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키노 다카시는 처음에 낙랑무덤을 고구려거라 주장했었고, 도리이 류조는 낙랑것이라 주장했다가 일본주류학계에서 대차게 까임 ( 일본주류학계는 평양일대를 처음에는 고구려유적으로 파악했다는 사실 ) 이후 유적/유물을 발굴하면서 낙랑으로 확신하게 됨. 평양일대를 낙랑으로 조작하겠다는 청사진은 존재한적도 없고, 당시 진행경과를 봐도 말도 안되는 거짓말.
다음은 네이버 부흥카페 현연님의 글 일부인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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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낙랑이 평양에 있었을 가능성을 주장했던 도리이 류조(鳥居龍臧)는 오히려 초기에 이 주장과 함께 일본 사학계에서 비주류로 매도되기까지 하였다. 당시 학계의 주류는 동양건축학가이자 미술사학자였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였는데, 그가 1909년 처음으로 평양시에 위치한 석암리고분군의 벽돌무덤을 조사하였을 때는 이를 고구려 고분으로 규정하였다. 문헌에 따르면 이 지역이 고구려의 영토임에 확실하고, 고구려와 같이 강력한 고대국가는 분명 벽돌무덤을 축조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도리이 류조는 이를 반박하며 석암리벽돌무덤이 낙랑의 유구일 것이라는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그는 청일전쟁 직후인 1895년에 요동 지역을 답사하여 중국과 고구려의 문화가 무덤 양식에서 어떠한 차이를 가지는지 이미 파악함으로써 벽돌무덤은 중국의 양식, 돌무덤은 고구려의 양식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리이 류조는 정식 교육과정을 거치지 않고 교수직에 오른 인류학자였기 때문에 당대 주류를 잡고 있던 세키노 다다시 학파의 인사들에 의해 비주류로 매도되었고, 한동안 석암리벽돌무덤은 고구려의 것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이후 세키노 다다시와 함께 조사에 참여했던 이마니시 류(今西龍)를 시작으로 점차 바뀌게 되었다. 이마니시 류는 1909년 자신이 발굴했던 석암동 을분(乙墳, 당시는 유구의 명칭에 발굴 순서에 따라 갑-을-병-정-... 순의 干자를 붙여 명명했다.)의 출토 유물을 다시 정리하는 과정에서 한 칠기부속금구에 王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것을 발견하였고, 이를 인물의 성으로 파악, 『후한서』에 등장하는 왕중의 가문(後漢書 券第七十六 「循吏列傳 王景傳」, “王景字仲通樂浪䛁邯人也”)과 연결시켜 석암동 일대가 낙랑지역일 것이라는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이후 1911년 야츠이 세이이츠(谷井齊一)에 의해 그 남부 봉산군 문정면에서 태봉리벽돌무덤과 지탑리토성이 발견되었는데, 태봉리벽돌무덤에서 대방태수 장무이의 이름이 새겨진 벽돌(“使君帶方太守張撫夷塼”)이 발견되면서 그 일대가 대방군이었을 것이라는가능성이 제기(이러한 주장은 당대에 있었던 것이고, 본고에서는 일제의 관학자들이 애초부터 평양을 낙랑으로 비정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타율성론을 강화하고자 하는 청사진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는 점을 들기 위해 그 연구 과정을 그대로 밝힐 뿐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두겠다. 기실 대방태수장무이묘의 국적 문제는 2010년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정인성에 의해 고구려의 것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는 본고에서 후술하도록 한다.)되었고,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지탑리토성은 대방군치로 여겨졌으며, 그 북쪽에 있는 석암리 일대가 낙랑군이었을 것이라는 가능성도 짙어졌다. 결정적인 자료는 이후 1913년 세키노 다다시와 이마니시 류가 토성리 토성을 발굴하면서 등장했다. 육군참모부의 지도에서 대동강 남변에 토성리라는 지명을 발견한 그들은 그곳을 답사, 토성을 발견하고 조사 에 착수하게 된다. 결국 그들은 발굴조사 과정에서 낙랑예관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수막새를 발견하였고, 비로소 이 일대가 낙랑지역이라는 인식을 갖게 된 것이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세키노 다다시가 평양지역 전축분(塼築墳, 벽돌무덤)을 고대에 그 지역을 지배했던 실력자 고구려의 무덤으로 파악.
2. 도리이 류조는 만주답사를 통해 고구려는 석축분(石築墳)을, 한은 전축분을 쌓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이를 바탕으로 평양 전축분은 사서에 나오는 낙랑의 것이라고 주장.
3. 도리이 류조의 설이 비주류로 낙인찍히면서 평양 전축분을 고구려의 분묘로 상정하는 학설이 주류설이 됨.
4. 이마니시 류가 석암동 을분에서 출토된 칠기의 금구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王씨 성을 가진 인물의 이름을 발견하면서 이 지역이 낙랑일 가능성을 제시.
5. 야쓰이 세이이츠가 태봉리에서 '대방태수장무이'명 벽돌이 출토된 전축분을 발견하면서 그 일대가 대방지역이라는 확신을 갖게 됨.
6. 세키노 다다시와 이마니시 류가 대동강 남변의 토성리에서 토성을 발굴하면서 낙랑예관명 기와를 발견하게 되었고, 이에 이 지역이 낙랑임을 확신.
즉, 낙랑재평양설은 식민사관의 틀에 맞춰 형성된 것이 아니라 철저히 고고학적 연구방법을 통해 비주류에서 주류로 정립된 학설이다. 야츠이 세이이츠가 태봉리벽돌무덤과 지탑리토성을 조사하면서 남긴 전용 야장을 보면 최대한 고고학적 연구 방법에 의거하여 조사한 과정이 그대로 남아 있고, 그가 친구에게 보낸 엽서(현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정인성이 소장하고 있으며, 그분의 호의로 본 자료를 열람할 수 있었다.)에는 해당 연구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담고 있는데, 이들을 종합해보면 당시 세키노 다다시의 조사단이 식민지설을 보강하기 위해 낙랑을 평양에 위치시키고자 하는 청사진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들의 실증적 조사 과정을 뒤엎을 수 있는 고고학적, 혹은 문헌사학적으로 검증된 자료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현 학계에서 이들의 학설을 아직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