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호 이익.
-그는 ‘조선사군(朝鮮四郡)’이란 글에서 “낙랑군, 현도군은 요동에 있었다”고 서술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동천왕 20년(246)조에 “위(魏)나라 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이 현도로 침범해서…낙랑으로 퇴각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 베이징 부근인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퇴각한 곳이 낙랑이라면 낙랑은 평양일 수 없다고 본 것이다.
2. 박지원
- 연암 박지원(朴趾源:1737~1805)은 <열하일기>의 ‘도강록(渡江錄)’에서 “고조선과 고구려의 옛 강역을 찾으려면 먼저 여진(만주)을 국경 안에 합친 다음 패수를 요동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지원은 같은 글에서 한사군은 영고탑(寧古塔) 등지에 있다고 한 김윤(金崙)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때 이미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없었다는 학자군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熱夏日記)·도강록(渡江錄)》
「(전략)...... 애닯도다! 후세에 와서 경계를 자세히 모르게 되고 본즉 함부로 한사군의 땅을 압록강 안으로 죄다 끌어들여 억지로 사실을 구구하게 끌어 붙여놓고는 그 속에서 패수(浿水)까지 찾게 되어 혹은 압록강(鴨綠江)을 가리켜 패수라 하기도 하고 혹은 청천강(淸川江)을 가리켜 패수라 하기도 하고 혹은 대동강(大同江)을 가리켜 패수라 하기도 하여 이로써 조선의 옛 강토는 싸움도 없이 쭈글어 들고 말았다. 이것은 무슨 까닭일까?
한나라의 요동에 두었던 낙랑군치(樂浪郡治)는 그 자리가 오늘의 평양이 아니요 요양의 평양이다. 왕씨의 고려시대에는 요동과 발해 전역이 한꺼번에 거란에 들어가고 보니 겨우 자비령(慈悲嶺)·철령선(鐵嶺線)을 그어 국경선으로 삼았고 선춘령(先春嶺)·압록강마저 다 내다버려 돌아다보지도 않았으니 그밖에 땅들이야 말해서 무엇하랴! 비록 안으로 삼국을 통일했지마는 그 강토와 무력은 고구려의 강대함에 멀리 미치지 못하였거늘 후세의 곡학자들은 평양의 옛 명칭에만 마음이 쏠렸고 함부로 중국의 사전만 등을 대고는 수 · 당의 구적에 정신이 팔려 여기가 패수다 여기가 평양이다 당치도 않는 수작들을 하니..등등
3. 남구만
약천 남구만(南九萬:1629~1711)은 <약천집(藥泉集)> 패수(浿水)조에서 “패수가 요동에 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라고 말하고, 답 이찰방 세구(答李祭訪 世龜)에서는 “현도, 진번은 지금 요동의 여진 땅에 있었다”고 말했다.
4. 김시양
-조선 선조 때의 학자 김시양(金時讓:1581~1643)도 ‘자해필담(紫海筆談)’에서 “낙랑현도대방은 다 요동에 있었던 땅이다”라고 요동설을 주장했다.
[출처] 이투데이: 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idxno=1379010#csidx163787598a291f391385e76ac36edd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