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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게시물ID : sisa_20183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욕쟁이정의남
추천 : 1/3
조회수 : 1116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2/05/06 16:48:36

제         목 :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저         자 : 김경일
출  판     사 : 바다출판사  출
판     년도 : 1999
초         록 : 조선 500년 근대화 100년, 우리는 유교문화에서 얼마만큼 자유로운가?
머리말
1910년 한일합방, 1950년 6.25, 1997년 IMF. 100년도 안 되는 세월  동안 우리 민족은 세  번을 죽다 살아났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민족 자체가 자칫 인류 역사에서 잊혀버릴 수도 있었던 위기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우 리는 그럭저럭 위기를 수습해왔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참담했던  과거를  잊어버렸다. 아니 오히려 스스로를 '역경을  이겨낸 위대한 민족' '하면  되는 민족'으로  위안하며 대견스러워 했다.   그러나 50년이 멀다 하고 되풀이되는 이 역사적  사건들이 그저 우연한 것이었을까?  언제나 새로운 각오로 출발만 하면 모든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는 것일까? 이런 위기의  연속에는 우리들 내부에 숨어 있는 어떤 필연의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      얼마전 나는 마흔을 넘어섰다 마흔을  유혹에 흔들리지 않을 나이라고 해서  '불혹이 라 부른다던가? 그런데 나는 마흔이 되면서 더욱 흔들리기 시작했다. 산다는 건 뭘까?  역사란 뭘까? 그리고 국가란 개인에게 무엇일까? 한국인으로 산다는 건 도대체 뭔가?   나는 새로운 답은 찾고 싶었다. 그리고 그 답을  공자의 유교에서 찾아냈다. 유교 사 회 속에서 성장했고 그것을 공부했던, 그래서 한때 그것을 가장 아름다운 가치로 생각 했던 나에게 찾아낸 이  답은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건 새로운 출발을  약속하는 작은  희망이기도 했다.   한일합방을 부른 무기력한 정부와 위선적 지식인들, 6.25를  부른 우리 문화 속의 분 열 본질, 그리고 IMF를 부르고만 자기 기만과  허세. 그것들은 도덕의 가면을 쓴 유교  문화 속의 원질들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었다. 위선, 분열 본질, 자기 기만과 허세, 그 것들은 바로 우리 사회가 그토록 즐겨 부르짖던 도덕적  가치, 단일 혈통의 우월성, 그 리고 무거운 권위들의 벌거벗은 뒷모습이었다. 단지 그것들이 도덕적으로 위장되어 있 었고 정치적, 사회적 권위에 의해  보호되어 왔기에 쉽사리 알아채거나 지적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러한 요소들은 오늘도 어렵지  않게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지금도  우리 내부에서는 크고 작은 한일합방 류의 협잡과  6.25식의 동족 죽이기와 분열, 그리 고 허세와 자기 기만으로 인한 IMF 형 파산이 연속되고 있다. 사건이 달라 보이고, 크 기와 규모와 영역이 달라  별개의 사건들처럼 보이지만 그것들은  우리 문화의 심층에  자리잡고 있는 하나의 원인 때문에 지속되는 것들이다. 그것은 우리 문화의 내면을 한 꺼풀만 젖히고 들여다보면 언제라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시커먼 곰팡이, 바로 유교라는  곰팡이 때문이다. 장이 나쁘면 얼굴에 시도 때도 없이 여드름이 돋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무리 화장을 해도 소용이 없다.      유교는 처음부터 거짓을 안고 출발했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지만 유교의  씨앗 은 쿠데타로 왕권을 쟁탈한 조갑이라는 한 중국인  사내의 정치적 탐욕을 감추려는 목 적 아래 뿌려진 적이었다.  