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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21세기 부활한 황국신민들에게 고함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황국신민들 부활하다...
기경량, 안정준, 김재원 등 '무서운 아이들',
거짓말부터 먼저 배워서야, 식민사학으로 밥 벌어 먹을 수 있겠나...
학자로 입문하기도 전에 여론정치술부터 먼저 터득,
식민사학 전위대들, 이들은 학자가 아냐...
〈한국일보〉는 2017년 6월 5일자에 기경량(39) 가천대 강사, 안정준(38) 경희대 연구교수, 김재원(31) 만인만색연구자네트워크 공동대표의 대담을 대서특필했다. 이번에도 역시 담당기자는 예상대로 조태성이었다.
「-(동북아역사)지도 사업에서 논란이 됐던 낙랑군 위치 문제는 어떻게 보나.
안(정준)=“낙랑군이 평양에 있다는 건 우리뿐 아니라 제대로 된 학자는 모두 동의한다. 100년 전에 이미 논증이 다 끝났다. 바뀔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김(재원)=“100년 전이라 하니까 자꾸 ‘친일 사학’ 소리 듣는다. 하하.”
기(경량)=“그러면 200년 전 조선 실학자들이 논증을 끝냈다라고 하자.”(『한국일보』, 2017년 6월 5일)」
이것이 바로 현충일 전날, 조선총독부 사관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는 〈한국일보〉 조태성이 같은 조선총독부 사관 추종자들을 불러다 놓고 순국선열들을 조롱하며 나눈 대화다. 그 다음날인 현충일, 조선총독부 역사관 옹호에는 〈한국일보〉에 뒤질 수 없다는 자세를 견지해온 〈경향신문〉이 안정준의 칼럼을 실었다.
이 신문, 저 신문 취재 당하느라,
학문은 언제하나, 기경량, 안정준, 김재원...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황국사관자들과 판박이...
기경량, 안정준은 과거에는 진보를 표방했던 〈역사비평〉에 「사이비 역사학……」 운운하는 글을 실었고, 〈조선일보〉에서 이들에게 “국사학계의 무서운 아이들”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자 크게 고무되었다. 내일 모레 마흔인 성인들이 ‘아이들’이란 말을 듣고 칭찬으로 여기는 태도부터가 이해가지 않지만 ‘무서운 아이들’은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것은 “100년 전에 논증이 다 끝났다”고 잘라 말했다. 100년 전이 조선총독부 시절이라는데 시선이 미치자 그러면 200년 전 조선 실학자들이 논증을 끝냈다고 하자고 깔깔 거린다. 필자에게는 마치 조선인 순사 앞잡이가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면서 조롱하는 장면이 겹쳐진다.
100년 전이면 다이쇼(大正) 6년인데, 당시 제국 일본에서는 ‘황기皇紀’ 2577년’이라고 불렀다. 물론 조선총독부도 그렇게 불렀다. 〈일본서기〉가 야마토왜의 건국을 서기전 660년으로 비정한 것에 서기 1917년을 보태 나온 황기 2577년이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 백작의 무단통치에 대한 한국 민중들의 반발이 3·1혁명으로 터져 나오기 2년 전이었다. 서기21세기 음습한 음지에 있다가 양지로 기어 나온 현대판 황국신민皇國臣民들의 등장이다.
▲ 대일항쟁기, 기경량, 안정준, 김재원 등 '무서운 아이들' 의 식민사학 아바지, 이병도가 부역했던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야유회 장면이다. 폭풍한설, 풍찬노숙하며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사관과 싸웠던 단재 신채호가 여순감옥 차디찬 바닥에서 죽어갈 때, 저들은 게이샤, 무당을 옆에끼고 술잔치를 벌이며 조선총독부 식민사관 만세를 불렀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였던 〈독립신문〉 사장과 참의부 참의장을 역임하신 희산 김승학 선생은 서기1929년 만주에서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셨다. 김승학 선생은 해방 후 독립운동가들의 시각으로 편찬한 피의 투쟁사인 〈한국독립사〉를 편찬하셨는데, 이 책의 편찬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이셨던 백암 박은식 선생의 유지를 계승한 것이었다. 〈한국통사韓國痛史〉의 저자였던 박은식 선생은 광복 후 나라를 되찾은 기쁨의 역사를 쓰라고 유언하셨고, 김승학 선생은 상해에서 〈독립신문〉을 운영하면서,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 독립운동사 관련 자료를 모았다. 그러다가 1929년 만주에서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삼부통합운동을 전개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한다.
