 붉게 살이 일어나 있었다. 붉은개는 모두의 시선이 그 가슴에 머무는 것이 좋은지 쇠를 입지 않고 가슴을 드러내놓고 다녔다.
 붉은개를 보자마자 다시 가늘은 떨림이 청년의 몸을 흔들었다. 소녀를 보았는가 아니면 붉은개의 칼질을 보았는가. 소녀의 불쌍함보다는 붉은 개의 칼질이 더 궁금했음을 자신은 알고 있다. 붉은개의 칼질은 정확히 죽음을 향해 있었다. 살을 비집고 들어간 칼질은 죽음을 가리켰고, 칼질이 지나간 목아지의 붉은 단면에는 삶은 없고 하얀 김만이 빠져나가는 넋처럼 사그라들었었다. 붉은개에게 맞선다는 것은 정확히 죽음을 향하는 칼날 앞에 목아지를 들이미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야지' 붉은개의 목소리와 손길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가자 찔끔 오줌이 흘러나왔다.
 다시 한 번의 나팔 소리와 함께 쇳사람들과 돌사람들과 그리고 사람이 아닌 이들의 행렬이 시작되었다. 붉은개는 말을 탄 쇳사람들의 선두에 섰다.  그 뒤로 돌사람들의 일부가 따르고 가운데에서는 사람이 아닌 이들, 그리고 후미에는 돌사람들의 나머지가 따랐다. 청년은 걷는 내내 오줌을 찔끔거리며 걸었다.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도 상상속의 자신은 붉은개의 칼날에 족족 목의 붉은 단면을 보이고 죽어나갔다. 스무 번을 생각하고 난 후에는 그만 두었다. 더 이상 오줌이 마렵지 않았다. 멀리서 까마귀 우는 소리가 들린다. 왜 이렇게 까마귀가 많아? 몰랐어? 저 새끼들 까마귀의 자손이라잖아. 웃겨, 사람이 알에서 나왔다니. 말이 돼? 사람은 보지에서 나오지. 보지에서. 곰살은 킬킬거리며 웃었다.

4
일곱째를 낳고 난 이후 급격하게 불어버린 몸을 움직이며 소년의 어머니는 움막으로 들어가 가죽으로 감싸놓은 물건을 항아리에서 조심스럽게 꺼냈다. 둘둘둘둘 풀어내니 끈 풀린 활이었다. 활에 잔 상처가 많고 줄은 드문드문 삭았지만 열 자식을 낳고 그 중에 다섯이나 건져서 먹여 살리는 집안에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약간 비틀어진 활과 살을 한쥠에 쥐어 건내는 어머니가 소년은 고마웠다.

"여자가 사람을 낳는거야. 너도 이제 나가면 어른이야. 항상 네가 여자에게 원하는 것이 있으면 항상 고기를 가져다 줘야 해. 그게 어른러운 거지. 그리고 여자는 수 많은 남자가 보여주는 고기들 중 하나를 고민하고 골라야 해. 그게 당연한 셈이야."

첫 사냥을 나가는 아들이 자랑스럽기도 하고 서럽기도 한 눈치였다.

"고기가 많고 적고는 두번째야. 여자는 항상 그 다음을 본다. 뱃속에 애가 들었는데 남자가 고기만을 남기고 하룻밤만에 사라져버리면 어쩌겠니? 자식이 생기면 그 여자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 꾸준히 고기를 가져다 주는 게 옳은 일이다. 그 셈을 지키지 않고 소문이 돌면 그 어떤 여자도 너와 밤을 같이 하지 않을거야. 알겠니?

고개를 끄덕였으나 이미 마음은 사냥에 들떠 있어서 어머니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그래도 행여나 모자란 것은 없는 지 챙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때에도 소년은 온통 남자들이 모여 출발을 준비하고 있는 마을 입구만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꼴사납게 여자가 시키는 잔심부름이나 하지는 말고."
"응 알았어."
"그래 가봐"

