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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잡 '삼천궁녀'라는 내용은 언제부터 등장하나요?
게시물ID : history_2849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힐받지마
추천 : 2
조회수 : 968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7/07/08 12:50:54
방송 중 유시민씨의 의자왕과 관련된 이야기를 듣고 문득 예전 삼국사기를 레포트로 제출한 기억이 있어서 기억을 더듬어 봤습니다.
 
이하 밑에 원문들은 KRpia DB를 통해 찾았습니다.
 
삼국사기
제28권 백제본기 6 의자왕 16년 기사 十六年 春三月 王與宮人 淫荒耽樂 飮酒不止
16년 봄 3월, 임금이 궁녀와 함께 음락과 향락에 빠져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는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6는 의자왕 2년부터 문무왕 5년까지와 김부식 개인의 포폄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만
 
그 중 궁녀 혹은 주색잡기 등에 관련된 내용은 본 내용이 전부였습니다.
 
한편, 삼국유사에서도 의자왕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다음과 같습니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1 태종 춘추공
 
百濟古記云 扶餘城北角有大岩 下臨江水 相傳云 義慈王與諸後宮 知其未免 相謂曰寧自盡 不死於他人手 相率至此 投江而死
백제고기전에서 전하기를 부여성 북쪽 뿔처럼 튀어나온 부분에 큰바위가 있는데, 아래로는 강을 볼 수 있다. 전해져 내려오기를 의자왕이 후궁들과 함께 면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서로 이르기를 자진할 지언정 타인의 손에 죽을 수 없다며 서로 이끌어 강에 투신하여 죽었다. (의역이라 매끄럽지 못합니다)
 
故俗云墮死岩 斯乃俚諺之訛也 但宮人之墮死 義慈卒於唐 唐史有明文
그리하여 속세에서는 타사암이라 부른다. 이것은 그릇된 말이다. 다만 궁녀가 떨어져 죽었더라도 의자왕은 당에서 죽었으며, 당사에 문명히 있는 것이다.
(전 여기서 의자왕의 죽음을 '졸'로 표현했다는 사실이 놀랐습니다)
 
 한국 고대사의 최고 사료들 (두사료가 인용한 원전들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이상은 최고 사료라 생각합니다)에서는 삼천궁녀라는 키워드는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유시민씨의 말처럼 백제본기 6 김부식의 포폄에서 경주 귀족가 출신에서 비롯된 것인지, 혹은 유교주의 사관, 교훈주의 사관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백제를 의도적으로 폄하하는 내용은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김부식의 사관에 대해 '북송의 멸망을 지켜본 김부식의 현실주의적인 정치가의 입장에서 비롯한 유교주의적 사관이다'라는 내용을 끝으로 레포트를 제출하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삼천궁녀'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백제의 멸망을 이끌었던 의자왕을 폄하하고 교훈으로 삼으려는 의도로 기술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혹 '삼천궁녀'라는 기록이 언제부터 등장하였는 지 알 수 있습니까?
 
 
출처
보완
2017-07-08 12:56:19
0
KRpia 고전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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