기원전 1300년경 황하  유역에서 일어난 이  사건의 현장을  우리는 고대 동양 문화의 실록인 갑골문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 후 이 정치적  사건은  교묘하게 도덕적으로 위장되어 전해오다가 공자라는 한  사나이에 의해 후대에 전해졌 다. 물론 그 당시 공자는 사건의  내면에 숨겨진 불순한 문화적 코드를 읽어내지  못한  채 도덕만을 외쳐댔다.   그 결과 현란한 수식어에도 불구하고, 공자의 도덕은  '사람'을 위한 도덕이 아닌 '정 치'를 위한 도덕이었고, '남성'을 위한 도덕이었고, '어른'을 위한 도덕이었고, '기득권자' 를 위한 도덕이었고, 심지어 '주검'을 위한 도덕이었다.  때문에 공자의 도덕을 딛고 선  유교 문화는 정치적 기만과 위선, '남성적 우월' '젊음과 창의성의 말살' 그리고 이 이방 인의 문화는 조선 황실의 통치 이데올로기가 되어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것은 사농공상으로 대표되는 신분사회, 토론 부재를 낳은  가부장 의식, 위선을 부추 기는 군자의 논리, 끼리끼리의  협잡을 부르는 혈연적 폐쇄성과  그로 인한 분열 본질,  여성 차별을 부른 남성들을 오늘날까지  지속시키고 있다. 이것들은 오늘날 우리들  삶 의 공간에 필요한 투명성과 평등, 번득이는 창의력,  맑은 생명들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것들이다. 유교의 유효 기간은 이제 끝난 것이다.      앞으로 이야기하겠지만 공자의 도덕은 '힘있는 자'와 '돈  가진 자'를 위해 봉사할 수 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때문에 수시로 우리 눈앞에서 휘두르는 '도덕성  회복'이나 '민본주의 사상' 등의 유교적  깃발들은 그 자체가 이미 새로운  가부장적 독 재와 밀실 야합, 그리고 불평등의 가치를 옹호하겠다는 선언과 다르지 않다. 조선 왕조 의 긴 역사와 중국 왕조들의 반복된 실패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우스꽝스런 모습들은 바로  공자의 유교 문화 속에서 살아남 아야 했던 구조적 위선자들이  만든 필연적 졸작들이다.  나는 이런 점에서  오늘도 이  시대를 진단하고 처방을 내리며 목청을 돋우는 이 땅의 위선적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을  보면서 현기증을 느낀다. 차라리 이젠 그만 '한국호'에서 내리고 싶은 심정이다.   맑고 순수한 '사람' 이었던 우리, 패기와 자신감으로 가득한 '사람' 이었던  우리는 유 린되고 세뇌되며 '유교적 한국인'이 되어 있었다. 나는 공자가 이방인이기 때문에  비판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공자가 제시하는 도덕 속에서 우리들 대부분이 스스로의 의지 와는 상관없이 구조적 위선자로 변해 가고, 우리들의 삶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안타 깝다. 유교문화의 이러한 해악을 깨닫지 못하고 우리 역사 속에서 겪은 고난들을 우연 으로 치부하거나, 몇몇 개인에게 정치적 책임을 묻고, 또 지정학적 근거를 통해 어설픈  남의 탓 지적이 지속된다면 우리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가슴 답답함의 실체를 찾아내 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사건들은 계속될 것이다.  하루만 지나면 엉클어지는 줄서기나  신호위반 단속, 그리고 머리띠를 질끈  동여맨 '전진대회'의 구호 속에서 답을  찾는 한  재앙은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 위선의 색깔은 점점 더 진해져 갈 것이다. 결국,  문화적 토양이 바뀌고 생각의 틀이 바뀌지 않는 한 어떠한 노력과 구호도 우리의 아름 다운 미래를 담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유교의 종주국인 중국에서는 유교를 버리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이 미 100여 년 전 시작된 혁명들은 아직도 끝이 나지 않았다. '사람 잡아먹는 유교'를  버 리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중국은 이제 새로운  길을 향해  발걸음을 뚜벅뚜벅 옮기고 있다 조금 덜그럭대긴 해도 방향은 제대로 잡은 셈이다. 역 시 100여 년 전, 일본은 유교를 버리기로 작정했다. 그들은 날선 칼로 공자를 베어버렸 고 메이지유신을 완성시켰다. 그리고 새로운 틀을 마련했다. 그들 역시 적지 않은 고통 을 감내했다.   나는 우리 민족이 그 동안 시련을 겪을 만큼 겪었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의 아픈 교 훈은 필요가 없다. 