소년은 집에서 나섰다. 열 다섯의 나이에 활과 화살, 고기와 여자 이 이외에 무엇을 더 생각할 수가 있었을까? 그러나 소년은 첫 사냥에서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세 번째 사냥에서 겨우 토끼를 잡았을 뿐이다. 동네의 여자들은 자신들의 움막 앞에서 토끼를 들고 서성이는 새파란 꼬맹이를 발로 걷어차고 야멸차게 쫒아냈다. 소년이 잡은 소소한 사냥물들은 결국 가족을 먹이는데 쓰였다.
 그러다 처음으로 사슴을 잡았을 때가 사냥을 쫒아다닌지 어느덧 1년이 다 되었을 즈음이었다. 사슴의 커다란 넓적다리를 매고 마을에 들어섰을 때에 여자들의 눈에 비치는 놀라움이 마음에 들었었다. 그날은 소년이 청년이 된 날. 그날은 청년만을 위한 날이었다. 처음으로 남자의 대우를 받았고, 처음으로 여자와 밤을 보냈다. 여자의 몸은 뜨거운 물주머니와 같아서 아득함의 저편까지 출렁이며 몰아쳤었다. 다시 찾아올꺼지? 응. 아침에 여자의 움막을 나오며 여자가 청하는 그 한 마디가 얼마나 많은 자신감을 주었던가. 움막을 나오는 청년의 발걸음은 어느덧 산신낭에 다달았다.

'아들, 일어나'

산신낭에 메달린 어머니의 머리가 말했다. 청년은 어느새 '그 나무'에 다시 돌아와 있었다. 불과 살과 고기가 넘실거리는 그 장소에서 신음소리와 함께 빠져나왔다.

뭐야? 아무것도 아냐. 왜 그리 땀을 흘려?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청년은 요 근래에 계속해서 반복되는 꿈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곰살의 캐물음이 싫어 움막 밖으로 빠져나왔다. 밤 공기는 찼다. 꿈은 점점 자주, 그리고 점점 뚜렷하게 다가왔다. 왜 어머니 산인가, 왜 산신낭인가. 마을이 쇳사람들에게 습격을 당한 그 날에 어머니 산은 죽었고 산신낭은 신통력을 잃었다. 이제와 나타나 봐야 사람들에게 버려진 신은 잡귀일 뿐이다. 그림이라도 새겨야 할까? 절래절래 머리를 저었다. 그림은 그림일 뿐이다. 꿈 때문에 움츠러드는 자신이 우스웠다.
 한참을 바람을 쐬며 서 있을 때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청년은 반사적으로 몸을 숙였다. 움막과 움막들 사이로 움직이는 물체가 보였다. 처음에는 산짐승처럼 보였지만 네 다리가 아니라 두 다리로 몸을 숙이며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사람이었다. 그림자는 점차 가까워진다. 슬며시 주먹칼을 꺼내든다. 움막의 그림자로 들어간다. 달빛에 사람의 인기척이 얼룩진다. 도망자인가 첩자인가? 가까이 다가오는 그림자를 기다렸다가 덥친다. 대강 머리만 짐작하면 된다. 짐작하면 얼추 맞는다. 뒤에서 목덜미를 부여잡고 다른 손으로는 단 번에 목을 딴다. 그렇게 짐작하고 칼을 휘두르려는 찰나

"꺄아-읍"

청년은 앙칼진 목소리에 놀라 칼을 떨어뜨리고 얼떨결에 입을 막았다. 여자다. 여자가 왜 여기에 있나?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여자의 냄새가 콧속을 파고든다. 고개를 흔들었지만 이미 콧 속은 알싸한 여자의 땀내를 기억했다. 어쩌면... 청년은 잠시 아득한 끝을 상상한다. 여자는 도망자고 여기는 자신을 막을 누구도 없다. 이 여자의 잘못이다. 난 나에게 내려진 행운을 누리기만 하면 된다. 어쩌면...

'여자가 사람을 낳는거야'

꿈결의 목소리가 되살아 난다. 시발. 청년은 강아지 새끼마냥 덜덜 떠는 여자의 목덜미를 쥐고 입을 막은 채로 한참을 있었다. 미칠 일이다. 코는 냄새를 맡고 분신은 부풀어 오르는데, 정작 흥이 나지 않는다.
 밖에 무슨 일 있어? 곰살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참 후에 대답한다. 없어, 별일 아냐 쥐 때문에. 한 참 후에 따지는 듯한 곰살의 목소리가 들린다. 정말이야? 이빨이 갈린다. 이 새끼야 두 번 말하게 하지마. 알았어. 풀죽은 곰살의 목소리에 한 숨 돌린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한다? 여자가 사람을 낳는거야. 여자가 사람을 낳는거야. 여자가 사람을 낳는거야. 귓속에 앵알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청년은 여자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내 말 알아들으면 고개를 끄덕여. 끄덕인다. 가파른 숨길이 손을 스친다. 손가락으로 파고드는 숨길조차도 달다. 시발. 어떻게 해버리고 싶은 욕구가 다시 살아난다. 숨을 고른다. 살고 싶어? 끄덕. 조용히 따라와, 밤낮으로 허벌나고 결국에 죽기 싫으면.
 구름이 많아 달빛은 자주자주 모습을 감췄다. 그때마다 달빛 그늘에서 몸을 움직여 움막과 움막 그림자 사이로 얼룩거리는 그림자들이 움직였다. 그리고 여자들이 모여있는 횃불 앞으로 드러섰다. 횃불 앞에는 꿈뻑거리며 졸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그 뒤로 드문드문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리고 두려움을 얼굴에 달고 있는 여자들의 수많은 얼굴들이 보였다.

