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주옥같은 촌철살인급 글이다.
꼭들 읽어봐라.
백수색히들 주제에 사고라도 민주적으로 해야 나한테 욕 덜 처먹는다
호주에서 욕쟁이훈남 스티브가
편집시각 2000년01월10일00시14분 KST--------------------------------------------------------------------------------
[정연주칼럼] 새 술은 새부대에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아무 것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그렇게 철저하게 마음을 비우고 진리 탐구에 몰두했던 셈이다. 글을 쓰고, 무엇을 남기고 하는 것도 욕심의 일단이니까.
그렇게 마음이 소박하고, 실제 생활도 검소하기 짝이 없었던 소크라테스가 종종 시장을 찾아가, 번쩍거리는 그릇과 화려한 옷가지 등 이것저것을 유심히 살펴보곤 했다. 한 친구가 이상해서 물었다.
“자네 물건도 사지 않으면서 시장엔 뭣 하러 가는가?”
“이 세상에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이 얼마나 많은지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지. 그리고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이 그렇게 많은 것을 보고는 매번 놀란다네.”
소크라테스 시대의 시장에 이미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들'이 그렇게 많아 매번 그를 놀라게 했다면, 지금 그가 돌아와서 소비의 홍수, 쏟아져 내리는 상품의 산사태를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
소비의 홍수를 몰고 온 원흉의 하나가 쏟아지는 광고, 특히 텔레비전 광고다. 입체적으로 반복적으로 쏘아대는 텔레비전 광고는 “이래도 안 살래?”라며 두 눈을 부라리며 몰아세운다. 국제 환경단체인 그린피스 사무국장을 지낸 바버라 더들리가 `텔레비전 없는 미국' 운동에 열심으로 뛰어든 이유도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텔레비전 광고가 환경을 파괴하는 과잉소비의 촉매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을 한번 끄고 며칠만 지내 보라.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거라고 광고들이 세뇌했던, 그래서 당연히 그럴 거라고 여겼던 물건들이 도대체 무엇인지조차도 생각나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많은 군더더기들, 불필요한 것들을 더덕더덕 온 몸에 걸친 채 살아 간다. 항상 다 채워지지 못하는 소비의 갈증을 느끼면서.
코소보 난민들이 혹독한 추위와 싸우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옷 모으기 운동이 벌어졌다. 엘리베이터에 이런 광고가 붙었다. “옷장 속에 잠자고 있는 옷을 보내 코소보 난민들을 따뜻하게 해줍시다.” 집에 돌아와 옷장을 뒤져보니 대부분이 입지도 않는 옷들이었다. 심한 죄책감이 들었다.
잠자는 옷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어디 코소보 난민뿐이며, 쓰지도 않는 물건이 쌓여있는 곳이 어디 옷장뿐이겠는가? 새 천년을 뜻있게 맞기 위해 불필요한 것들, 군더더기들을 말끔히 정리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개인의 삶 주변 정리가 끝나면, 그 다음에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공동체 건설을 위해 사회의 대청소 길로 나서자. 특히 개혁과 진보를 가로 막고 있는 정치권부터 대청소를 하자.
기회는 오고 있다. 내년 4월 총선에서 확 바꿔버리면 된다. 한탕주의 폭로를 일삼으며 대립과 증오를 심는 공작 정치인들, 사회 구성원들 간의 갈등을 해소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부추키고 불을 질러대는 파괴적인 정치인들, 썩은 악취를 풍겨온 부패한 구악 정치인들, 정권교체를 해놓고도 뒷감당을 못하는 무능한 집권당 정치인들, 고함과 욕설과 악다구니밖에 모르는 함량 미달의 저질 정치인들, 연년세세 무위도식을 해온 `중진들' `거물급들'을 4월 총선에서 큰 빗자루로 확 쓸어버리자.
그것은 당장 해낼 수 있는 선거혁명이며, 바른 사회, 옳은 역사를 위한 첫걸음이며, 민주시민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다. 일단 정치권 청소를 끝내면 그 다음에는 야만적인 권력집단이 돼버린 세습언론과 복지부동으로 제 이익만 챙기는 무능하고 반개혁적인 관료사회를 혁파할 수 있다.
희망의 싹은 보인다. 지역주의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수도권 지역에서 기성 정치인의 재선율이 20%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는 여론조사 결과가 그것이다. 썩은 텃밭을 뒤엎겠다는 민주시민들의 냉혹한 심판의 소리가 저만치서 들린다.
환멸과 절망을 넘어 환희와 희망의 2000년을 위해, 야만과 반이성의 시대를 넘어 지성과 이성의 새 천년을 위해,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자.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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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시각 2000년01월20일18시57분 KST--------------------------------------------------------------------------------
[정연주칼럼] 새천년의 좋은 조짐
후보들이 활발하게 `사전 선거운동'을 하고, 시민단체들이 드러내놓고 낙선운동을 하는 미국의 선거운동은 한국의 선거법을 적용하면 모두 불법이다. 올 11월 7일 총선을 앞두고 수많은 후보들이 오래 전부터 `사전 선거운동'을 해왔다. 대선 선두주자인 조지 부시2세는 지난해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뛰었다. 한국 선거법의 잣대를 대면 모두 불법 사전선거운동이요, 우물안 개구리인 한국언론의 시각에서 보면, 1년여 전부터 요란을 떠는 `조기과열'이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이 `사전 선거운동'과 `조기과열'의 치열한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인물이 떠 오르고, 경쟁력을 갖춘 인물이 살아 남는다. 지미 카터, 빌 클린턴 등 무명의 남부 시골 주지사들이 소속 정당의 기득권 세력을 물리치고 민주당 후보로, 그리고 마침내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사전 선거운동'과 `조기과열'의 예비선거 과정을 통해서였다.
한국 선거법처럼 사전 선거운동 금지 등 온갖 제약이 있는 경우 카터나 클린턴같은 새 인물의 출현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마치 경쟁자들의 시장참여를 근원적으로 봉쇄한 독점업체가 연연세세 독점행위를 즐기는 것과 다를 바없다. 예를 들면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 공식 선거운동기간은 불과 16일이다. 새 얼굴의 등장을 근원적으로 봉쇄하는 제도적 장벽이다. 그러다 보니 얼굴 알려진 인물들이 국회의원으로 대거 진출한다. 텔런트, 가수를 비롯하여 텔레비전에서 얼굴 팔린 인물들, 3공, 5공 시절부터 정치판에서 굴러 먹어온 `중진들' `거물급들', 베스트셀러 소설을 쓴 소설가, 그런 인물들이 냉혹한 검증과정도 거치지 않고 오로지 `얼굴이 알려졌다는 이유'에서 국민의 대표가 된다.
수구언론과 기득권 정치인들이 걸핏하면 내뱉은 `조기과열'도 기득권의 독점체제 유지를 위한 경쟁차단의 논리다. 새 인물을 알리고, 민주주의를 하는 과정은 뜨겁고 시끌시끌할 수밖에 없다. 조용하게 한줄로 서는 것은 독재정권이나 전체주의에 잘 길들여진 노예들의 침묵일 뿐이다. 부정한 선거운동은 투명한 제도를 통해 극복하면 된다.
시민단체들의 낙선운동을 둘러싼 선거법 위반 시비, 이에 대한 일부 수구언론의 보도도 늘 그렇듯이 본말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표현의 자유, 국민의 알 권리와 같은 헌법에서 보장된 기본권의 측면에서 보지 않고 오히려 하위법인 선거법, 그것도 정치적 후진성과 기득권 정치세력의 독점체제를 유지시키는 독소조항이 더덕더덕한 구악 선거법을 준거로 논리를 편다.
“`법을 어겨서라도'라니”라는 매우 훈시적인 제목의 <조선일보> 사설(1월14일자)이 대표적인 것이다. 국민의 기본권을 무시하는 위헌적인 법이니 이걸 먼저 고쳐야 한다는 접근이 아니라, 왜 그런 법을 어기려 하느냐고 오히려 오만하게 꾸짖는다. 수구세력들은 유신시대에도 그랬고, 노조의 정치활동이 불법이던 시절에도 그랬다. 하위법이 헌법에서 보장된 기본권을 박탈하건 말건, 인권을 유린하건 말건, 법은 지켜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 낙선운동은 이들 수구세력의 실체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총선 시민연대가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낙선운동 찬성이 79.8%, 반대가 15.5%, 무응답·잘 모름이 4.7%로 나왔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수구세력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이들이 얼마나 퇴영적이고 반시대적인 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기껏 20%의 크기에 불과하다. 그것은 한국 사회의 가진 자, 강자인 상층부 소득권 20%와 우연히도 일치한다.