김승학 선생은 〈한국독립사〉 서문에서 “불행하게 왜경倭警에게 체포된 후 수각(手脚:팔다리)이 부러지는 수십 차례 악형을 당한 것이 주로 이 사료수색 때문이었다.”라고 회상했다. 독립운동사 사료를 어디 감추어두었는지 대라고 고문 받았다는 것이다. 일제는 역사전쟁을 총칼로 싸우는 군사전쟁 못지않게 중시했는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분야가 독립운동사와 한국고대사였다. 한 세기 전 친일파들이 일왕 다이쇼와 총독 데라우치의 시정에 감읍하던 시기에 발생했던 105인 사건 때 독립운동가들이 당한 고문에 대해 김승학은 〈한국독립사〉에서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①작은 상자 속에 새우처럼 꾸부려 선 채 36시간 지나기, ②머리에 칼(枷)을 씌워 매어달되 발이 땅에 닿지 못해 겨우 발가락만 닿게 하기, ③엄지손가락을 한 데 묶어 공중에 매어달기, ④팔을 뒤로 꺾고 다리에 얽어 묶기, ⑤팔을 뒤로 제쳐놓고 나무를 목덜미에 대고 코에 물을 들이붓기(〈한국독립사〉, 1965년, 151쪽)”
물론 이때도 이완용, 송병준 같은 황국신민들은 일왕 다이쇼와 총독 데라우치의 관대한 시정에 감읍하면서 잘 먹고 잘 살았다.
기씨, 안씨, 김씨...조선총독부사관이 그리우면,
일본 가서 밥 벌어 먹어야지,
왜 한국인 탈 쓰고 국민세금 축내나...
앞서 〈한국일보〉에 나와 설쳐 된 현대판 황국신민들은 낙랑군의 위치가 평양이란 사실이 “100년 전에 이미 논증이 다 끝났다”고 했다. 그렇다면 100년 전에 역사학계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자. 일제는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점한 후 총독부 취조국과 그 뒤를 이은 참사관 실에서 한국사 관련 사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해 일본에 가져가거나 불태웠다. 1915년 중추원으로 관련 업무를 이관했다가 백암 박은식의 〈한국통사韓國痛史〉가 국내에 유포되어 민족혼을 일깨우자 1916년 7월 중추원 산하에 〈조선반도사〉 편찬위원회를 구성했다. ‘조선반도사’라는 틀 속에 한국사를 가두는 것이었는데, 그 핵심이 바로 ‘한사군 한반도설’과 ‘임나일본부설’이었다. 〈조선반도사〉는 총6권으로 편찬할 계획이었는데, 제1편 상고~삼한, 2편 삼국, 3편 통일신라는 지금도 한국 역사학계에서 존경해 마지않는 조선총독부의 이마니시류(今西龍)가 집필했다. 그중 낙랑군 조를 보자.
“낙랑군, (조선)현은 위씨(위만)조선의 본지本地에 설치하였으며, 그 군치(郡治:낙랑군을 다스리는 곳)는 위씨의 고향인 왕검성, 즉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조선총독부, 〈조선반도사〉, ‘한(漢) 영토시대’)”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조선반도사〉에서 ‘낙랑=평양’이라고 비정한 것이 현대판 황국신민들이 “100년 전에 이미 논증이 다 끝났다”고 주장하는 유일한 근거다.
‘1백 년 전에 논증이 끝났다’는 식민사학 전위대들,
스스로 황국신민임을 고백하다.
1백 년 전 독립투사들은 황국사관과 역사전쟁 중이었다...
역사학은 사료로 말하는 학문이다. 문헌사료와 고고학 사료를 아무리 뒤져도 ‘낙랑=평양설’이 맞는다면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기경량, 안정준 같은 ‘무서운 아이들’은 물론 그 스승들도 절대 1차 사료로 말하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온갖 현란한 문장을 늘어놓고는 ‘논증이 끝난 문제’라고 주장한다. “논증이 끝났다.” 라고 말하려면 ‘낙랑=평양설’이란 명제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가 없어야 한다. ‘1+1=2’라는 명제에 이의를 제기하는 수학자는 없다. 그러나 ‘낙랑=평양설’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학자가 없었는가?