"들어가"

턱짓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여자가 움직이지 않는다. 목소리가 거칠어진다.

"들어가라고 까마귀년아."

입을 벙긋거리려다 여자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볼 게 뭐가 있겠어. 그러나 돌아서지 못하고 여자가 슬며시 횃불을 넘어가는 모습을 그늘에 숨어서 지켜보았다. 횃불과 지킴이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통과하는 동안 청년이 오히려 긴장을 했다. 여자들의 곁으로 돌아갔을 때 다른 여자들의 표정에 놀라움이 일었다. 그래도 말은 없었다. 여자가 뒤로 돌아선다. 횃불에 비친 여자는 보일리도 없는 어둠을 바라보았다. 보이지도 않는 주제에. 입을 벙긋거린다. 대강 고맙다는 뜻이려니. 짧은 머리칼, 잔 근육이 보이는 마른 몸, 살이 검다. 뭐 가슴은 크네. 돌아서서 다시 어둠을 넘나들며 움막으로 돌아간다. 겨우 움막으로 돌아와 한 숨을 돌린다. 누우려니 곰살이 말을 건다.

"짝의 좆은 좆도 아니겠지"

목소리에는 불만이 섞여 있었다.

"무슨 소리야."
"그 여자"

한 순간 말문이 막혔다.

"넌 혼자만 즐겼어. 한참을 나갔다 왔잖아."
"니가 틀렸어."
"아니야. 넌 짝에게 잘못했어. 곰의 방패는 널 지키지 않을거야."

화가 치밀어 올랐다. 거짓말쟁이에 속 좁은 새끼.

"마음대로 해."
"넌 후회할거야."
"닥쳐. 잠이나 자."

눕는다. 아직도 코는 알싸한 향기를 기억한다. 어머니의 말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돈다. 고기라도 준비할 걸 그랬나? 흐흐흐 헛 웃음이 돈다. 화가나 거칠어지는 곰살의 숨소리도 들린다. 웃기지마 넌 나한테 안돼. 왠지는 몰라도 이 상황이 나쁘지는 않다. 그리고 청년은 못 다 이룬 잠으로 빠져들었다.

5
쇳산으로 돌아가는 길에 여러 번의 습격이 있었다. 마을을 빼앗기고 여자들은 빼앗긴 채 겨우 도망친 남자들이 머릿수를 모아 공격해왔었다. 그들의 눈에는 화가 없었다. 오히려 두려움이 있었다. 쫓기고 쫓기다 막다른 길에 몰려 어쩔 수 없이 무기를 들어야 하는 눈. 한 번 보았던 그 눈이 그들에게서 보였다. 까마귀 사람들은 죽음보다 그보다 못한 삶이 두려웠나보다. 겁에 질린 얼굴로 달려드는 이들에게 창을 들이미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으나 화살이 자신에게 날아든 순간부터 꺼리김은 사라졌었다.

'부우~~'