이렇게 20%밖에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동안 분단과 냉전구조에 힘입어, 그리고 30여년간 지속된 지역주의에 근거한 세습 정치세력을 등에 업고 우리 사회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해왔다. 그리면서 시민의 기본권 보다는 독점체제를 위한 법질서를 강조해왔다.
그러나 이제 이들 소수가 지배권력이 돼온 시대도 끝나가고 있다. 수구언론의 왜곡된 여론지배와 수구세력의 독점체제에도 금이 가기 시작하는 조짐이 보인다. 새 천년의 좋은 조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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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시각 2000년02월10일21시28분 KST--------------------------------------------------------------------------------
[정연주칼럼] 젊은이들이여, 세상을 바꿔라
뉴 햄프셔 예비선거 취재를 위해 8년만에 그곳을 다시찾았다. 8년전처럼 올해에도 이곳은 하얀 눈이 소담스럽게 대지를 포근히 감싸고 있었다. 인구가 117만명 밖에 안되는 한적한 곳이지만, 4년마다 첫 예비선거가 치뤄질 때 쯤이면 이곳을 찾는 후보들과 자원봉사자들, 기자들로 북적댄다.
미국의 예비선거는 당의 보스들이 밀실에서 대통령 후보를 결정하던 반민주적인 절차를 깨고, 국민의 직접 참여가 필요하다는 개혁의 결과로 이뤄졌다. 뉴 햄프셔도 개혁에 동참했으며, 1920년부터는 전국 최초의 예비선거를 치르게 됐다. 바로 이 `최초의 예비선거'라는 특수성이 이 조그만 주를 정치적 거인으로 만들었다.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바로 그 점에 승부를 걸었다. 뉴 햄프셔의 구석구석을 뒤지면서 114회의 마을집회를 갖는 등 전력투구를 했다. 그 도박은 대성공을 거뒀다. 조지 부시 후보의 대세론을 뿌리채 흔들어 놓았으며, 그여세를 몰아 공화당 후보전에 폭풍을 휘몰아 왔다.
뉴 햄프셔 예비선거가 있기 전, 매케인 진영에서는 아주 재미있는 가설을 하나 퍼트렸다. 이른바 `스웨터론'이다. 스웨터에 큰 구멍이 나면 실이 터지게 되고, 그실의 타래가 풀리기 시작하면 스웨터는 순식간에 풀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난공불락의 성곽같은 조지 부시 후보도 뉴 햄프셔에서 큰 구멍이 나면 스웨터의 실타래가 풀리듯 그렇게 쉽게 허물어질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 `스웨터론'을 받쳐주는 상황인식은, 정치는 생물이며, 특히 선거는 어느 쪽으로 튈지 모르는, 매우 역동적인 특성을 가진 생물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줄지어 계속되는 예비선거전은 시즌 전체의 성적으로 우열을 가리는 리그전이 아니라, 한 수, 한 수가 그 다음 게임을 결정짓는 체스 게임과 같다. 바로 이런 다이나믹한 특성 때문에 한번의 움직임, 한번의 패배가 연쇄반응을 불러 일으키고, 끝내 스웨터가 죄다 풀어져 벌거숭이가 되는 상황까지 발전될 수 있다는 것이다. 20% 포인트 열세에서 불과 며칠만에 극적 반전을 보여 백중세로 돌아선,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의 여론흐름을 비롯하여 지금 전개되고 있는 혼전양상을 보면 이러한 가설과 설명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미국의 예비선거전에서 보이는 이러한 역동적 변화도 한국 시민단체들의 낙선운동이 가져올 폭발력과 그 파장에 비하면 별게 아니다. `중진들'의 자퇴 움직임은 이미 폭발력의 한 자락을 보여준다. 수구언론과 수구세력이 `음모론' 등 온갖 괴이한 논리로 낙선운동을 주저 앉히려 안간힘을 쓰는 이유도 바로 이 엄청난 파괴력과 그것이 몰고 올 무서운 변화 때문이다. 낙선운동은 해방뒤 한번도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채 거의 무한의 세습과정을 거치며 반복돼온 이 사회 수구세력들의 기득권 유지구조를 뒤흔들어 놓고 있다.
이 질풍노도와 같은 시대적 흐름에 맞서는 수구언론과 수구세력의 저항은 거의 동물적 보호본능처럼 보인다. 그러다 보니 일관된 논리도, 합리적인 근거도 없다. 수구언론의 음모론 보도를 한번 보라. 황색주간지처럼 증거도, 실체도 제시하지 못한채 그저 정략적으로 몰아가기에 여념이 없다. 게다가 그들 자신들의 `대통령 만들기'는 아무렇지도 않으면서 시민단체의 권리행사는 `과잉정치 행위'라고 비난한다. 유신독재 시절에도 유신에 저항했던 교수와 목사를 `정치교수' `정치목사'라 했다. 새 천년, 새 시대라고 야단법석을 해놓고, 정작 하는 소리는 아직도 케케묵은 옛것들이다.
그러나 낙선운동은 수구언론과 수구세력들이 야합하여 함께 입고 있는 스웨터에 이미 커다란 구멍을 냈다. 이제 남은 일은 지역주의와 수구언론의 요설에 함몰되지 않은 젊은이들이 “바꿔, 바꿔, 모든 걸 다 바꿔”를 신나게 부르면서 투표장으로 달려가는 일이다. 그래서 저 수구언론과 수구세력의 몸둥이를 감싸고 있는 허위와 오만과 강자의 논리를 죄다 풀어 헤쳐 그들을 발가숭이로 만들면 된다. 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젊은이들이여, 세상을 바꾸라.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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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시간 2000년03월23일18시35분
한겨레/ 사설·칼럼/ 정연주 칼럼
[정연주칼럼] 유토피아로 가는 길
“모든 주민은 하루 6시간씩만 일하면 된다. 허랑방탕한 소비만 일삼는 귀족과 부자들까지 모두 생산에 참여하면 하루 6시간 노동으로도 필요한 것을 생산하기에 충분하다. 생산된 물품은 병들고 약한 자들에게 먼저 나눠주고, 나머지는 골고루 나눈다. 잉여물자가 있으면 기근이나 역병으로 고통당하는 이웃나라 주민들과 나눠 갖는다. 금, 은과 같은 귀중품은 변기 등 하찮은 것을 만드는 데 사용한다. 그렇게 하찮은 데 쓰이니, 탐할 이유도 없다.”놀고 먹는 유한계급이 존재하지 않고, 병들고 힘없는 사회적 약자에게 우선권을 주는 가슴 뜨거운 공동체. 금 은과 같은 귀중품을 변기 만드는 데나 사용하는, 물신주의에서 해방된 이 멋진 신세계 모습은 16세기 영국의 인도주의자 토마스 모어가 그린 <유토피아>에 나오는 장면들이다.
`유토피아'라는 말은 토마스 모어가 이상향으로 그린 가상의 섬에 붙힌 이름이다. 그리스 말로 `아니오'를 뜻하는 `ou'와 '장소'를 뜻하는 `topos'가 합쳐진 말로, 어원 그대로 풀이하면 이 세상에 `없는 곳'이다.
토마스 모어는 16세기 당시 영국의 처참한 사회경제적 조건을 신랄하게 비판한 뒤, 이와 철저하게 비교되는 세상 저 편의 이상향을 그렸다. 지금부터 거의 500년 전인 1516년 일이다. 그런데 500년의 세월이 지났어도, 그가 그린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이 세상에는 없는 꿈의 나라로 여전히 남아있다. 인간의 탐욕과 지배욕이 존재하는 한, 그 꿈의 나라에는 아마도 영원히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유토피아로 향하는 걸음을 멈출 수는 없다. 인간의 역사는 그것을 조금이라도 개선해 보려는 이들의 끊임없는 희생과 투쟁을 통해 진보돼왔다. 가령 미국의 흑인 권리는 35년전 미국 앨라바마주 셀마에서 있었던 그 처절한 `피의 일요일'을 비롯한 끊임없는 민권투쟁을 통해 확대돼왔다.
한국에도 수많은 이들의 죽음과 고통과 희생이 썩은 밀알이 되어, 박정희·전두환 군부독재 정권의 혹독한 억압을 넘어서게 했으며, 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정권을 거치면서 언론자유를 비롯한 민주주의의 확대를 가져왔다. 그것마저 부정하는 무리가 있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과거 군부독재 정권에 짙은 향수를 느끼거나, 원초적 본능처럼 돼버린 지역감정 또는 `반 디제이 감정'이라는 블랙홀에 매몰되어, 사물을 온전하게 보지 못하는 <조선일보>류의 뒤틀린 수구세력들일 것이다. 이들은 민주화를 위해싸운 이들에게는 잔인하리만치 혹독하면서도, 가해자들에게는 너그럽기 그지없다. 그들 자신이 가해자이기 때문일 터이다.