이제는  우리들의 아름다운 삶을  옥죄어온 도덕의 그  더러운 변질  과정을 파헤쳐 드러내놓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토록 신봉했던  역사와 문화들이 우리들의 삶을 얼마나 망가뜨려 놓았는지에  대해 알아야 할 때가 되 었다고 생각한다. 왜곡된 권위와 도덕적 가치들 뒤에 숨겨진 정치적 협잡과 역사적 속 임수를 끄집어 내놓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남들보다 100여 년이 늦은 오늘, 더구나 21세기의 문턱에 서서 이런 글을 쓰는 자체 가 무척 쑥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제는  유교 문화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할  시 점이 되었다. 우리 모두는, 이제 한 번쯤은 스스로에게 솔직해질 때가 되었다. 모든 껍 질을 벗고 자신의 모습에 솔직해질 때가 되었다. 이 책을 통해 나는 독자들이 정말 한  번쯤 삶에 어울리는 옷을 입었으면 한다. 이제까지처럼 허풍으로 가득 찬 '아, 아, 대한 민국'이 아닌 , 유교적 허세문화와 정치적 허세에서 벗어난 맑은 삶의 옷을 말이다.                                                                       1999년 4월                                                                           김경일 1부 한국인으로 사는 열가지 괴로움        이제 지도는 찢어졌다    "이제 지도는 찢어졌다."   세계적인 국제 전략가로 미국 맥킨지에서 20여 년  간 다국적 기업들의 고문을 담당 했던 오마에 켄이치는 '국가의 종말' 이라는 책의 첫마디를 이렇게 시작했다.   정치인이 대표가 되는, 나라로서의 국가 대표팀은 이제  끝났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경계는 이미 허물어져버렸다. 이제  국경이란 지도 위의  선에 불과하며 땅  위에 쳐진  거미줄보다 약한 철조망일 뿐이다. 얼마 전까지도 이 선을 허락 없이 넘는 것은 그 국 가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고 공격이었다. 그것은 때로  전쟁으로 이어지곤 했다. 그러나  이제 전파에 대해 국경은 속수무책이다. 국경을 번개처럼 넘나드는 TV와 영화에 대해  속수무책이다. 인터넷과 CNN에 대해 그 누구도 시비를 걸 수 없다.   꼭 21세기라서가 아니라 우리는 이제 새로운 삶의 시대에 도달해  있다. 이른바 4I로  대표되는 산업, 투자, 개인, 정보로 구성된 새로운 삶의 연합체가 등장한 것이다.   이들 4I는 국경 위를 제약 없이 넘나들고 있다. 이제 서로에게 이익만 된다면 우리들 이 어떤 국적을 가졌건 어디서든지 생활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어 가고 있다. 더구나  "자본에는 국적이 없다."는  말의 파괴력은 몇몇  미래학자들이 경고 수준을  넘어섰다.  이제 그 영향력은 내가 사는 24평 국민주택에까지 깊숙이 들어와 버렸다.   유태인 출신의 세계적 투기꾼 조지 소로스는 이 새로운 시대를 '세계 자본주의의 위 기'라는 최근 저서에서 '열린 사회'로 불렀다. 공감되는  이야기다 나는 이 책을 잡자마 자 하룻밤 새 다 읽어버렸다.  역시 세계적인 꾼은 뭔가 다른  법이다. 그 역시 국경이  무너지는 소리를 남보다 일찍 들은 사람이었다.   우리는 위대한 장사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사농공상에 깊이 세 뇌되어 있는 한국인들은 교수나  학자의 말에는 제법 귀를  기울이지만 장사꾼의 말은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 이제는 경제가 모든 가치 를 좌우하는 시대가 되었고 금융 상식은 비타민C만큼 중요한 요소가 되어버렸다.   한국사회의 주변을 돌아보자. 우리들  삶에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우리들의  의지와 는 상관없이 우리를 좌지우지하는 주변국들은 우리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서고 있 는가? 나는 이들의 모습을 문화적 측면에서 살펴보며 우리들의 문화주소를 확인하고싶 다. 이제 미국은 이른바 미국식 획일화를  전세계로 확산해가고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세계화며, 글로벌 경제며, 다양한  문화적 교류의 배후에는  미국식 획일화가 자리하고  있다. 한국은 한국 시장 침투를 쉽게  하기 위해 획일화를 밀어붙이는 강력한 세력  앞 에 완전히 노출된 상태다.   