또다시 나팔이 울린다. 가운데에 여자들을 모아놓고 그 주위를 쇳사람들이 둘러싸고 싸움은 돌사람들이 했다. '모여! 모여!' 으름들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으름들은 자기 돌사람들을 모아 줄을 세웠다. 앞으로는 방패를 뒤로는 창을. 그러나 패배를 기억하는 적과 싸우는 것은 힘든 일이다. 창과 방패가 미리 세워지면 안된다는 걸 그들은 알고 있었다. 창이 하늘을 향하고 방패가 뒤를 돌아보고 있을 때, 전신을 검게 물들인 사내들이 날 박힌 몽둥이를 휘두르며 고기를 향해 달려드는 까마귀 떼처럼 몰려온다. 방패가 막아주지 못하는 창들은 머리가 깨어지고 뒤늦게 홀로 세워진 방패는 등으로 몽둥이와 칼날을 받았다.
 뒤에서 으름들은 부하들을 다그쳐 줄을 세웠다. 움직여 새끼야! 쫄지마 한 걸음 더! 시발 좆들을 다 까셀라부다! 앞장을 서던 두 어름조가 까마귀 떼 속으로 사라지고 이제 코 앞까지 들이닥쳤다. 곰살의 뒤에서 청년은 옷자락에 손바닥을 닦고 창을 부여잡았다. 몰아치는 까마귀들이 방패로 달려든다. 하나, 둘, 콰직!
 방패에 올라탄 까마귀가 대열로 넘어오기 전에 청년은 창으로 상대의 대가리를 찍었다. 허리까지 넘어온 상대가 늘어져 방패에 걸렸다. 곰살은 쏟아지는 대갈통 물에 진저리를 치며 늘어진 몸뚱아리를 떨쳐냈다. 까마귀들은 방패에 갈퀴줄을 걸고 당기기 시작했다. 몇몇 방패들이 끌려나간다. 끌려나간 뒤 까마귀들의 틈 속으로 사라져 그 검은색 너머로 피가 흩뿌려졌다.
처음 겪어보는 일에 모두가 얼었다. 청년은 으름을 쳐다보았다. 놀란 눈에 입만 벌린 채로 벙긋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방패가 끌려간 틈새로 까마귀들이 비집고 들어온다. 좁혀! 좁혀! 기어코 곰살의 방패에도 갈퀴줄이 걸리었다. 곰살의 몸집으로도 힘에 겨웠다. 방패가 들려나간다. 시발시발. 주먹칼을 꺼내어 방패 앞으로 손을 내밀어 줄을 끊는다. 팽팽하던 힘이 끊어지며 곰살과 청년은 벌러덩 넘어졌다. 자신을 깔고 넘어진 곰살의 머리를 후려친다. 일어나 곰새끼야 엄살 부리지마! 청년이 하는 양에 놀란 으름들이 소리친다. 줄을 잘라! 줄을 잘라! 그래도 갈퀴 줄의 반절은 이미 방패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방패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적과 살이 맞닿는다. 노련한 남자들은 대부분 몽둥이와 창을 버리고 주먹칼로 찍고 물어뜯고 박쳤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남자들이나 애꿋은 하늘을 향해 창을 휘두르다 죽었다. 일어난 곰살의 방패에 또 다른 까마귀가 올라탄다. 청년은 창을 뻗는다. 피했다! 순간 소름이 돋는다. 상대가 창목을 잡고 내려가 방패 너머에서 청년을 끌어당긴다. 당기는 힘이 하나가 아니다. 청년은 끌려나가지 않기 의해 곰살의 어깨에 기댄다. 순간 곰살이 자신에게 기댄 청년을 슬쩍 밀어낸다. 중심이 무너진다.
 청년은 방패 밖으로 넘어졌다. 청년은 튕기듯 다시 일어선다. 방패 열어 새끼야. 방패들이 열리지 않는다. 방패 건너편 곰살의 숨소리가 들린다. 이 개새끼야! 방패에 등을 기대고 주먹칼을 뽑는다. 까마귀 하나가 달려든다. 오른손으로 휘두르는 몽둥이를 보고 오른쪽 겨드랑이 쪽으로 숙여 피한다. 주먹칼을 올려 뻗어 상대의 좆 언저리를 쑤신다. 두번째 몽둥이가 쓰러지는 까마귀 뒤에서 나온다. 주저앉아 피한다. 몽둥이가 방패에 걸려 청년의 머리 위에서 멈춘다. 주먹칼로 상대의 복부를 주욱 긁어낸다. 쓰러진 까마귀의 머리를 탁탁 친다. 튀는 피가 청년의 눈으로 들어갔다. 청년은 방패에 등을 기대고 눈을 문질렀다. 세상이 붉다. 언듯 새로운 몽둥이가 희미하게 보인다. 상대의 팔뚝이 있을 부분을 짐작하고 밀어서 뒹군다. 어깨가 뜨겁다. 부지런히 더듬어 만진다. 다리다. 목아지가 있을 부근에 손을 뻗는다. 짐작하면 대강 맞는다. 목줄을 잡고 주먹칼로 찢는다. 왼손을 부여잡은 상대의 손아귀에서 힘이 빠진다. 눈을 뜨지도 못하고 방패쪽으로 짐작되는 방향으로 잽싸게 몸을 굴린다. 다행히 등에 부딪히는 감각이 느껴진다 방패다. 청년은 먼지와 피가 범벅이 된 눈을 닦는다. 왼 어깨가 뜨겁다. 줄줄줄 흐르는 게 느껴진다. 이 새끼들이 열어주지 않아. 곰살은 이해가 되지만 다른 녀석들은 왜?