이들은 이번 총선마저도 `디제이 정권 중간평가'로 휘몰아 간다. 그렇게 되면 총선은 국민을 대표하는 `인물'을 뽑는 게 아니라 `당파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 한국 정치풍토에서 그런 싸움은 지역주의의 불길에 휘발유를 뿌리는 짓이다. 지금 전국에 휘몰아 치고 있는 저 지역주의의 미친 바람을 보라.
세계는 지금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무섭게 변하고 있다. 개혁과 변화의 봇물이 사방에서 터지고, 무한정으로 쏟아져 나오는 정보는 광속도로 교환되며, 새로운 기술은 용암처럼 분출한다. 이처럼 정보와 기술이 대폭발을 하는 시대에, 한국에는 우물안 개구리같은 수구논객들과 거짓 지식인들, 썩은 정치인들이 그 좁은 우물 안에서 옹졸한 지역주의와 당파싸움을 부채질하면서 바글거린다.
이번 총선은 당연히 이 무서운 변화의 시대에 인간의 따스한 체온이 담긴 비전을 제시할 수 있고, 이를 위해 경직되고 닫힌 한국 사회를 유연하고 열린 사회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인물'을 뽑는 기회가 돼야 한다. 최선의 선택이 없다면 차선으로 `낡은 인물' 대신 `새 얼굴'을 뽑으면 된다.
지역주의의 미친 바람이 휘몰아 치는 지금, 그래도 희망이 있다면 유권자의 57%에 이르는, 지역주의에 덜 함몰된 20, 30대 젊은 유권자들이다. 그들마저 미친 바람을 잠재우지 못한다면, 유토피아의 반대편 암흑시대로 뒷걸음질 치는 것 외에 무슨 선택이 남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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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시간 2000년04월13일19시50분
한겨레/ 사설·칼럼/ 정연주 칼럼
[정연주칼럼] 평화의 씨앗을 심자
미국 공화당의 강경파들을 비롯하여 미국내 극우파들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을 문자 그대로 증오한다. 그 증오심이 극에 달해, 사사건건 클린턴 결정을 물고 늘어진다. 그 증오심은 탄핵소추 때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이 클린턴 증오심도 한국의 `디제이 증오심'을 생각하면 별게 아니다. 40년 가까운 세월동안 지속된 영남정권 아래 만들어진 지역감정의 실체는 그 속을 들여다 보면 `디제이 증오'가 한 가운데 똬리를 틀고 있다. 이번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반 디제이' 깃발 하나로 영남을 휩쓸고 있는 것을 보면 클린턴 증오심도 디제이 증오심에 견줄 바가 못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6월이면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다. 기적같은 일이다. 증오 대결 불신의 장막을 걷고 화해 협력 신뢰의 새 역사를 펼 수 있으며, 그래서 나에게 플러스가 너에게 마이너스가 되는, 증오의 `제로 섬' 관계가 아닌, 남북모두가 살 수 있는 `윈-윈' 관계로 전환시킬 수 있는역사적 계기가 가능하다. 이 기적같은 민족의 큰 일이 종말적인 지역주의와 디제이 증오심에 바탕을 둔 당파싸움으로 망쳐질까 두렵다.
그러나 총선이 끝났으니 정말 다행이다. 이제는 이성과지성까지 몽땅 마비시키는 지역주의의 미친 바람이 휘몰아치는 선거 굿판도 당분간 없을 것이고, 수구 보수언론의눈치를 살피며 엄격한 상호주의를 적용해야 할 필요도 없게 됐다. 이제 김대중 대통령은 역사와 민족이 요구하는평화심기에 전념하면 된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고, 평화의 씨앗을 심고, 그 씨앗을 키우는 일에 전념하면 역사와 민족의 축복이 저절로 온다. 그 축복의 부산물로 자연스럽게 정권이 재창출될 수도 있고, 노벨평화상이 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목표로 일을 도모하면 그 순간 일은 헝크러지고 망가지게 된다.
남북 정상회담이 성공을 거둘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시점에 몇가지 지적하고 싶은게 있다. 첫째, 기업적 접근이 필요한 경제협력 사업과 그냥 사랑을 베푸는 인도적지원을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 인도적 지원에 이런 저런계산이 개입돼서는 안된다. 상호주의가 개입하거나, 정치적 계산이 들어 가면 그것은 참다운 인도주의가 아니다.강경 보수주의자였던 로날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조차도 “굶주림은 정치를 모른다”며 소련 위성국이었던 이디오피아에 대기근이 발생했을 때 대규모 인도적 지원을 했다. 허기진 배를 웅켜쥐고 있는 북녘 어린이들의 저 퀭한 절망의 눈빛을 생각하면서, 지금 당장 식량과 비료를북에 보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의 손길은 평화의 씨앗이 된다.
그러나 기업적 경제협력 사업은 꼼꼼히 따지며 추진해야한다. 그래야 뒷탈없이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윈-윈 상황을 만들 수 있다.
둘째, 말을 아껴야 된다.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이 최근 뱉어 놓은 말들을 보면, 어이가 없다. 하지 않아도 되는 내용들을 왜 그렇게 미주알 고주알 죄다 풀어 놓는지 이해가 안된다. 그것은 앞으로 있을 민족적 대협상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엄청난 해를 끼칠 수도 있다. 국민에게 알려야 하는 것은 정확한내용이지, 가십성의 미주알 고주알이 아니다. 협상은 혼자 하는게 아니다. 상대도 헤아려야 한다. 하찮은 일같지만, 그 하찮게 보이는 일들이 큰 일을 망칠 수도 있다.
셋째, 국민들에게 지나치게 부푼 기대감을 갖도록 해서는 안된다. 북한과의 일이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기대만 잔뜩 부풀어 놓았다가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실망과 원망밖에 돌아오는게 없다. 중요한것은 <워싱턴 포스트> 사설의 지적처럼 `결과'다. 그결과는 결코 쉽게 오지 않는다.
북한과의 관계에서 진정 필요한 것은 인내심과 차분한 마음, 일관성이다. 일희일비하는 등 감정의 회오리에 휘말리면 아무일도 성사시킬 수 없다. 정부 뿐 아니라 모든 국민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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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사설·칼럼/ 정연주 칼럼
[정연주칼럼] 지역감정의 슬픈 풍경
한나라당이 영남에서 싹쓸이를 한 뒤 나와 출신지역이 같은 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가 이번에 디제이를 아주 혼줄 내줬데이.” 그의 목소리는 의기양양했다. 그렇게 “디제이를 혼줄 내준” 이번 총선을 가장 뭉뚱그려 보여준 사건은 `바보' 노무현의 낙선과 반인권의 상징적 인물인 정형근의 70%가 넘는 압도적 득표였다. 가슴이 에이는 슬픈 나라의 풍경이다.
노무현과 정형근
얼마 전 어떤 자리에서 몇몇 미국인들이 총선 결과에 대해 물었다. 디제이가 파산 직전의 한국 경제를 되살리고, 남북 정상회담을 여는 등 그랜드 슬램을 쳤는데, 왜 그렇게 됐느냐고 물었다. 총선 며칠 전 <월스트리트저널>도 “한국의 눈부신 경제회복도 총선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도와주지 못하고 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지역감정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한 한국정치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밖에 달리 할말이 없었다. 그들이 어떻게 “디제이를 혼줄 내줬대이”라는 말의 진정한 뜻과 그 말에 담긴 온갖 감정의 회오리들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영남 싹쓸이에 힘입어 한나라당은 다시 제1당이 됐고, 그 승리의 열기에 취한 탓인지, 이회창 총재는 대통령 자리가 손에 잡히기라도 하듯 대통령 중임제 개헌 얘기도 했고, 부산에서는 “대통령, 이회창”의 연호도 터져나왔다. 그즈음 인터넷에는 “이회창씨는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 뭐, 총선승리가 자기 이름으로 청와대를 가등기한 것과 같다고? 영남에서 승리한 것말고는 다른 지역에서는 다 패했잖어”라는 글이 올랐다.
대통령 중임제 개헌, “대통령, 이회창” 연호 등을 보면서 94년 미국 중간선거 뒤의 풍경이 떠올랐다. 뉴트 깅그리치가 이끄는 공화당은 상원에서 9석, 하원에서 무려 54석을 더 얻어 상하원을 완전히 장악하는 큰 승리를 거뒀다. 공화당이 다수당이 되면서 하원의장으로 등극한 깅그리치는 한걸음 성큼 나아가 실질적인 대통령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오만과 독선은 끝내 95년말 연방정부의 부분폐쇄로 이어졌으며, 그것은 깅그리치 몰락의 시초가 됐다.