미국은 획일화의 기초 작업으로 시스템의  미국식 표준화를 요구하고 있다.  '?글'을  죽여버리는 '한글'을 죽여버리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작전은 빙산의 일각,  아니 그들의  휴식시간을 위해 마련된 냉커피의 한  조각 얼음에 불과하다. 미국의 전략은  자본주의 의 본산답게 철저하고 냉혹하다. 그들은 산업, 투자, 개인, 정보의 4요소 중에서 산업과  투자, 그리고 정보를 이미 확실하게 장악해 나가고 있다.   이렇게 보면 IMF란, 21세기라는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기 위한 비자 발급 정도의  사 건일 수도 있다. 조지  소로스는 자신의 회사가 이미  6개월 전에 아시아  금융 위기를  예측했노라고 쓰고 있다. 그는 자신의  놀라운 예측에 따라 절망으로 치닫는  주식시장 에서 한 보따리 건져 유유히 사라져버렸다. 잘못이라면 순전히 우리 잘못이 되고 말았 다.   이렇게 본다면 국가는 이미 그 능력의  종언을 고한 셈이 된다. 국가는 강하고  빠른  외부의 새로운 도전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지 못했다. 오늘날  우리는 뭍 밑으로, 철조 망 사이로 기어드는 낯익은 적들을 막아내는 것만이 국가 방위가 해야 할 책임의 다가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국가는 그야말로 퇴출되어야 할  시점에 놓여 있는 것이다. 국가 퇴출? 전혀 낯선 표현이  아닐 수도 있다. 지금처럼 한  나라의 은행 서너 개를  사고도 남을 자금들이 번개처럼  국경을 넘나드는 상황이라면  말이다.   이러한 미국식 획일화 전략에 거칠게 맞서고 있는 나라는 중국이다. 중국은 세계 문 제에서 언제나 미국의 딴죽을 건다. 국민들의 삶의 질은 한참 떨어지지만 가공할 만한  구매력을 앞세워 미국에 맞서고 있다.   "까불면 장사 안 해! 확 문 닫아버릴껴! 사고칠껴!"   그런 중국의 늠름한 모습을 보는  우리의 마음에는 만감이 교차한다. 조금은  고소하 고 조금은 으시시한 것이 사실이다.   중국의 전략은 일종의 '몸값 불리기'  전략이다. 가장 강한 놈을 골라  시비를 붙으면 서 2인자가 되려는 전략 말이다. 그것도 막무가내로.   미국과 중국의 무역에 등장한 귀여운 장애물인 딱정벌레는 중국적 배짱과 원시적 환 경이 만든 경제적 홍위병이다. 살충 처리를 하지 않은 수출품 포장용 나무궤짝에 묻어 오는 이 딱정벌레들이 뉴욕과 시카고의  단풍나무들을 있는 데로 먹어치우고 있다.  미 국 내에는 천적이 없는 이 벌레 때문에 미국은  중국에 '환경' 운운하면서 개선을 요구 하지만 중국은 '비이성적인 처사'라고 내뱉는다.   "아, 벌레를 어떻게 막아? 인간들도 통제가 안 되는데."   중국은 이러한 힘을 배경으로 적어도 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은 확실히 해두려는 의도 가 있다. 마음에 안 들면 타이완 해협으로 미사일도  뻥뻥 날리고, 중국의 내부 사정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사실은 대단히 정확하게)  보도하는 일본 NHK  방송팀을 통째로  추방해버리기도 했다. 1998년 겨울, 국가주석 짱저민(우리나라 매스컴이 사용하는 장쩌 민은 틀린 표기. 모르니까 못  고친다.)은 일본수상과의 정상회담에서 역사문제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공동성명 서명을 거부해버렸다. 쓸 만한 배짱이 다.   한국에게는 이런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지 않는다.'던 가! 한국은 지레 겁을 먹었는지 대 중국 문제 처리를 봐도 신통한 데가 없다. 파트너라 고 나서는 친구들을 만나봐도 그저 그렇다. 언어 실력이나 중국 내부의 핵심을 찔러댈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들이 많지  않으니 당분간은 그대로 '고'다. 중국의  효과적인 정 보 차단, 한국의 국가적 힘, 이른바 중국통들의 웃기는  능력 등등은 중국을 한숨 돌리 게 만드는 요소다.   그래서 중국은 언제나 가장  쉬운 방법으로 한국 길들이기  시나리오를 진행하고 있 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통일 카드다. 한국은 통일에 목숨을 건다. 그리고 통일의 문을  열 수 있는 몇 개의 열쇠 중 하나는 확실히 중국의 손아귀에 있다.   중국은 단 한 번도 '6.25'에 대해 공식 사과하지 않았다. 100만의 중공군을 쓸어 넣어  한반도를 두 동강 내 놓았지만 그들의  태도는 완강하기 이를 데 없다.