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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ID : history_422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대장부★
추천 : 4
조회수 : 3737회
댓글수 : 17개
등록시간 : 2012/04/29 22:44:50
오유인들은 광해군의 재평가가 과대평가 되었고, 무능한 왕으로 평가를 하시는 군요..
그리고 "사일런트힐" 님은 다소 과장되고 왜곡 된 표현이 보입니다.
저 역시 역사 전문가가 아니라서 잘못 된 표현이 있을 수 있으나, 제 생각을 정리해 봅니다.
역사를 바라볼 때 과거의 그때 시점에서 보는 것과,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 있는데요..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고 사대를 하는 그때의 시점에서는 분명 폭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조반정 후, 서인들에 의해 쓰여진 내용은 분명 편파적입니다.
사치스럽고 방탕했으며, 폐모살제와 명나라의 의를 저버린 내용 등은 보는 시점에 따라 다를 수 있는 서술이라 판단 됩니다.
1. 폐모살제는 분명 선조의 잘못에 의해 빚어진 사건입니다.
선조는 조선시대 무능한 왕의 몇 손가락안에 꼽히는 인물입니다.
붕당대립의 발단을 만들고, 동서분당 등 정권다툼만 하다 임진왜란 대비도 못한 채,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피신하던 중 광해군을 세자에 책봉합니다.
전란 뒤, 국가 재건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하나, 제대로 난국을 수습하지 못하고 1606년 영창대군을 낳아서
적자인 영창대군을 세자에 책봉하려고 힘쓰고, 광해군을 폐위하려 했으나 뜻을 못 이루고 1608년에 죽음을 맞이합니다.
세자 문제를 매듭 못짓고 죽을 때 까지 당쟁에 휘말리는 사건만 남기고 사라지는 무책임한 왕이었습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서인과 소북파(북인의 분파)는 영창대군을 왕위에 세우려 모의를 하며,
광해군을 살해하려 하나 실패를 하고, 이에 격분한 광해군이 폐모살제를 시행하게 된 겁니다.
2. 북벌론을 저버리고 북학론을 택함.
대의명분을 저버리고 실리외교를 택한 건 그 시절에는 분명 조선 건국이념에 위배되는 반역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유교와 성리학이념은 1650년 이후, 본격적으로 강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영.정조 때 북학, 서학등 실학이 발달하지만, 정조 이후, 세도정치 때 그 명맥이 약화되어
결국은 일제강점기를 맞는 바탕이 되고 말았습니다.
단순히 중립외교만을 볼 것이 아니라 그 시점은, 명나라가 쇠퇴하는 것을 틈타서 사대주의와 성리학을 배제하고, 북학을 강화하여 실학을 일찍 정착하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는 최적기 였습니다.
명나라의 세자책봉에 인정을 못받아 명나라 사신들에게 뇌물을 주는 빌미를 제공했지만, 그 역시 선조의
대응능력이 부족해서 발생 된 문제입니다.
명나라를 향한 사대가 200년간 조선의 평화를 유지했다면, 전란을 겪은 광해군은 이제 사대의 종지부를 찍을
시대가 왔다고 분명하게 판단했을 겁니다.
그래서, 명나라와 후금과의 살얼음 같은 외교를 실무감각을 살려 잘 이끌었습니다.
청나라와의 외교는 사대주의를 그대로 계승하지 않고, 실리적인 외교정책을 펴면서 작전을 짜고 있는
단계였죠..
유교의 도덕적 가르침은 중요한 덕목이지만, 성리학사상은 한국의 근대사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않는
학문입니다.
현시점에서 바라보면, 인조반정과 청나라와의 외교실패, 성리학 강화는 안타까운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조 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도 북학의 필요성을 강조하다가 비운의 왕세자가 되었죠.
청나라에 열받아 있는 인조에게 성리학을 배척하고 북학을 받아들일 것을 요청했으니...
3. 정치기반의 약화
선조 때 사림파가 득세하고 동서분당으로 대립하던 정치적인 혼란이 광해군으로 이어집니다.
동인은 남인 북인으로 나뉘어 북인의 분파인 대북파 만이 광해군을 지지하며 왕위에 오르나
지지세력이 워낙 약하여 광해군이 원하는 실리외교를 펼치는데 한계가 들어납니다.
영창대군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선조가 죽기직전 영창대군의 세자책봉에 힘쓰고,
서인과 소북파가 그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선조가 죽기직전 세살짜리 영창대군 말고 광해군을 지지만 했어도 정권이 약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리고 사르후전투에서 많은 전사자를 낳고 패전했던 이유를 광해군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사료가 있지만,
광해군은 왜 강홍립에게 비밀리에 지령을 내렸으며, 김응하 등 나머지 장군들에게는 사실대로 얘기 못했는
지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중동이 노무현 대통령을 폄하했다고 해서 후세가 그대로 믿기를 바라십니까?
그 시절 비밀리에 지령을 내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면, 안타깝지만 왕의 칙령과 대의명분을
우선시 했던 그 외 장군들의 이견이 낳은 결과물이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4. 공과 과
왕권강화를 위해 인경궁을 건설하는 것은 분명히 과에 속합니다.
창덕궁을 복구했으나, 풍수지리가의 말을 믿고 인경궁을 짓고 이어(移御)를 결심하고, 또 경덕궁을 건설한 것은 갈팡질팡한 궁궐정책의 실패였습니다.
백성들을 생각하지 않는 너무나 큰 과오입니다.
그러나, 공적 또한 큽니다.
대동법 시행, 동의보감 완성(광해군의 배려가 없었다면 불가능 했음), 전란 뒤 선조가 못다한 국가재건에 힘썼으며, 전쟁대비 안했다고 잘못 알고 있던데 국방경비에도 노력했습니다.
현재 시점에서 볼 때는 당연히 재평가를 받고 역사교과서를 수정해야 합니다.
요즘 국사교과서는 어떻게 가르치는지 잘 모르겠지만, 20여년전에는 분명 폭군으로 가르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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