주목해야 할 인물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이었던 석주 이상룡(서기1858~1932) 선생이다. 이상룡은 서기1911년 초에 고향 안동에서 만주로 망명하면서 망명일기인 〈서사록西徙錄〉을 쓰는데, 여기에 이미 “(한)사군의 땅은 압록강 이동以東을 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서사록」, 1911년 2월 24일)”라고 논했다. 또한 「안화진에게 답합니다(答安和鎭)」라는 편지에서도 “(한)사군의 옛터가 모두 요동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석주유고』 권3)”라고 거듭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가 아니라 요동에 있었다고 논했다. 마치 일제가 ‘한사군 한반도설’, ‘낙랑군 평양설’을 주창할 것을 미리 알았다는 식이다. 지식인의 예언자적 사명이 이렇게 드러난 것이다. 이상룡의 선조는 〈단군세기〉의 저자라고도 알려져 있는 고려 말의 행촌杏村 이암(李嵒:1297~1364)인데, 고려 말부터 사관 집안이었다. 이상룡은 만주로 망명한 후 한 손에는 총을 들고 한 손에는 붓을 들고 일제와 싸운 만주 무장투쟁의 대부이자 교민 자치 조직의 대부이고, 역사학자이다.
서기21세기판 황국신민들이 “100년 전에 이미 논증이 다 끝났다”고 주장하던 그 시기에 이상룡 일가와 우당 이회영 형제 일가 등의 망명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은 이상룡이 지은 〈대동역사大東歷史〉로 국사를 공부했다.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이 “방과 후에 나는 국사를 열심히 파고들었다.”라고 회고했는데, 물론 〈대동역사〉를 열심히 파고들었다는 말이다. 〈대동역사〉는 지금 전하고 있지 않지만 이상룡의 〈서사록〉이나 다른 글들을 통해 ‘낙랑=평양설’을 부인하는 내용이 담겼을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서기1917년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낙랑=평양설’이 논증이 끝났다고 가르칠 때 신흥무관학교에서는 ‘낙랑=요동설’을 가르쳤다.
이상룡뿐만 아니었다. 단재 신채호도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조선상고사〉에서 “만반한·패수·왕검성 같은 위만의 근거지는 지금의 해성·개평이었다……한사군은 요동반도 안에서 찾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현대판 황국신민들은 100년 전에 논증이 끝났다고 단언했지만 일본인이 된 것에 감읍하는 소수의 친일파들 이야기고 일제의 통치를 부인하는 독립운동가 겸 역사학자들과 대다수 한국인들은 아무도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 대한민국 서울시 남산 중턱에 세워졌던 일제의 조선신궁 풍경. 조선총독부는 남산에 조선신궁을 세우고 조선민중에게 신궁참배를 강요했다. 일제는 이곳에 있던 국사당을 허물어 버리고 그곳에 일왕가의 정신적 지주인 아마테라스오카미(天照大神)를 안치했다. 이는 일제식민사관에 따른 것이었다. 미제에게 원자탄 맞고 항복 한 후 제일 먼저 한 조치가 스스로 조선신궁을 해체한 것이다. 성난 조선민중이 불경스럽게 신궁을 파괴 능욕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기경량, 안정준, 김재원 등 '무서운 아이들'은 학문적으로 조선총독부 사관을 추종함으로써, 뜻하지 않게 일본 무당 아마테라스오카미를 섬기게 되었다. |
기씨, 안씨, 김씨의 우리역사에 대한 조롱과 폭력,
일제고등계형사, 노덕술이
광복투쟁의 전설, 의열단장 김원봉에게 한 짓과 다르지 않아...
백암 박은식 선생은 1911년에 쓴 〈대동민족사론〉에서 “영평부 지경 안에 조선성이 있었다.”라고 말했다. 영평부는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을 뜻하는데, 명·청시대에는 영평부永平府였다. 영평부에 조선성이 있었다는 중국 사료는 많지만 여기에서는 청나라 역사지리학자 고조우(顧祖禹 ;1631~1692)가 역대 역사지리지를 참고로 편찬한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만 살펴보자.