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한 한 입도 뻥긋  못한다. 또 중국은 "한반도가 하루 속히  통일이 되기를  바란다."는 표현을 하지 않는다. 언제나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가 유지되기를 바랄 뿐 이다.   한국 정치 지도자들의 아킬레스건인 통일 문제, 그 부분에 관한 해법을 중국은 확실 하게 쥐고 있다. 산업도 투자도 정보도  장악할 수 없지만 그들은 한국인의 마음을  확 실히 얼려놓고 있는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에 확산되고 있는 중국 알기의 저변에는 중 국공포증이 서리처럼 엉겨 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차라리 미국식 획일화가 더 마음  편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미국식은 적어도 앞날은 예상할 수 있어  불안감이  덜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비해 일본은 가장  괜찮은 장사를 하고  있다. 한국 젊은이들의  일본 문화에  대한 심취가 현재와 같은  속도로만 진행된다면 일본은 아주  쉽게 한국을 문화적으로  흡수해버릴 수 있다. 일제 통치하에서 성장했던 노인들이 점점 사라지면서 친일본적인  성향이 약해져가고 있는 이때 형성된  청소년층의 일본 매니아들. 일본으로 봐서는  멋 진 응원군이다. 이들은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지속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트로이 목마 들이다. 일본은 언제든지 한국사회를 리모트 컨트롤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가끔씩 과거사 문제에 대해 강경 발언을  한두 번 해서 분위기를 어수선하게  했다가 다시 정리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감각을 무디게 만들고 있다. 같은 말을 시간차 를 두고 지속적으로 듣게 되면 나중에는  그게 그런가보다 하게 되는 게 인간이다.  치 밀한 계산이 없이는 행동하지 않는 게 일본인 아닌가?   특히 일본의 문화 산업은 산업, 투자,  개인, 정보의 4요소를 골고루 갖추고  있는 21 세기적인 아이템이다. 그 중에서도 하이테크와 개인의 선호도를 섞어 만든 '애니메이션  취향' 의 문화 산업들에는 국경을 초월해 다른 나라의 개인들(결국 국민들)을 일본적인  개인(문화 영역 속의 국민들)으로 만들어버리는 무서운 노림수가 담겨있다.   이런 문화적 환경에 노출된  우리는 이제 어떤 문화적  전략으로 효과적으로 방어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이들에게 역공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의 국수적인 태도를 부추기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한복입고, 김치 씹으면서 우리 것을 지켜보자는 비장감을 조장할 생각도 전혀 없다. 또  그저 유전된 감정만을 붙들고  반미, 중국이용, 극일의 구호를  외치고 싶은 마음도 없 다. 그것은 맹장염에 산 미꾸라지를 한 대접 붙이고 누워 있겠다(중국 조선족의 민간요 법의 하나다)는 미련일 수 있다. 그보다는 더 단단한 자존심과 실력을 바탕으로 이들과  공존하고 이들과 악수하며 다음 세대로 건너가고 싶다. 남을 매일 미워해야 하는 것은  너무도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한복과 김치의 뿌리와 현주소, 그리고 그것이 왜 도태당하고 있는가에 대한 자기 해 체적 반성과 분석이 없는 한 모든 시도는 한여름 밤의  부채 역할밖에 하지 못할 것이 다. 가을이 오고 선선한  바람이 불면 부채는  너덜너덜해진 채 내던져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것'에 대해 냉정해질 때가 되었다.        나는 신토불이가 싫다   방송이고 뉴스고 심심하면 써먹는 '애국적 발언'이 신토불이다. 그러나 사실 몸과  흙 은 둘이 아니라는 이 말 뒤에는 박정희 시대의 국산품 애용이 있고, 다른 한 구석에는  일제시대의 물산장려운동이 있다. 그리고 아주 멀리는 전국시대의 철학자 노자가 숨어  있다. 어쩐지 도피의 냄새가 난다.   노자는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고 했다.  '스스로 이런 형태' 임을 뜻하는  자연이란 말 에서 느낄 수 있듯이, 자연계 내의 모든 존재는 원래의 모습 그대로 살아야 한다고 그 는 주장했다. 