대통령 중임제 개헌 운운과 “대통령, 이회창”의 연호 풍경에서 뉴트 깅그리치같은 오만의 그림자를 보게 된다.
`바보' 노무현의 낙선, 반인권의 상징적 인물인 정형근의 압도적 득표 등 2000년 한국의 모습을 참담하게 만든 일들에도 불구하고 이번 총선은 또한 많은 희망의 씨앗을 뿌린 것도 사실이다. 시민연대의 낙선운동이 상당한 효과를 거뒀고, 386 세대를 비롯한 새 얼굴들이 많이 등장했으며, 20~30년 한국 정치를 쥐락펴락해온 낡은 고물급 중진들도 많이 정리됐다.
그리고 `바보' 노무현의 낙선도 절망만 할 일도 아닌 것 같다. 지역주의의 처참한 희생이 더 `큰것'을 위한 거름이 될 수도 있다. 부활절을 보내면서 문득 그의 `정치적 부활' 장면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종교적 의미를 빼버리면, 그는 `한국 정치판의 예수'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예수가 자신이 태어난 유대 땅에서 박해를 받고 끝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던 것처럼, 노무현도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박해를 받고, 낙선의 십자가 형을 받았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그러나 그가 지역주의라는 무덤에서 다시 몸을 벌떡 일으켜 `정치적 부활'을 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의 정치적 부활은 같은 지역에서 70% 이상의 압도적 득표를 한 정형근 의원과의 대칭관계, 지역주의의 부분적 극복, 새로운 세대의 새 정치 가능성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지역주의 싹쓸이에 대해서도 너무 절망하지 말자. 모순은 아주 바닥까지 완전히 곪아터져야 청산과 극복이 가능하다. 이번 총선은 지역주의 싹쓸이의 모순이 얼마나 심하게 곪아 있는지를, 그래서 그 더러운 냄새가 온 세계로 번져, 이제 한국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웬만큼은 알게 될 정도가 됐다. 이만큼 썩고 곪았으니, 청산과 극복의 날도 그만큼 다가선 게 아니겠는가?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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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시간 2000년05월25일18시13분
한겨레/ 사설·칼럼/ 정연주 칼럼
[정연주칼럼] 가슴 설레는 귀국
1960, 70년대의 가장 위대한 팝 듀오로 알려진 사이몬과 가펑클의 노래 가운데는 `스카보로의 장터' `침묵의 소리' `복서' 등 탁월한 명곡들이 많다. 그들의 노래가 많은 이의 가슴을 절절하게, 때로는 포근하게 감싸는 까닭은 그 가락과 노랫말이 주는 감동에 더하여 그들이 엮어내는 완벽에 가까운 화음 때문일 것이다.
지금 초로에 접어든 세대들은 25년 전쯤 보았을 <졸업>이라는 영화에서 사이몬과 가펑클이 불렀던, 수채화같은 노래들을 떠올리면서 젊은 시절의 아련했던 추억들을 되새기는 경험을 했을 법하다. <졸업>의 음악을 담은 레코드 표지에 실렸던 사이몬과 가펑클의 사진은 장난 꾸러기 소년같은 모습이었다. 그뒤에 나온 음반의 표지에도 그들은 늘 싱싱하게 젊었다. 그런데 최근 의 주말 인기프로인 `토요일 밤' 25주년 기념프로에 나온 사이몬은 많이 늙어 있었다. 사이몬과 가펑클, 둘다 41년 생이니 내년이면 환갑이다. 세월은 그렇게 흘러갔다. 사이몬과 가펑클을 빌어 세월 얘기를 끄집어 냈지만, 그게 어디 그들만의 얘기겠는가?
18년간의 이방인 생활
20년 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내가 수배를 당하던 기간중 부모님이 미국 텍사스에 있는 형님네로 떠났다. 나이 많으신 부모님을 영영 다시 뵐 수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배웅조차 할 수 없었다. 신군부의 그들은 공항까지 쫓아 나와 나를 찾고 있었다. 다음해 부모님은 텍사스 땅에서 모두 세상을 떠나셨다. 18년 전 나는 아내와 여덟살, 다섯살 짜리 두 아들을 데리고 텍사스로 향했다. 부모님 묘소에 참배하고, 몇년간 공부한 뒤 귀국하겠다던 그 발길이 무심하게도 18년의 세월이 돼버렸다. 그때 다섯살이었던 둘째 아들이 며칠 전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나는 이제 18년의 이방인 생활을 접고 그리운 땅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다.
18년간 미국 생활에서 잃은 것도 많았지만, 배우고 얻은 것 또한 많았다. 숲밖에 나와 보니 숲의 전체 모습이 더 잘 보이듯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윤곽이 멀리서 더 잘 보일 때도 있었으며, 오래 살면 살수록 이 큰 땅덩어리의 미국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절감한 때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한국의 문제는 대부분 땅이 좁아서 생긴 것이라는 게 내가 얻은 결론이다. 냄비 끓듯 하는 사회적 분위기, 마음의 여유없이 내달리는 급한 성격, 서울대 지배구조를 비롯한 온갖 독과점 체제, 나라를 갈기갈기 찢는 지역주의, 다른 인종에 대해 유난히도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편협한 마음…. 이 모든 게 좁은 땅에서 바글바글 거리며 사는 환경 조건에서 빚어진 것들이다. 그것은 결코 민족성이니, 민족의 품성이니 하는 결정론적인 게 아니라, 좁은 땅덩어리와 밀집된 인구, 정치적 폭압 등과 같은 환경과 조건이, 그 가운데서도 남과 북의 허리를 동강내어 대륙으로 뻗는 민족의 기운을 잘라 놓은 38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11년 전 <한겨레> 워싱턴 특파원으로 부임하기 전 텍사스에서 7년 가까이 살면서 중늙은 나이에 경제학 공부를 했다. 그 기간동안 나는 자동차 클랙션 소리를 거의 들어 보지 못했다. 미국 사람들은 마음의 여유가 있어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나중 뉴욕에 가보니 그게 아니었다. 서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텍사스 사람들이 경적을 울리지 않은 것은 광할하기 그지 없는, 넓디 넓은 땅 때문이었다. 길도 넓고 주차장도 만주 벌판같으니, 경적을 울릴 이유가 없었던 것이었다. 품성이 아니라 환경과 조건이 빚어낸 것이었다.
균형잡힌 시각 배워
미국은 그 넓은 땅 크기와 많은 인종만큼이나 다양하고 복잡한 여러개의 얼굴을 가진 곳이다. 그러기에 미국을 하나의 얼굴을 가진 것으로 일반화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그들의 사회체제에는 배울 점도 많이 있으며, 그들의 미국 제일주의와 패권주의에는 비판받고 극복돼야 할 오만과 독선 또한 많다. 실체와 전체를 보면서 균형된 시각으로 미국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18년간의 미국생활에서 얻은 것이다.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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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시간 2000년06월15일18시22분
한겨레/ 사설·칼럼/ 정연주 칼럼
[정연주칼럼] '김정일 쇼크'의 책임
푸른 포풀라가 줄지어 서 있었다. 그 주변으로 한 무리의 참새 떼가 소슬한 초가을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고 있었다. 1994년 9월초,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해 입국수속을 밟은 뒤 공항 밖으로 나온 내 시야에 들어온 첫 북한 풍경이었다. 어릴 적 고향 들녘에서 늘 볼 수 있었던, 그렇게 정겹고 안온한 풍경이었다. 공항을 나와 평양시내로 들어 가는 길 양쪽으로 이제 막 수업을 끝내고 재잘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초등학교 아이들 모습도 보였다. 어릴 적 나의 모습, 내 동무들의 모습 그대로였다.
산하도, 사람도, 그렇게 남쪽과 하나 다를 바 없었다. 직접 가서 본 북녘 산하의 모습에서, 그리고 지난 11년 동안 <한겨레> 워싱턴 특파원으로 있으며 경험했던 많은 북한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나는 하나 다를 게 없는 '우리'를 수없이 절감하고 확인했다.
그렇게 같은 우리를 다르게 만든 것은 지난 50여년간 한반도를 압살해 온 소모적인 냉전 대결과 그 체제를 떠 받들어온 이데올로기였다. 사람이 사람으로 만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이데올로기와 냉전 대결은 남과 북 모두의 사람들 눈을 멀게 하고 마음을 포악하게 만들었다.
`역사적'이라는 말로도 그 엄청난 뜻을 다 담을 수가 없는 김대중 대통령의 북한 방문, 그리고 김대중-김정일 두 정상의 만남에서 우리는 이데올로기와 냉전 대결이 만들어 낸 고정관념들이 얼마나 참담하게 우리의 눈을 가리고 시야를 왜곡했는지를 생생하게 보았다.