고조우는 “조선성이 영평부 북쪽 40리에 있는데, 한나라 낙랑군의 속현이다.”라고 썼다.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 북쪽 40리 지역이 한나라 낙랑군 조선현 자리라는 뜻이다. 나는 중국의 수많은 자료를 뒤져서 하북성 노룡현이 낙랑군 조선현이란 사실을 알아내고 크게 기뻐했다가 서기1911년에 이미 박은식 선생이 이 내용을 써놓은 것을 보고 크게 놀라고 부끄러웠던 적이 있다. 이것은 단순히 나의 부끄러움이라기보다는 한국 역사학계 전체의 부끄러움이다. 학부부터 박사과정까지 박은식, 이상룡, 신채호의 역사관을 공부하는 과목은 하나도 없고, 모두 조선총독부와 이병도 등 조선사편수회 출신들이 만든 고대사관만 가르치는 과목을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필자가 조선총독부 과정을 따르지 않는다고 현대판 황국신민들로부터 온갖 비난을 받는 것이 한국 역사학계의 문제점을 극명하게 말해주는 것이다.
대일항쟁기 국내에서 붓을 들고 일제 식민사관과 싸웠던 위당 정인보 선생은 서기1943년 전북 익산군으로 내려가 은거하면서 〈조선사연구〉를 집필해 해방 직후인 서기1946년 간행했다. 정인보는 이 책에서 위만 조선 왕험성의 위치를 대동강(평양)으로 보는 조선총독부 사관에 맞서 “왕험성은 지금의 요녕성 안산鞍山시 산하의 해성海城현”이라고 보았다. 독립운동가 겸 역사학자들은 아무도 ‘낙랑군=평양’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 청나라 역사지리학자 고조우(顧祖禹 서기1631~1692)가 역대 역사지리지를 참고로 편찬한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만 해도, “조선성이 영평부 북쪽 40리에 있는데, 한나라 낙랑군의 속현이다." 라고 하고 있다. 영평부는 지금의 하북성 천진시 동북, 창려에 있다. 중국의 모든 1차사료는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이 현재 중국 하북성 일대라고 한다. 낙랑유물 조작으로 정평이 나 있는 대일항쟁기 세키노타다시(關野貞서기1868년 ~ 1935년)는 조선총독부로 부터 거금 300엔(현재 약 1천5백만원)을 받고, 당시 중국 하북성 북경시의 골동품 시장, 유리창에서 낙랑출토유물을 미친듯이 수집했다(極力之采集). 그리고 조선총독부에 바쳤다. 그의 일기에 그렇게 써 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기씨, 안씨, 김씨 등 '무서운 아이들'이 오매불망 신봉하는 평양에서 출토되었다는 낙랑군 유물은 일제가 '장난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이들은 이러한 명백한 위조증거는 애써 모른 채 하고 있다. |
기씨, 안씨, 김씨가 할 수 있는 것은 ‘선생들’이 물려준
기득권을 이용한 권모술수로 살아남기...
중국 사료가 말하는 낙랑군 위치,
식민사학은 수명 끝이라고 해...
이 ‘무서운 아이들’이나 그 스승들의 신문기사발언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토론을 기피한다는 점이다. 이미 논증이 끝난 문제라는 논리다. 연세대 교수 하일식도 〈조선일보〉 6월 6일자 인터뷰에서 같은 태도를 보였다. 그가 연세대학교의 선배 교수 중에 자랑스러운 위당 정인보 선생이 계셨다는 사실 자체를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토론을 거부하는 이유치곤 궁색해 보이기 그지없다. 스승이고 제자고 토론에 나오지 않으려는 이런 비학문적 풍토는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 역사학계에만 존재한다. 이런 풍토는 왜 형성되었을까?