'부우~~'

두 번째 나팔이 울렸다. 방패가 곧 열린다. 앞에 있는 까마귀들보다도 방패 뒤에서 쏟아져 나올 쇳것들이 두려웠다. 방패 뒤에서 들리는 말 울음 소리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그리고 청년의 앞에서 방패가 열렸다. 말을 탄 쇳것들이 몰려온다. 청년의 앞으로 쏟아져 나온다. 말을 탄 붉은개가 누런 이를 보이며 웃는다. 청년의 몸의 공중으로 튀어오른다. 웃는 곰살의 얼굴을 본 것만 같다.


6
울렁울렁, 세상이 찌그러진다. 늘어지나, 오그라드나? 꿈뻑꿈뻑, 눈을 감았다 뜬다. 삐잉삐잉, 이건 무슨 소리야? 귀를 후비려는데 팔이 움직이지 않는다. 힘을 주려는데 부들부들 몸이 떨린다. 엎드려 있다. 눈 앞으로 칼날들이 오고간다. 그리고 피가 뿌려진다. 삐잉거리는 소리가 걷히고 쇠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청년은 무슨 일로 자신이 여기 한 가운데에 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뭔가 꼬였다는 것은 모를리 없다. 오른손에 잡히는 게 없다. 어어어어 겨우겨우 손을 휘젓는다. 주먹칼, 주먹칼... 눈 앞에 두 다리가 선다. 살이 검다. 뭔지 모르지만 위험하다. 창날이 높아진다. 설마 죽나? 나 죽나? 정신이 번쩍들어 오른손에 쥔 주먹칼로 살 검은 놈의 발을 찍는다. 벌떡 일어나 덥치려는데 어째 힘이 모자라 비명을 지르는 놈의 다리에 매달렸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주먹칼로 상대의 허벅지를 찍어 올라간다. 상대가 창을 놓치고 쓰러진다. 덩달아 쓰러진다. 속이 메스껍다.
복부를 찍어 비비적비비적 몸통으로 올라탄다. 검은 얼굴이 보여. 그렇게 날 쳐다보지 마. 새끼야, 니가 먼저 그랬어. 후들거리는 왼손으로 모가지를 잡고, 오른손으로 목줄을 찢는다. 손이 하늘로 들리더니 부들부들 떨다 떨어진다. 피가 쏟아져. 눈이 안보여. 그런데 누우면 안돼. 안돼. 일어나. 다리가 조금씩 움직이네.
무릎이 후들후들 거린다. 겨우 선다. 등살이 검은 놈이 보여, 아마도 죽여야 할 것 같아. 휘적휘적 걸어가 뒤를 덮친다. 등뒤에서 모가지를 부여잡는데 힘이 모자라 손이 멈춘다. 상대의 힘이 만만치 않다. 손이 꺽인다. 일단 목줄을 문다. 이빨이 생살을 파고드는 느낌이 온다. 으그극, 으그극. 입으로 누린내 풍기는 것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이번에도 쓰러진다. 메스꺼워. 우웨엑, 내가 뭘 먹었었나? 뭐가 이리 나와. 주저앉아 토를 한다. 뭐가 입에 끼었어. 퉤.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네. 꿈틀거리는 검은 놈들이 보인다. 위험해. 엉금엉금 기어가 주먹칼로 찍어누른다. 팍팍. 저기도. 보이는 족족 기어가 죽이고 기어가 죽이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얼마나 했을까? 주위가 이상하다. 아까보다 쇳소리가 별로 들리질 않아. 두리번거리면서 주위를 살폈다.
저 멀리서 쇳것들이 신이 나서 칼질을 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쇳것들. 오라질 쇳것들. 말들은 몰아치듯 달렸다. 쇳것들의 칼은 돌마저도 자를 기세였다. 들어오는 몽둥이를 칼로 자르고, 막는 방패를 자르고, 줄을 자르고, 머리를 자르고, 팔 다리를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잘리는 단면들에 질려버렸다. 검은 것들이 도망간다. 말이 사람보다 빠르다는 사실을 그들은 몰랐을까. 도망가는 놈들은 등에 창칼을 맞고 쓰러졌다.