`김정일 쇼크'로 불리는 일련의 현상들은 이를 너무나 극적으로 보여줬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웃으며 야유한 `은둔자 김정일'도, 그리고 지극히 당연한 현상으로 보는 북한의 폐쇄성과 고립도, 따지고 보면 절반의 책임은 미국을 비롯한 바깥에 있다. 한국전쟁 뒤 지금까지 계속돼 온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와 온갖 고립·포위정책은 북한을 바깥으로부터 고립·폐쇄시켜 왔다. 그렇게 해놓고 개방과 개혁을 요구한다는 것은 밖에서 문을 잠궈 놓고 문을 열고 나오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김대중 대통령의 북한 방문은 왜곡된 냉전식 고정관념을 깨고, 닫힌 마음을 열게 했다. 붕괴되기를 원하는 희망섞인 시선으로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북한을 보아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상대방을 인정해야 한다는 깨우침도 줬다. 그렇게 상대방을 인정하는 것이 화해 협력 평화공존 통일을 위한 첫 걸음이다. 두 정상의 굳은 악수와 역사적인 공동선언문은 세계앞에서 상대방을 인정하는 공식 확인이었다.
그렇게 상대를 인정함으로써 대결과 증오의 사슬을 끊고, 함께 살아가고 함께 번영하는 `통일과정'의 길목에 들어설 수 있다. 통일은 단번에 하나가 되는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화해 협력 교류 평화공존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동적인 과정의 집적이며, 그 결과로 마침내 하나로 융합되는 질적 변화의 적분이다.
이번 김대중 대통령의 북한 방문을 계기로 폭발한 민족적 열망과 에너지는 남과 북을 그러한 통일과정에 성큼 들어서게 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인내심을 갖고 차근차근 평화정착과 교류 협력 화해의 통일과정을 밟아가는 일이다.
그 길 위에서 남쪽은 휴전선으로 단절된 길을 뚫어 민족의 기운을 대륙으로 뻗게 하고, 북쪽은 활달한 남행 길을 넘어태평양으로 치달아야 한다. 그 길을 위해 서로 돕고 협력하면 남과 북은 모두 승자가 된다. 이 단순하고도 쉬운 이치를 우리는 그동안 이데올로기의 독약에 취해 증오하고 대결하면서 잊고 살아 왔다.
그 독약 같은 이데올로기도 이제는 거의 소멸된 상태다. 남들은 저마다 제 나라의 국가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이때 우리만이 빙하시대의 유물을 붙잡고 늘어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기에 저 어리석은 죽음의 무기들을 녹여 평화와 생명의 쟁기로 만드는, 생각과 접근의 대전환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게 남과 북 모두가 사는 길이다. 이번 정상회담은 그리로 가는 길을 터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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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시간 2000년07월06일18시52분
한겨레/ 사설·칼럼/ 정연주 칼럼
[정연주칼럼] 가지지못한 자들의 울음
미국의 진보적인 역사학자 하워드 진 교수(78살)는 역사의 진보를 원하는 미국인들 사이에서 노암 촘스키 교수와 함께 널리 존경받는 인물이다. 1980년 출판된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미국 민중사>는 미국역사를 보는 시각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혁명적인 것이었다.
뉴욕시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찢어진 가난속에서 자란 그는 일찍부터 정의와 평등 문제에 눈뜨게 됐다. 부두 노동자로 일하면서 명문 콜롬비아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그는 관념만이 아닌, 온 몸으로 현장에 참여한 진정한 지성인으로 꼽힌다. 흑인이 `사람'이 아니었던 50년대 중반, 그는 인종차별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있었던 남부 조지아주 애틀란타의 흑인대학에 '백인' 역사학 교수로 부임했다. 거기서 그는 참담한 흑백차별의 현장을 목격했으며, 그뒤 흑인들과 함께 민권운동의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이 때의 경험을 비롯하여 그가 살아 온 얘기를 모은 자전적 저서인 <움직이는 열차에서 중립은 없다>는 많은 이들에게 깊은감동과 삶의 지침을 줬다. 민권운동가인 매리안 에델만은 그를 가리켜 “나에게 삶과 희망, 정의를 가르쳐 주는 영원한 스승”이라고 말했다.그는 매리안 에델만에게 뿐 아니라 나에게도 큰 스승이다. 직접 만나본 적은 없으나, 그의 저서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자주 그의 책을 참고서처럼 뒤진다.
그 울음에 귀기울지 않는다면
지난해 나는 이 난에서 그의 저서중 한 귀절을 인용한 적이 있다. 그리고 최근 귀국하여 여러 일들을 보면서 그 귀절을 다시 되새기게 된다. 특히 의료파업의 수습과정과 롯데호텔 노동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해산과정, 그리고 폭풍처럼 다가서고 있는 금융파업의 위기를 보면서, 그 귀절이 다시 커다란 울림으로 가슴에 와 닿는다.
“가난한 자들, 가지지 못한 자들의 울부짖음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울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당신은 영원히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노동자들의 파업과정에서 우리는 `항상 옳지만은 않는 것들'이 있음을 보아왔다. 밤 12시가 넘었는데도 꽹과리를 치며 고함을 질러대는 무례도 있고, 때로 중간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곧바로 파업으로 치닫는 조급함도 있으며, 회사 간부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과격도 있음을 전해 들었다. 그런 일들은 노조의 대중성과 도덕성을 훼손시키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지 못한다면, 하워드 진 교수의 지적처럼 우리는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게 된다.
이번 롯데 호텔 노동자들의 파업해산 과정은 참혹했다. 그들은 마치 짐승처럼 그렇게 두들겨 맞고 피투성이가 된 채 질질 끌려갔다. 그 참혹한 모습은 의료파업 또는 일부 `힘센 노조들'의 파업 해산과정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다. 게다가 그들의 생존적 절규마저도 집단 이기주의의 이름아래 매몰돼 버렸다. 어떻게 보면 롯데 호텔 근로자들은 악덕 기업주의 부당한 수탈행위 뿐 아니라 실제로 집단 이기주의의 탐욕을 보인 가진 자들, 힘센 자들의 집단행위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생명을 인질로한 의료파업,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일부 `힘센 노조들'의 과욕, 그러한 것들로 인해 진정 보호받아야 할 약자들의 생존적 부르짖음마저 집단 이기주의로 매도됐기 때문이다.
한걸음씩 물러서서
민족주의도 힘센 자의 그것과 약한 자의 그것은 분명 다르다. 압박을 받는 약소국의 민족주의는 독립과 자존을 위한 투쟁의 근거로 정당하나,힘센 나라의 민족주의는 파시즘 또는 제국주의의 근거가 되는 것을 역사를 통해 보아왔다. 마찬가지로 노조나 집단의 투쟁도 모두가 같은 것은 아니다. 생존을 위한 약자들의 몸부림이 있는가 하면,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강자들의 탐욕도 있다. 아무런 완충지대없이 서로의 이해관계가천둥 번개처럼 무섭게 부딪치는 요즘의 사태를 보면서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위해 모두가 한 발자욱씩 뒤로 물러 설 수는 없는지 안타깝기 그지없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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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시간 2000년07월27일18시23분
한겨레/ 사설·칼럼/ 정연주 칼럼
[정연주칼럼] 타조의 세계
타조는 생존해 있는 조류 가운데 가장 큰 새다. 수컷의 키는 2.5m에 이르고, 몸무게도 155㎏나 된다. 이렇게 덩치가 크고 몸이 무겁다 보니, 새인데도 날지를 못한다. 날지 못해 하늘 높이서 세상을 넓게 멀리 내다 보지 못한 탓인지, 우둔하게 행동한다. 위험에 부딪치면 목을 쭉 뻗친 채 땅에 납짝 엎드리거나 모래 속에 머리를 처박는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위험상황이 없어지는게 아닌데도, 저만 안보면 위험은 사라지는줄 아는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영어표현에 `타조처럼 머리를 모래 속에 처박는다'는 표현이 있다. 주변 상황을 무시한 채 눈감고 아웅하는 행동을 가르킬 때 쓴다.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주변은 도무지 아랑곳않고, 오로지 제 이익만 챙기고, 제 것만 고집하는, 타조같은 무리들을 많이 보게 된다. 국가미사일방어(NMD)체제를 고집하는 미국이 우선 그렇다. 다른 나라들의 반대와 저항에는 눈도 꿈쩍 않는다. 레이건 전 대통령의 공상영화 얘기같았던 `별들의 전쟁' 축소판인 이 미사일방어체제는 국방비 증액을 노리는 강경파들, 특히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조지 W 부시를 비롯한 공화당내 강경파들이 북한 미사일 위협을 과장 확대하면서 적극 추진해왔다. 독일 프랑스 등 유럽 나라들이 반대하고, 중국과 러시아가반대하는데도 이들은 아랑곳 않는다. 미국 제일주의라는 오만에 빠져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이해만 좇는 이들의 모습이 모래 속에 머리를 처박은채 주변은 도무지 헤아리지 않는 타조와 무엇이 다른가 싶다.