봄이 오면  봄처럼, 여름이 오면  여름처럼, 가을이면 가을처럼, 겨울이면  겨울처럼 말이다. 황사가 날면 세수를  멈추고, 더위가 오면 에어컨을 끄고,  가을이 와 도 로션을 바르지 말고, 겨울이 오면 짚풀더미를 뒤집어쓰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   열매 있으면 열매 먹고, 고기 잡으면 고기 먹고, 없으면 굶고, 수염나면 기르고, 울고  싶으면 울면서 바람처럼 구름처럼 살라고 외친 사람이 바로 노자다. 자연의 흐름을 어 기고 옷도 만들고, 자동차도 만들고, 핸드폰도 만들고,  제도도 만들고, 학교도 만든 인 간들 때문에 자연의 질서는 훼손되고, 결국에는 자신들이 편리하다고 생각했던  문명의  이기들 때문에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자연으로  돌아가기에 우리는 너무  멀리 나와 있다.  그저 일주일에  한두 번 산에 오르는 정도로 노자의 잔소리에 부응하는 수밖에.   우루과이라운드가 체결되고 쌀 시장, 쇠고기  시장이 열리면서 우리 먹거리가 설  땅 은 점점 좁아졌다. 이때 터져나온 것이 바로 신토불이였다.   "뭔 소리여. 우리 몸은 우리 땅에서 난 것을 먹어야 혀."   수입 개방이 못내 찜찜했던 농부들과 우리 사회는 이 기막힌 논리에 무릎을 쳤다.   "그렇지, 우리 몸은 우리 땅에서 난 것을 먹어야 해."   그럼 질문을 하나 해보자.   "왜 신토불이지?"   "우리 땅에서 우리 몸이 났으니, 우리 땅의 소산을 먹어야지!"   "그럼 뭐가 좋은데?"   "건강해지지."   "정말인가?"   "그럴걸 아마...."   우리 땅은 어디를 말하는 걸까? 그건 정치적 경계선으로 만들어진 공간일까? 아니면  민족적 경계선? 아마도 민족적 경계선일 가능성이 높다. 북한산 먹거리도 우리 것이라 고 열심히 먹는 것을 보면. 그럼 일제  농산품은 안 될까? 옛날부터 우리 문화를  받아 들였고, 우리 조상들이 많이 이주해간 곳인데. 그래도 그건 안 되지 싶다 감정 때문에.  그런데 왜 중국 것은 안 될까? 시장에서 중국 것만 나타나면 독약 보듯이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TV리포터들은 중국산 도라지만 보면 정색을 할까?   "이 놈이 바로 중국산 고사립니다. 색깔이 시커멓고. 요 놈이 바로  우리 고사립니다.  보기만 해도 맛깔나게 생겼지요."   중국의 동북 지역은 옛  고구려 땅이고 발해의 영토라고  틈만나면 문화적 영유권을  주장하면서도 왜 그곳에서 난 먹거리는 우리  것이 아닐까? 호박같이 둥근 가지,  주먹 만한 고추, 뻘건 무, 그것들은 바로 우리 독립군들도 즐겨 먹던 민족의 먹거리들이었는 데.   한국의 배가 세계로 수출되는 것은  우리 농업의 개가다. 그러나 캘리포니아  오렌지 는 언제나 농약이 많고,  그거 먹으면 양놈들처럼  눈알이 시퍼래질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된다. 수출은 국가 경쟁력을 위해  당연한 것이지만 수입은 신토불이 조항  때문에  언제나 조심스럽다. 한국에서는 법보다 무서운 게 언제나  이런 분위기다. 객관적인 기 준이 없다. 남들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한 가지 일을 놓고도 이렇듯 수시로 기 준이 바뀌고 논리가 바뀌니 남들이  한국인들을 신뢰하지 않는 것  아닌가? 왜 그렇게  속이느냐고 항의하는 것 아닌가?   따지고 보면 솔직히 '우리 것'은  거의 없다. 벼며 과일이며 소들  대부분은 외국에서  들여온 씨앗들이다. 토종은 모양도 작고, 수확도 적어 일찌감치 외래종으로 바뀐 지 오 래다. 즐겨 먹는 삼겹살의 주인공들이 우리  돼지인가? 모두 남의 나라의 허연  돼지들 이다. 돼지 농장에 가보자. 첫날밤만을 기다리며 뒹굴고  있는 집채만한 종돈들은 모두  남의 나라 돼지다. 그 돼지들이 첫날밤을  지낸 곳이 한국이라고 그 새끼들이 모두  한 국 돼지인가? 그러면 태국으로 신혼여행 갔다와서 난 애들은 모두 태국애들인가?   왜들 이러나. 눈을 잘  씻고 주변을 보자. 그리고  우리의 모습을 조금  차근히 보자.  그 어설픈 구호들에 속아넘어가지 말고 말이다.  '우리 것' '우리 것' 하면  할수록 우리  모습은 작아진다. 그건 아무리 봐도 자신감이 없다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우리 끼리 하지 말고 남들과 경쟁해보고 '너희 것 좋아'란 소리를 들어야 한다.   일단 서울 한복판에 떡 하니 버티고 있는 미8군에게도  우리 농산품을 납품할 수 있 어야 한다. 왜 그들은 과일 등 농산품을 '신토불이 한국산'이 아닌 일본이나 자기네  나 라에서 날라다 먹는가? 그네들도 노자를 알고, 미국식 신토불이를 알아서일까?   캘리포니아 오렌지에 농약이 묻었다면 당당하게 항의해야 한다. 