‘낙랑=평양설’이 아무런 사료적 근거 없는 조선총독부의 식민통치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들 자신이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기전 108년에 설치된 낙랑군의 위치를 비정하는데 기준이 되는 것은 조선총독부가 만든 〈조선반도사〉가 아니다. 낙랑군이 실제로 있었던 시기에 쓰인 중국의 역사서들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가 기준이다. 한나라의 정사인 〈한서漢書〉에는 〈지리지〉가 따로 있어서 한사군의 위치를 비정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100년 전에 논증이 끝났다’는 현대판 황국신민들의 주장은 ‘기자조선의 도읍지=위만조선의 도읍지=낙랑군 조선현’이라는 것인데, 〈한서〉 〈지리지〉는 한마디로 “웃기지 말라”고 일축하고 있다. 서기 1세기에 편찬한 〈한서〉 〈지리지〉는 기자조선의 도읍지에 세운 것은 “낙랑군 조선현”이고, 위만조선의 도읍지에 세운 것은 “요동군 험독현”이라고 군 자체를 달리 비정하고 있다.
한나라의 정사인 〈한서〉 〈지리지〉에서 낙랑군과 요동군을 따로 구분하고 있는 것을 ‘무서운 아이들’이나 그 스승들은 ‘같은 곳’이라고 우긴다. 한 마디로 역사학이 아니다. 그러니 토론에 나오지 못한다. 앞서 말했듯이 낙랑군 조선현은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영평부)이다.
그러면 요동군 험독현은 어디일까? 단재 신채호는 “해성·개평”이라고 말했다. 위당 정인보도 위만조선의 수도인 왕험성을 해성이라고 같게 비정했다.
놀라운 사실은 중국의 동북공정도 이 논리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 동북공정은 낙랑군 조선현은 조선총독부 사관에 맞춰서 지금의 평양으로 비정했지만 요동군 험독현은 그렇게 비정하지 않았다. 최소한 ‘요동군’에 있다고 했으니 한반도 내에 비정할 수는 없다는 학자적 자존심이 발동한 것이다. 현대판 황국신민들은 100년 전 조선총독부에서 논증을 끝낸 문제라면서 무조건 ‘평양’이라고 우기지만 동북공정 소조는 조선총독부를 무조건 추종하지는 않는다. 동북공정의 토대가 된 담기양譚其驤 주편主編의 <중국역사지도집中國歷史地圖集>의 이론서인 <석문회편 동북권釋文滙編 東北卷>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험독현은 후한 때 요동속국遼東屬國에 속하게 되었다. 또한 요동속국에 소속된 각 현은 모두 요하遼河 서쪽에 있었는데, 험독현 한 현만 조선반도에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釋文滙編 東北卷, 中央民族學院出版社, 1987년, 11쪽)”
요동군 험독현만 한반도 내에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중국은 이 험독현의 위치를 지금의 요녕성 태안台安현 동남쪽 20리의 손성자孫城子 지역으로 꼽고 있다. 지금의 요녕성 안산鞍山시 산하의 태안현을 뜻한다. 중국 동북공정 소속 학자들의 비정이 현대판 황국신민들보다는 대한민국 역사에 더 이익이 된다.
한국 학계의 문제는 학생이고 스승이고 간에 공부를 안 한다는 것이다. 공부를 안 하면 관점이라도 올 바라야 하는데 관점은 100년 전의 조선총독부를 추종하는 것밖에 없다. 공부를 안 하니 패거리를 지어야 한다. 그래서 있는 것이라고는 카르텔Kartell(담합,파벌) 밖에 없다. 학계 카르텔에 언론 카르텔!
낙랑군 산하에 열구현列口縣이 있어서 열구현의 위치를 찾으면 낙랑군의 위치를 알 수 있다. 열구현은 열수列水라는 강의 하구에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그 열수에 대해서 〈후한서〉 〈군국지〉는 “곽박이 〈산해경〉 주석에서 말하기를, ‘열은 강 이름이다. 열수는 요동에 있다’(郭璞注, 山海經曰, “列, 水名, 列水在遼東)”라고 말하고 있다. 열수가 요동에 있으니까 열구현도 당연히 요동에 있고, 낙랑군도 요동에 있다. 이때의 요동은 지금의 하북성 일대인 고대 요동을 뜻한다.
▲ 세계 주요 누리망에 접속해 보면 위와 같이 고대에 우리나라 북부는 중국땅이라고 나온다. 모두 조선총독부사관, 동북공정사관을 추종하는 기경량, 안정준, 김재원 같은 '무서운 아이들'의 '혁혁한' 활약 때문으로 풀이된다. |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이 평양에 있다는 1차 사료는 한 개도 없어...