모래 속에 머리박은 타조들
나라 안으로 눈길을 돌리면, 도처에 타조족들이 우글거린다. 혐오집단이 돼버린 자민련을 서로 끌어 안으려고 격투를 벌이는 난장판의 정치판, 폭주족의 난무가 상징하는 이 무질서한 사회, 자신의 이익극대화를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은 척박한 심성들. 모두가 주변은 아랑곳않고머리를 모래 속에 처박고 있는 우매한 타조의 모습들이다. 정치권을 한번 보자. 소수 여당인 민주당은 숫적 열세라는 구조적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역겨운 `제이피 정치 놀음'의 꼭둑각시가 돼버렸다. 그런 가운데 마땅히 지켜야 할 원칙도, 가치도 내팽개치고, 숫적 열세라는 그 모래 더미 속에 머리를 처박은 채 박정희 기념관 건립, 날치기 등의 어처구니 없는 짓들을 하고 있다. 차라리 공동정권을 포기하고, 소수 여당으로 당당하게 나가는게 더 떳떳하다. 개혁법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그것이 야당의 일부 젊은 양심세력의 도움을 얻어 통과되면 다행이요, 통과되지 못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처럼 자민련에 질질 끌려 다니며 지켜야 할 원칙과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국민과 역사 앞에 당당한 일이다.
야당인 한나라당은 잃어버린 권력을 되찾는 그 당리당략의 모래 무덤에머리를 처박고 다른 것은 도무지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남북 정상회담으로 열린 화해와 평화공존의 기운 조차도 사사건건 당리당략으로 묶어 버린다. 그러다 보니 민족의 미래를 위한 비전이나 경륜보다는 과거의 파괴적인 대결정치 행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퇴행성 구태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청와대 친북세력' 따위의 치졸한 발언도 나왔다. 과거의 소모적인 냉전대결 의식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그런 퇴행성으로는 민족의 새로운 미래를 맡을 자격이 없다. 미래를 지향하지 않고 과거에 집착하는 집단에 어떻게 이 엄혹한 세계화 시대에 온 민족의 미래를 맡길 수 있겠는가?
우매한 껍질을 벗어야
오만과 당리당략과 소수정권의 콤플렉스라는 모래더미 속에 계속 머리를처박고 있다가는 끝내 남에게 잡혀 먹히는 신세가 되고 만다. 생존을 위해, 그리고 생존을 넘어 더 넓은 세상을 보기 위해, 타조의 껍질을벗고 높은 하늘로 훨훨 날아 가야 한다. 거기서 민족과 세계의 앞 날을 내다 봐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온 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탐욕과 오만과 편협한 냉전대결 의식의 비게 덩어리를 떼내야 한다. 그렇지않고는 영원히 땅을 기어 다니며 모래에 머리를 처막는 타조일 수밖에 없다.
논설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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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시간 2000년08월17일18시32분
한겨레/ 사설·칼럼/ 정연주 칼럼
[정연주칼럼] 헬렌 켈러와 조선일보
헬렌 켈러. 생후 19개월 되던 때 심한 병을 앓은 뒤 보고, 듣고, 말하는 기능을 모두 잃어버렸다. 6살때부터 앤 설리번 선생(당시 20살)으로부터 헌신적인 교육을 받았다. 설리번은 헬렌 켈러의 손바닥에 수화 알파벳을 가르쳤으며, 자신의 후두에 손가락을 닿게 하여 진동을 느끼도록 함으로써 말을 `듣도록' 했다. 이러한 헌신적인 지도와,농아학교 교육을 통해 헬렌 켈러는 수화를 익히고, 점자도 읽고 쓸 수 있게 됐다. 스무살되던 해 그는 하바드 대학 자매학교인 명문 래드클리프 대학에 입학했으며, 설리번 선생이 손바닥에 적어주는 강의내용을 `들으며' 공부하여, 끝내는 우등으로 졸업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기적의 소녀' 헬렌 켈러의 눈물겨운 인간승리 얘기다. 그런데 그의 삶을 전하는 책이나 역사 교과서는 대부분 여기서 끝난다. 여든 여덟살까지 살았음에도, 특히 생애 대부분을 매우 치열하게 살았음에도, 그의 얘기는 스무살 초반으로 끝난다. 왜 그렇게 됐을까?
역사에서 삭제된 켈러의 치열한 삶
미국의 진보적인 역사학자들은 헬렌 켈러가 급진적인 사회주의자가 됐기 때문이라고 본다. 헬렌 켈러는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이미 사회주의자가 됐으며, 29살 때는 아예 사회당에 입당했다. 당시 장애인들이 가난한 노동자 계층에 유별나게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경우 장애가 사회적 조건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됐다. 안전장치가 없는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쉽게 눈이 멀고 손발이 절단되는 현실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사회주의자가 되기 이전까지 그는 온갖 장애를 극복한 초인간적인 노력과 용기에다, 명문대를 입학한 지적 능력으로, 미국 언론과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사회주의자가 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언론은 냉혹한 비판자로 돌변했다.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를 극복한 용기를 극찬했던 언론들이 이제는 그러한 장애 때문에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고 매서운 비판의 칼날을 들이 댔던 것이다. 그는 언론과 사회의 냉대와 비판에 아랑곳 않고 장애인을 위한 활동뿐 아니라 여성권리·정치에 대한 글을 끊임없이 발표하는 등 치열하게 살았다. 그러나 그의 성인시절 얘기는 역사 기록에서 거의 사라졌다. 이데올로기적인 선입관과 왜곡 때문이라는게 미국의 진보적인 역사학자들 견해다.
역사를 기록하거나, 글을 쓰는 일은 무엇인가를 `선택'하는 행위다.수많은 자료 가운데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하며, 일단 선택한 자료를 기술하는 데도 어떤 단어를 쓸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선택에는 역사관, 가치관이 개입한다. 냉전 대결구조에서는 이데올로기적 선입관이 압도적으로 작용한다.
과거에 유폐된 극우 세력들
남북 정상회담 이후 우리사회의 극우 수구세력을 대변해온 <조선일보>의 논평이 보여온 태도, 그들이 선택하는 단어, 견해는 매우 도발적이고 신경질적이다. 자신들의 정체감에 혼란이 생긴 때문인지, 아니면 화해·협력 시대와는 생리적으로 맞지 않는 원초적 거부반응 때문인지 논리가 옹색하고, 기이하기까지 하다. 가령 지난 12일자 <김대중 칼럼>은 지금의 한반도 상황을 `안보 실종상태'라고 규정했다. 남북이 주도적으로 평화를 오게 하는 노력이, 화해와 협력을 바탕으로 냉전체제를 해체시키고 평화구조를 정착시키려는 분위기가, `안보 실종상태'라는 인식이다. 대결과 힘의 논리가 아니면 안보가 불안해진다는 논리, 냉전체제에 푹 절어 있는, 과거에 유폐된, 경직된 사고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리고 과거 군부 독재정권이 정권유지를 위해 유난히 강조했던 안보논리와도 매우 흡사하다.
냉전체제 해체된 뒤 미국의 군·산 복합체는 평화가 오는 것을 두려워했다. 냉전체제가 그들 존재의 근거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처럼 <조선일보>를 비롯한 국내 극우들도 한반도에 평화가 오는 것이 두려운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화해·협력의 분위기를 '안보 실종상태'라 규정할 수 있겠는가? 정연주/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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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시간 2000년09월05일20시13분
한겨레/ 사설·칼럼/ 정연주 칼럼
[정연주칼럼] 한반도시대와 미국 대선
9월 첫 월요일은 미국의 노동절이다. 이날 미국의 국가경기라고 불러도 좋을 미식 프로축구 시즌이 시작되고, 또한 대선전도 공식적으로 시작된다. 이 때 쯤이면 민주 공화 양당의 전당대회도 모두 끝나고, 그화려한 정치적 축제를 통해 일구어 놓은 `전당대회 상승세'의 거품도 대강 빠진 때여서, 두 달 뒤에 있을 대선전의 판세를 내다 볼 수 있는 중요한 시점이 된다.