'흐흐흐흐흐흐'

흐르는 울음 소리와 비명이 들린다. 까마귀 여자들이 싸움을 보고 있었다. 우는 여자 둘이 칼을 맞는다. 그래도 울음은 좀처럼 그쳐지지 않는다. 그 까마귀년도 울고 있으려나? 청년은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왜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는 지 궁금했다.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이 새끼 재미 좀 봤네?"

까마귀들 속을 들쑤시다가 퍼뜩 붉은개의 목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본다. 말탄 붉은개의 뒤로 으름들과 돌것들이 질린 얼굴로 청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와 먼지를 뒤집어 쓴 청년이 입에 든 살점을 뱉었다. 푸푸. 살점은 입가에 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부우~ 부우~'

나팔소리가 들려온다. 응? 아...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주저 앉아 숨을 몰아쉰다. 콧물이 목구멍에 걸린다. 이내 숨이 가빠 무릎을 안고 엎드린다. 싸움이 끝났나보다. 콧물이 코끝을 타고 바닥으로 흐른다. 흐흐흐흐 눈물이 쏟아진다. 벌어진 입 사이로 울음이 끄윽끄윽 새어나온다. 청년은 살았다. 살아남았다.

7
청년은 벌거벗겨지고 손에 줄이 매인 채로 붉은개의 말에 묶였다. 싸움이 끝났을 때, 청년은 겁에 질린 곰살에게 달려들었었다. 곰살의 얼굴을 주먹으로 내리치고 머리로 수없이 박쳤다. 그러다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깨어난 이후부터 주욱 발가벗겨지고 굴욕당했다. 붉은개는 청년을 괴롭히는 것을 정말 즐기는 모양이었다. 막대기로 툭툭 청년의 분신을 건드리기도 했다. 이가 갈렸지만 붉은개의 눈조차 쳐다볼 수 없었다. 그러다 청년의 분신이 커지기라도 하면,

"좆조차도 아직 뉘우침이 없어."

붉은개는 다른 돌것들 보라는 듯 청년을 끌고 말을 달렸다. 넘어지고 땅에 끌려 수 많은 상처들이 몸을 덮었다. 등에서는 하루 종일 진물이 흘렀다. 물 한 모금 조차도 의지대로 먹을 수 없었다. 곰살이 다가와 부어오른 실눈을 뜨고 부러진 이를 보이며 웃었다. 후회할 거라고 했지? 곰은 자신의 말을 지켜. 꺼져 곰새끼야. 넌 내손에 죽어. 곰은 더 이죽거렸다. 늦지 않았어. 잘못했다 빌면 물을 주지. 청년은 기가 막혔다. 까마귀년 하나 때문에 모든 게 꼬였다. 여자가 사람을 낳는다고? 거짓말이야 어머니. 여자때문에 사람이 죽게 생겼어. 당신 아들이 죽게 생겼다고.

"꺼져 돼지새끼야. 언젠가 니 목을 잘근잘근 물어 뜯어버릴 날이 올거야."
"넌 잘못을 뉘우치지 않아. 곰에게 잘못하면 누구든 후회해. 넌 그 첫번째 본보기가 되는거야. 모두들 니 잘못을 알아. 내가 말해 주었지. 그러니 모두들 곰을 우러러 보게 될거야"
"그놈의 곰, 곰, 말끝마다 곰 타령이네. 그래 언젠간 니놈 가죽을 모조리 뜯어서 모자로 써줄게. 그때쯤 모두가 널 우러러 볼 걸"