모두 대륙에 있다고 기록...
기씨, 안씨, 김씨, 기득권을 앞세워 힘으로 밀어붙이는 비학문, 유사학자...
그런데 앞서 말한 조선총독부의 〈조선반도사〉는 열수를 대동강이라고 비정했다. 이병도가 이를 그대로 따라서 ‘열수=대동강’이라고 주장하자 그 후학들이 검증 없이 그대로 따라서 현재 한국 강단 사학계의 정설, 통설이 되었다. 이 주장을 펼치려면 〈후한서〉 〈군국지〉의 ‘열수는 요동에 있다’는 기술이 틀렸음을 역사학적 방법론으로 논증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논증과정은 물론 생략이다. 열수가 대동강이라는 사료는 눈을 씻고 봐도 없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니 애나 스승이나 언론 취재를 하면 “논증이 끝났다”면서 토론은 거부한다.
〈후한서〉 〈광무제본기〉 주석은 “낙랑군은 옛 (고)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樂浪郡, 故朝鮮國也, 在遼東)”라고 말하고 있고, 〈후한서〉 〈배인 열전〉은 “장잠현은 낙랑군에 속해 있는 현인데, 그 땅은 요동에 있다(出爲長岑長〔長岑縣, 屬樂浪郡, 其地在遼東)”라고 말하고 있다. 중국의 수많은 1차 사료는 낙랑군은 요동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 토론은 거부하면서 ‘정설, 통설’ 따위 비학문적 주장을 가지고 언론 카르텔을 이용해 사료로 검증해 보자는 역사학자들을 사이비, 유사역사학 등으로 매도하는 것이다.
누가 사이비 역사학자이고, 누가 유사역사학자인가? 아무런 사료도 없이 억지를 부리는 현대판 황국신민들이야말로 애고 스승이고 할 것 없이 사이비 역사학자이고, 유사역사학자이며 해방된 지 71년이 넘은 대한민국에서 조선총독부 역사관 만세를 외치는 이상한 사람들 아닌가?
필자는 한국 사회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가 지식인들의 하향평준화에 있다고 본다. 이런 수준의 역사학자들이 소위 명문대학에 포진해서 정년까지 보장 받고 명예교수가 되어 후학들을 가르치니까 ‘아이들’까지 진실이 무엇인지 밤새 찾을 생각은 하지 않고 공부 안하는 스승들의 총알받이로 나서는 것이다.
스스로 공부안하기는 애들이나 선생이나 한 가지...
역사학계도 하루 빨리 민주화되어야,
71년 동안 역사독점해온 식민사학 걷어낼 수 있어...
그러면 역시 공부가 되어 있지 않은 카르텔 언론들이 무슨 대단한 학자라도 나타난 양 대서특필해주고 이 나라, 이 사회는 점점 망가지는 것이다. 시진핑의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였다”는 발언이 왜 나왔겠는가? 도종환 의원의 문화부 장관 지명에 분개하는 그 마음의 만분의 일만 가지고 있었다면 시진핑 망언 성토 학술대회를 열 번은 했을 것이다.
재야에는 학위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숨은 고수가 많다. 1차 사료를 줄줄 외우는 고수들을 만나면 스스로 조심하게 된다. 학자로서 우스운 사람, 무식한 사람 평가받는 것처럼 수치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황국신민들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지금은 세상이 바뀌었다. 한 사람이 각종 SNS(사회소통망)에 글을 올리면 삽시간에 수십 만, 수백 만 명이 보는 세상이 되었다. 개인이 스스로 학자가 되고 언론인이 되는 세상이 된 것이다. 현재 조선총독부 치하에서나 벌어질 일들이 버젓이 벌어지는 이 퇴행적 현상에 대해 우리 사회의 중요한 부분들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이 깊게 성찰하고, 이 문제를 어떻게 뿌리 뽑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 필자의 후학들은 현대판 황국신민들에 대한 두려움 없이 이 나라, 이 사회를 위한 역사학에 매진할 수 있을 것이다.
글: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출처 | http://www.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2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