올 노동절 여론조사는 고어와 부시 사이 박빙의 접전을 보여주고 있어, 이번 대선전이 매우 치열하게 전개될 것임을, 그래서 인신공격이 주조를 이루는 네가티브 선거전이 맹렬하게 전개될 것임을 예고한다.미국의 전문가들은 노동절보다 훨씬 앞선 시점에 나온 여론조사에 그다지 의미를 두지 않는다. 유권자들의 관심이 별로 높지 않아 정확한 여론의 흐름을 헤아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뉴욕 타임즈> 조사에 따르면 92년과 96년의 대선 경우 선거전 10개월 때 “대선에 관심이 있다”고 대답한 유권자가 30%도 되지 않았다. 그러기에 전문가들은 지난 1년간 부시가 고어를 크게 앞서는 여론조사가 나와도 여기에 별 무게를 두지 않았다.
한반도 정책 큰 변화 없을 것
<뉴욕 타임즈> 칼럼니스트 윌리엄 세파이어는 지난 5월 “국민들은 별 관심도 없는데 워싱턴 인사이더들만 왁자지껄 떠들어 대고 있다”고 비꼬기도 했다.
올해 미국 대선은 조지 부시와 공화당이 국가미사일방어체제를 강력히 추구하면서 북한의 위협과 대북 강경론을 유난히 강조해 온 터라, 한반도에서도 대선 흐름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온 사람들이 적지 않다. 특히김대중 정부의 대북 햇볕정책과 남북 화해시대를 헐뜯느라 여념이 없는 극우 수구세력들은 공화당의 부시가 대통령으로 당선됐으면 하는 희망을 노골적으로 보여왔다.
그러나 미국의 대통령이 누가 되건, 미국의 한반도 정책이 크게 바뀌지 않는다. 부시가 국가미사일방어체제를 위해 대북 강경론을 주장해온 건 사실이며, 또한 제네바 기본합의의 문제점을 제기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 틀 자체는 깨지 않겠다고 밝혀온 터다. 오히려 하원 쪽이 관심대상이다. 그동안 끊임없이 대북 강경론을 외치며 재를 뿌려온게 하원 공화당 매파들이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이 하원 의석을 6석만 늘이면 다수당이 되며, 그렇게 되면 대북 강경론의 진원지이자 대북지원예산을 가지고 온갖 까탈을 부려온 하원 공화당 매파들이 힘을 잃게된다. 미국 의회의 경우 다수당이 되면 위원회 위원장을 모두 차지하고, 위원장이 청문회 개최와 증인 선택 등에서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한다.그리고 무엇보다 미국의 대통령이 누가 됐건 한반도 정책에 큰 변화가있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미국 내부에 있는게 아니라 이제는 한반도에 있다. 정상회담 이후 한반도 문제가 남북에 의해 주도적으로 다뤄짐으로써 `한반도화'됐기 때문이다. 정당성과 합법성이 없었던 과거 군부독재정권들은 누가 미국 대통령이 되는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박정희와전두환 대통령 시절에는 인권외교를 외친 지미 카터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두려워 했다. 김영삼 정부 때는 수없이 강온을 오락가락한 대북 정책 때문에 걸핏하면 한국 외무장관이 워싱턴을 들락거려야 하는, 굴욕적인 `셔틀 외교'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의 영항력 틈새 좁아져
그러나 이제는 한반도 문제가 `한반도화' 함에 따라 그런 식의 정치적 연계와 종속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미국 대통령에 부시가 되건, 고어가 되건,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여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틈새는 매우 좁아질 수밖에 없게 됐다. 이제 필요한 것은 남과 북이 한편으로 한반도 문제를 주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한반도의 평화 정착과 남북 경제의 확대를 위해 주변4강을 적극 활용하는 일이다. 온 겨레가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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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시간 2000년09월26일21시27분
한겨레/ 사설·칼럼/ 정연주 칼럼
[정연주칼럼] 강함이 부드러움 못 이긴다
네번 지켜본 미국 대선가운데 가장 변화무쌍하고 재미있었던 것은 `변화'의 깃발을 내건 40대의 젊은 기수 빌 클린턴이 승리한 92년 대선이다. 여성편력과 베트남 징집기피 등 온갖 스캔달에도 불구하고 클린턴은 걸프전쟁 직후 한때 지지율이 90%까지 치솟았던 현직 대통령 부시를 침몰시켰다. 승리의 핵심요인은 마이너스 성장에다 7%가 넘는 실업률 등 엉망진창이 돼버린 미국 경제였다.
자멸 재촉하는 강경파들
여기에다 공화당의 격심한 내분도 부시 재선을 재촉한 요인이 됐다. 공화당 내분은 특히 92년 여름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첨예하게 노출됐다. 닉슨 전 대통령의 언론비서를 지낸 극우 보수의 팻부캐넌과 `기독교 연합'을 주도해온 강경보수 팻 로버트슨 목사 등 초강경파들이 전당대회장을 압도해버렸다. 합리적인 온건파들은 설자리를 잃었다. 늘 그렇듯이 강경파들은 배타적이고 경직된 이데올로기와 가치를 강요했다. 그리고 과거의 틀에 매달렸다. 그러다가 `변화'를 외치는 클린턴-고어 짝에 처참하게 패배했다.
강경파들이 주도하고 있는 한국의 가파른 정치판과 사회집단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새시대의 요구에 따르지 못하고 과거의 틀에 매달리다 자멸해버린 미국 공화당의 강경파들이 떠 오른다. 정치판도, 사회 곳곳도 합리적인 접근보다는 격렬한 대결이 압도한다. 시대상황은 엄청나게 변화하는데, 정치권과 수구언론을 비롯한 사회 집단은 거기에 따르지 못한다.
여당인 민주당은 총재인 김대중 대통령의 지침없이는 도무지 자율적으로움직이지 못하는 무능과 무기력을 보여왔다. 야당 시절이나 여당 시절이나 별로 달라진게 없다. 주도적으로 문제의 매듭을 풀고, 필요할 때면넉넉한 아량을 보여야 함에도, 동교동계 주류의 강경대응은 그런 여지를막아 놓는다.
강경파들의 주도아래 전투적인 농성정당처럼 돼버린 한나라당의 사정도 여간 복잡하지가 않다. 특히 냉전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이를 부추키는 극우세력과 수구언론이 한나라당을 더욱 강경 쪽으로 휘몰고 있다. 한총련 시위대의 직설적인 비판에 마주치자 이를 피해 강연장뒷문으로 빠져나간 이회창 총재를 호되게 비판한 <조선일보> 9월 17일자 사설과 <월간조선> 10월호 '이회창의 위기'론은 남북문제에서 아예 극우가 되기를 강요한다. 보수세력의 불만을 헤아리는 `영웅'이 되지 못하면 이회창 카드도 버리겠다는 투다.
이런 가운데 영남후보론의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는가 하면, 이회창 총재의 농성체제를 비판하면서 등원론 등 온건노선을 내세우는 비주류쪽 움직임도 활발하다. 그래서 이회창 총재는 지금 극우 쪽의 강경 주문과 온건파의 합리적인 대응 요청 등 서로 엇갈리는 원심력의 가운데있는 모양세다. 불안한 균형이다.
합리주의가 정치 사회의 중심으로
어쨌건 정치권도, 사회도 온통 각박한 강경파들의 목소리가 드세다. 전국 어디를 가도 `결사반대'가 적힌 현수막이 곳곳에 걸려 있다. 가파르고 직설적이다. 장외투쟁과 가시돋힌 저질의 말싸움·감정싸움을 일삼는 정치권, 환자의 생명을 내팽긴 의료계의 폐·파업사태, 일부 노조의강경한 정치투쟁, 모두가 쉽게 극단으로 치닫는다. 이런 강경 일변도의대응은 대중적 지지도 얻지 못한다.
과거 군부 독재시대에는 강경 정치투쟁 외에 달리 현실적 대안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저마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대가 됐다. 남북간에도 화해·협력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이런 변화된 시대에 걸맞는 접근양식은 극단주의나 강경론이 아니라, 가슴 따뜻하고 합리적인 접근이다. 그 합리주의로 언제 또 터질지 모르는 경제위기도, 사회적 갈등도풀 수 있다. 그렇지 못하고 지금처럼 가파른 강경주의가 계속 압도한다면 이 땅은 살벌한 전쟁터가 되고 만다. 강함이 부드러움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을 깊이 되새겨야 할 때다.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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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시간 2000년10월10일18시20분
한겨레/ 사설·칼럼/ 정연주 칼럼
[정연주칼럼] 한국 신문의 조폭적 행태
70년대 후반,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감옥에 간 적이 있다. 자유언론을 외치다 75년 동아일보에서 추방된 선배들과 함께 구속됐다. 그때 같은 감옥에 들어 와 있던 우리나라 조직폭력계의 거물급 몇명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막강한 힘과 조직과 돈을 가진 대단한 특권층이었다. 청와대 경호실과 검찰 고위급들이 구치소장 방까지 찾아와 특별면회를 했고, 교도소 내에서도 자유롭게 활보하고 다녔다. 왕초를 보살피는 부하들의 극진한 태도를 보면, 그들은 분명 황제였다. 그 황제의 말 한마디에 부하들은 죽음도 마다하지 않을, 절대적인 충성심까지 보였다. 이들이 풀려 나갔을 때 교도소 앞에 늘어선 수십대의 고급 승용차와 부하들의 행렬은 영화에서나 봄직했던 대단한 장관이었다고 한 교도관이 전해줬다.
