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語 격언에 ‘차선(次善)은 최선(最善)의 적(敵)’(The good is the enemy of the best)이라는 말이 있다. 결과를 위해 방법과 과정을 문제 삼지 않는 結果主義者들은 最善으로 가기위한 대안을 만들지 않는다. 그리고는 늘 次善을 택한다. 그러나 最善은 오로지 하나 뿐이다.
宗敎도 마찬가지이다. 기복신앙(祈福信仰)이 바로 그것이다. 예수 부활의 영광을 얻기 위한 십자가의 고뇌와 고난은 제쳐놓고, 자신의 축복만을 구하는 것과 같다. 죄에 대한 뼈아픈 회개보다도 죄로 인한 신의 재앙이 내릴까 두려워 안일한 용서만을 구하는 것과 같다.
‘次善’이라는 말도 ‘最善 중의 하나’라는 말도 있을 수 없다. 結果主義者들은 늘 ‘最善은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늘 두 번째, 세 번째 善을 택한다. 같은 의미로 지속적인 次惡의 선택은 결국 最惡으로 수렴될 것이다. 最善만이 필요하다. 次善-次惡은 불필요하다.
남한에는 경선룰을 가지고 怒發大發하는 정치인들은 있어도 북한의 對南도발에 분노하는 정치인은 없다. 북한의 3대 세습이 불가능하다? 이런 식으로 가면 4대 세습도 가능하다. 北인권 문제 신경쓰고 싶지 않고 남북한 분단상태가 편하다는 인간들이 많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