눈을 홉뜬 곰살은 청년에게 침을 뱉고 도망쳤다. 마지막 싸움터에서 쇳산까지는 이틀 거리였다. 이틀 동안 겨우 살아남아 쇳산에 들어갔을 때 살아남은 청년을 보며 붉은개는 입맛을 다셨다. 줄을 풀기 전에 청년을 불러 비어있는 자신의 가슴 한 켠을 툭툭 가리켰다. 눈을 피하는 청년을 보고 웃으며 줄을 잘랐다.
겨우 살아남아 창살에 들어가 누웠을 때에 이대로 눈을 감고 죽기를 바랐다. 온몸의 상처에서 열이 오르기 시작하고 시름시름 앓았다. 낮에 햇볕을 맞아 누우면 온 몸의 피가 끓어오르고, 밤이 되면 오르는 열과 추위가 청년의 몸과 마음을 부쉈다. 창살은 돌것들의 움막에서 가까웠다. 청년은 본보기였으므로 청년이 하는 양을 다른 돌것들도 지켜보아야 했다.
잠귀로 소리가 들린다. 혼자 열을 죽였데. 내가 듣기론 스물이래. 말에 치이기고도 살아남았더래. 귀신이야. 귀신이야.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청년은 힘 없이 고개를 들었다. 찌는 햇빛 속에서 드문드문 날아다니는 까마귀들이 보였다. 창살 밖에 앉은 까마귀의 눈을 쳐다보았을 때에 청년은 소름이 돋았다. 그것들은 청년이 죽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가온 죽음에 저리 꺼져. 저리 꺼져 씹새끼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붕도 거적때기도 없는 창살 속에서 스스로를 부여안고 눈을 감는다. 제발 이대로 잠들어서 깨어나지 마라. 수 없이 되내어도 청년의 몸과 정신은 잠들지 못하고 고통을 모두 받아냈다. 꿈을 꾸고 아픔 때문에 꿈에서 깬다. 아픔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어떤 때는 꿈에서 물고기가 되고, 어떤 때는 새가 되고, 어떤 때는 노루가 되었다. 그러나 수천 수만 번의 꿈의 끝에는 까마귀 떼가 몰려와 청년의 몸을 뜯는다. 눈알이 파이고, 가슴팍은 쪼이고 쪼여 허벌나 뼈 조차도 남지 않는다. 삼일 동안 내내 청년은 신음을 흘렸다.
사흘째가 되던 날에 돌것들이 창살 앞에 모였다. 신음소리가 사라진 창살 앞에서 돌것들은 저마다의 짐작을 수근거렸다. 죽었다. 살았다. 그래도 모두들 확인하기 꺼렸다. 으름이 먼저 창살을 열었다. 찝찝한 눈치였다.

"일어나."

움직임이 없었다.

"죽었나?"

청년에게 다가가려는 순간에 청년이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으름은 화들짝 놀라 물러나고 돌것들은 겁에 질렸다. 청년은 의외로 편한 눈치였다. 곰살이 도망치는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왠지 꿈에서 어머니를 본 것만 같다. 잠 한 번 잘 잤네. 질린다는 표정으로 으름이 창과 옷가지를 던졌다. 부들부들 거리며 옷가지를 부여잡아 몸을 가렸다.

"일어나 새끼야. 일어설 수 없는 싸움꾼은 죽음이야."

청년은 다리를 후들거리며 겨우 일어났다. 머리가 빙빙 돌았다.

"넌 지금부터 곰살과 짝이 아니다. 짝눈의 움막으로 들어가. 한 번 더 돌것끼리 문제를 일으키면 넌... 내 손에 죽어."

끄덕끄덕. 옷을 입지도 못해 손에 쥐고 창을 끌며 겨우 짝눈의 움막으로 갔다. 그 뒤로 수근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까마귀 귀신이 붙은거야. 그림이 없잖아. 너무나 많이 죽여서 몸에 붙었나보지. 말도 안돼. 움막으로 들어가니 늙은이 짝눈은 검은 눈과 흰 눈으로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 혀를 차며 말했다.

"귀신이야. 넌 귀신이야. 불길해. 불길해. 까마귀 귀신이 붙었어."

움막 안으로 쓰러지듯 누웠다. 그림을 그려야겠어. 흐흐흐 큰 그림을 그려야지. 까마귀 그림을 그릴거야. 잊어버리지 말아야지. 아무렴. 흐흐흐. 짝눈은 청년의 알 수 없는 웃음에 기가 질린듯 했다. 귀신이야. 귀신이야. 청년에게 귀신이 붙었다는 믿음 덕분에 먹는 것을 가지고 짝눈이 장난 치는 일은 없었다. 늙고 겁 많은 짝눈은 청년을 떠받들었다. 결국 청년은 살아남았고 회복했다. 그리고 몸에 그림을 그렸다. 조악한 까마귀 한 마리가 청년의 가슴에서 둥지를 틀었다. 까마귀 그림의 붓기가 빠져갈 때쯤부터 모두가 청년을 '검은새'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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