`야성' 이름아래 무차별 공격
한국 조폭의 역사를 보면 신상사파가 명동을 지배하던 70년대 중반까지만해도 `주먹'이 지배하던 `낭만적인' 시대였다. 그러나 일본 회칼과 몽둥이가 등장하여 신상사파를 무너뜨린 이후 이땅의 조폭들은 잔인하고 냉혹해졌다. 자기들의 이익과 관할영역 확대를 위해 무자비하게 칼과몽둥이를 휘둘렀던 것이다.
최근 일부 신문의 행태를 보면 이들이 칼과 몽둥이를 마구 휘두르는 조폭의 행태와 무엇이 다른가 하는 참담한 생각이 든다. 실제로 해당 언론사 내부에서조차 “우리가 조폭과 무엇이 다르냐”는 자조섞인 개탄의소리도 들린다.
정상회담 이후 <조선일보>가 보여온 사설 논평은 거의 무차별적 공격이 주종을 이룬다. 6월 13일자 사설에서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된다”던 조선일보는 그뒤 남북간 각종 회담이 열릴 때마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첫 국방장관 회담 때는 `긴장완화'가 빠졌다고 다그쳤고, 이산가족 회담 때는 `면회소 설치' 문제에 진전이 없었다고 호되게 비판했다. 그러다가 일부 회담에서진전이라도 있을라치면 이번에는 `과속'이라고 나무랐다. 남북 화해시대에 대한 극도의 혐오와 저항이 사설과 칼럼 곳곳에 피처럼 배어있다. 그 모습이 조폭의 격한 칼질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무차별적 비판이 `야성'이라는 이름아래 정당한 언론행위처럼 일부에서 평가되기도 한다.
극우와 수구라는 이데올로기에서 이처럼 격렬한 붓의 칼을 휘두르는 조선일보와 달리 <동아일보>는 일관성도 없이 자기들의 조직이익을 위해 마구 칼을 휘두르는, 전형적인 조폭 체질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동아일보 보도가 심상치 않다. 정부비판의 강도를 높이면서 영남지역 문제를집중적으로 부각시켜 동아일보 내·외부로부터 의혹의 눈길을 받고 있다”. <미디어 오늘>이 최근 전한 내용이다. 동아일보 9월 9일자 '대구 부산에는 추석이 없다'는 기사에 대한 회사 안팎의 비판을 전한 이신문은 동아일보가 정부 `때리기', 영남 `달래기'를 하는 원인으로 열세에 몰린 영남권 사세 확장을 위한 전략적 포석이라는 분석도 실었다. 그리고 “정부에 요구했던 부지매입과 동아방송 반환요구가 거절된 때문이라는 지적도 언론계 내부에서 강하게 제기되고 있어 주목된다”고 지적했다.
젊은 언론인들 일어나라
언론망국론이 어제 오늘의 얘기는 아니다. 군부 독재정권에 빌붙어 온갖 굴종과 왜곡으로 군부 독재정권의 수명을 떠받쳐온 수구언론, 조폭의왕초처럼 제왕적 권력을 누리면서 조폭적 행태를 일삼는 세습 수구언론의사주들, 이들 사주들에게 충성을 바치는 중간 보스들의 노예근성과 이들이 휘두르는 붓의 폭력성, 조폭의 관할영역 확대를 위한 피투성이 싸움처럼 판매부수 1위를 위해 벌이는 살인적인 판매 경쟁 양태, 이런 조폭 수준의 신문들이 신문시장의 60% 이상을 장악하면서 이 땅을 황폐화시키고 있는 이 처절한 상황이 계속되는 한, 이 땅에 사랑과 평화가가득한 공동체 건설을 바라는 것은 허망한 일이다. 젊은 언론인들이여.일어나 조폭적 사주들에게 저항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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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시간 2000년10월24일17시59분
한겨레/ 사설·칼럼/ 정연주 칼럼
[정연주칼럼] 한국신문의조폭적행태(2)
지난 13일 오후 <동아일보> 김병관 회장이 고려대 앞에서 보여준 코메디성 해프닝과 그 이후의 상황은 이 땅의 세습언론과 세습사주들의 행태가 어느 정도에까지 이르렀는지를 매우 희화적으로 보여줬다. 김병관회장의 횡설수설과 해괴한 행태는 그 자신 많은 국민들로부터 조롱을 받고있는 김영삼 전 대통령까지 나서 한 마디 거들게 할 정도였다. 김 전 대통령은 동아일보 기자더러 “너거 회장한테 술 좀 그만 묵고 다니라 그래라. 그래갖고 회사나 학교나 운영이 되겠나”고 나무랐다.
이에 앞서 김병관 회장은 고려대 앞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하사'했다는 CD에 담긴 <심장에 남은 사람>의 가사를 읊조리기도 하고, 그가 주사파라고 욕했던 농성학생들과 함께 길바닥에 퍼질러 앉아 '반 아셈'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지난번 이 난에 실린 '한국 신문의 조폭적 행태'라는 칼럼 복사본을 흔들며 횡설수설하기도 했다.
'애비 잘둔 덕'에 언론황제
김병관 회장의 술주정과 횡설수설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인터넷 신문인 <오마이뉴스> 보도에 따르면 그는 술이 취한 상태에서 동아일보 지면을 비판한 사내 공정보도위원회 간사인 여기자에게 심한 욕설을 퍼부었으며, 지난해 9월에는 낮술에 취해 동아일보 편집국을 방문한 '왕과비'의 여주인공 채시라에게 “대왕대비 마마!”를 외쳤다는 것이다.
결국 이 정도의 지적 능력을 갖춘 알콜 중독성의 인물이 우연히도 동아일보 사주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덕에 세습사주가 되어 신문과 여론을쥐락펴락해 왔다. 그의 해괴한 행태와 술주정이 잠시 배꼽을 쥐게 하는우스개 꺼리가 될지 모르지만, 이런 인물이 한국 언론의 주요부분에서 제왕적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은 처절하고 끔찍하다.
'애비 잘 둔 덕'에 세습사주가 되어 언론황제로 군림하고 있는 곳이어디 동아일보 뿐이겠는가? 한국 신문시장의 60%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조중동'(조선 중앙 동아)은 모두 이런 제왕적 권력을 휘두르는 세습사주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지난 칼럼에서 지적했다시피 그들은 조폭처럼 자신들의 영역확대를 위해 피투성이 싸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다가도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나면 이를 감추기 위해 일치 단결하여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한다. 이번 김병관 회장의 술주정 해프닝은 <한겨레>와 <한겨레21>,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 그리고 <시사저널> 등에만 보도됐을 뿐 `조중동'을 비롯한 대부분 일간지들은 침묵했다. 그 침묵은 부도덕하고 파렴치한 조폭성 사주들과 그들이 지배하는 한국 신문들의 뒤틀린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들은 자신들이 만드는 신문의 지면을 통해서는 기업의 투명한 경영을, 기업주의 도덕성을수없이 강조해왔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의 불투명하고 부도덕하고 파렴치한 행동에 대해서는 `조폭의 의리'를 발휘하여 한사코 침묵한다.
언론노조여 깨어나라!
한국 신문의 개혁에 대해 수많은 처방들이 나왔다. 족벌의 주식소유에한도를 두고, 공정거래법을 철저하게 적용하고, 일반기업과 마찬가지로 정기적이고 철저한 세무사찰을 하는 것 등이다. 이런 제도적 개선과 함께 세습언론 내부에서 적극적인 혁파운동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세습언론의 노조가 자사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대자본의 횡포에 맞서는 참된노조로 거듭 태어나는 일이 매우 절박하다. 대자본의 상징인 세습사주의제왕적 권력에 맞서 제몫을 하는 온전한 언론으로 태어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런 노조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26년전 동아일보의 젊은 기자들이 유신독재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유언론의 횃불을 높이 든 10.24 기념일이다. 이제 오늘의 젊은 기자들은 유신독재의 굴레가 아니라 언론황제가 지배하는 대자본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제2의 10.24 자유언론 실천운동을 해야할 때가 됐다. 동지들, 그렇지 않은가?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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