그리고 농약이면 농 약, 세균이면 세균에 대해서만 말하면 된다. 그래야 방송국에 접수된 먹거리 관련 뉴스 를 두고 고민을 하지  않게 된다. 혹시라도 이  뉴스 나가면 특정 업종  농어민은 모두  끝장이라는 논리로 보도를 보류하는 봐주기는 없어야 한다.   비뚤어진 기준으로 자꾸 봐주다보면 결국  손해는 우리가 보게 된다. 당장  신토불이 를 너무 외치다보니 중국에서 농약을 듬뿍 쳐서  들여온 먹거리들이 우리 것으로 둔갑 해 우리들 몸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중국에서 사용하는 농약들은 이미  선진국에서는  사용 금지된 것들도 많다. 또 설사 허가된 것이라도 유통 기한이 길기 때문에 약을 듬 뿍듬뿍 치곤 한다. 오죽하면 최근에는 베이징, 상하이 등 대도시에 '청정 식품'이 다 등 장했을까? 그런데도 내가 아는 중국인 교수님 한 분은 그것마저 조심스러워하신다.   "그걸 어떻게 믿어."   하긴 공업용 알코올을 고량주라고 속여 팔아 설날에  마을 사람 여럿을 잡은 사람들 이니 쉽사리 믿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도 그 독한 농약에 절은 채 수입된 인 삼이며 약초들을 우리 것이랍시고 사다가 약탕기에 넣어  푹푹 고아 먹는 미련이 계속 되고 있다.   신토불이만이 건강을 지켜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남의 땅에서 난 것이라도  깨끗하 면 건강에 유익할 것이고, 우리 땅에서  난 것이라도 뭔가 장난을 쳤다면  건강에 나쁜  것이다. 제 철에 난 과일을 먹어야 한다는 논리도  그렇다. 그럼 비닐하우스는 다 어떻 게 하란 말인가.? 지구를 빙빙 돌며 벌어와도 시원치 않은데, 골방에 쭈그리고 앉아 못 난 우리 것 지킬 생각만 하고 있음 아무리 생각해도 못난 짓이다.   우리 사회의 '신토불이' 에는 일종의 기피증과 문화적 폐쇄성이 교묘하게 숨어  있다.  기피증이란 자기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해,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싫어하거나  불 안하게 느끼면 미리  도피해버리는 증세다. 그리고는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핑계를 만들게 된다. 핑계 대지 말자. 입장 바꿔 생각을 해보자.   한민족의 건강은 신토불이가 책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 민족의 미래는 노자의  무위자연으로 열릴 것도 아니다. 못났으면  빨리 고치고, 좋으면 나가서 알리자.  뭐 그 리 겁낼 일이 많은가.        술 한잔이 망친 나라   한국사회는 유난히 술을 많이 권하는  사회다. 오죽하면 '술 권하는 사회'  라는 제목 의 소설까지 있었을까.   한국사회는 사실 술 한잔에 무너져 내리고 있다. 법조 비리를 둘러싼 정의와 항명과  돌팔매질의 아수라장을 보면서 우리는 한국사회 구성원  모두가 들이켰던 한잔의 술을  만나게 된다.   나는 강의 시간에 틈만  있으면 한국은 '회식' 때문에  망할 것이라고 목청을 높이곤  한다. 회식이란 뭔가? 대개 직장을 비롯한  모든 조직에서 내부 구성원들이 단합을  위 해 흔히 갖는 먹기 모임이다. 그런데 돈은 누가 내는가? 회식에 참가한 사람들의 대부 분은 누가 돈을 내야 하는지 알고 있고, 그것을 아는 '장'들은 언제나 주머니를  털어야  한다. 이것을 못하면 그는 한국에서 '장'이 될 자격이  없다. 심지어 교수도 밥을 잘 사 주어야 인기 관리가 되지 그렇지 않으면 정말 완전히 '실력'으로 버텨야 한다.   일본인들도 회식을 즐긴다. 하지만  돈을 낼 때는  거의 대부분 동전까지  세서 자기  것을 셈한다. 물론 어쩌다 한번 접대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한국과 비교해볼 때  썰렁 하리 만치 자기 것에 대한 계산들이  분명하다. 또 접대를 한다 해도 가벼운  우동이나  돈까스 정도가 고작이다. 특히 학생들의 경우, 이러한 문화는 더욱 선명하게 차이가 난 다. 나는 이런 모습을 비교하면서 한국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만일에 너희들이 힘들여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이 있다면, 그  돈으로 친구들에게  밥을 펑펑 사주겠는가?"   답은 물론 '아니다'다.   한국인들이 회식을 즐기는 이유는 공돈이  있기 때문이다. 조직 내에 공돈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함께 먹자'는 공범심리가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각자 번 만큼  돈 을 받고 돈을 쓰는 문화가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공짜  심리가 어느 조직에나 깔려 있 는 것이다 그래서 마련된 것이 판공비다.   일전에 나는 어떤 일을 하며 '장'을 맡아본 일이 있다. 그 조직은 나에게  판공비라는  별로 많지도 않은 비용을 책정해주었다. 나는 그 비용을  쓰지 않았다. 물론 일은 판공 비가 없이도 가능했다. 밥은 내 돈 내고 먹으면 되고 차는 녹차 타서 마시면 그뿐이니 까 말이다. 담당자는 판공비를 빨리 가져가라고 독촉을  했다. 장부 정리가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끝까지 그 판공비를  사용하지 않았고, 그 돈의 행방은  모른다. 물어보 지도 않았다.   한중일 3국을 돌아보면, 공돈 쓰기 문화가 가장 심한 나라는 중국이다. 그 나라는 사 회주의 국가다. 모든 돈의 관리를 국가와 조직이 맡아서 한다. 개인들은 봉급만을 받을  뿐 나머지 공적인 일의 처리는 모두 영수증만 내밀면 나라에서 다 지불한다. 그러니까  돈을 쓴 곳이 '공적인 곳'이라는 증거만  있으면 얼마든지 쓸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바 꾸어 말하면 '증거'만 있으면 돈은  얼마든지 쓸 수 있다는 이야기다.  단순화시키긴 했 지만 중국의 부패는 바로 이렇게 진행된다.   중국인들은 식당에 한번 모여들면 접시가 테이블에 겹으로 쌓이도록 음식을 시킨다.  그리고는 부어라 마셔라... 오죽하면 정부에서 '공짜 술 안 마시기' '음식 지나치게 시키 지 않기'란 구호까지  만들겠는가? 그들이 이렇듯  음식을 많이 시키고  죽어라고 먹는  이유는 그 돈이 전적으로  남의 돈(국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 있는 지식인들은  '츠콰(먹어서 망할 것)'라는 개탄을 서슴지 않고 있다. 한국은 이보다는 조금 낫지만 일 본에 비하면 한참 멀었다.   공짜 밥을 먹여야 되니 시멘트도 조금 덜어내고 철근도 조금 잘라낸다. 그렇게 집을  짓고, 다리를 짓고, 백화점을 짓는다.   그런데 왜 남의 돈으로 술을 마시고 밥을 먹으려 들까? 제 밥값은 제가 내야 정상인 데 이런 단순한 상식도  모르니 나라가 엉망이 될  수밖에 없다. 그저 밥만  보면 그게  누구 밥인지 모르니 늘 밥그릇 싸움이고, 남의 밥그릇을 넘겨다본다. IMF의 원인 중의  하나가 한국은행과 재정경제부의 밥그릇 싸움이었다고 하니 밥 한 그릇이 부른 재앙치 고는 기네스북 감이다.   얼마 전 한 경제잡지의 부탁으로 타이완 무역대표부(국교관계가 없어 서로 대표부를  두고 있다)의 릴존시엔 대표를 인터뷰한 일이 있다.   "같은 동양 사회지만 타이완의 공무원들이 깨끗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혹시 포청천 이라는 깨끗한 조상을 두었기 때문은 아닌가요?"   "하하, 글쎄요. 물론 우리 사회도 아직  개선해야 할 점이 많습니다. 우리는  현재 싱 가포르를 모델로 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공무원 사회에 '공개' '공 평' '공정' 등 3개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안을 공개하고,  기회를 공평하게  주고, 평가를 공정하게 하는 것만이 사회의 부패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거리에는 교통경찰도 거의 없고(거의 모두 전자  시스템화돼 거리 곳곳엔 자동 카메 라가 설치돼 있다) 교통경찰의 노물 수수는 꿈도  못 꾸는 나라, 타이완. 일개 지방 여 검사가 기자회견을 하며 부당한 압력을 폭로하는 나라. 타이완.   이제 아시아에 더 이상의  호랑이는 없다. 세 개의  클린 국가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일본, 싱가포르, 타이완 같은 깨끗한 정부가 이끄는 나라들이 무너지는 한국을 딛고 새 로운 도약을 하게 될 것이다.   그까짓 공짜 술 한잔이 무에 그리 대단해서 자존심을 다 내던지고 껄떡거리나? 이제  아주 배고픈 시대는 지났고 자존심을 생각하면서 살아도  될 만한 나라가 되지 않았는 가? 언제까지 공짜 술에 취해서 비틀거려야 하는가?   하긴 역사의 촌지 앞에서 떳떳할 사람  없는 것이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고,  온 사회 가 다 흔들리니 연약한 각각의 인생을  어찌할 방도도 없다. 그래서 결국은 누구도  돌  던질 자격은 없어져버리고 마는 모양이다.    "너희 중에 공짜 회식에 참가하지 않은 자들만 돌로 쳐라."   밥 한 그릇, 술 한 잔으로 무너지는 우리 사회의 사내들. 때려 주기보다는 오히려 보 듬어주고 싶다. 너무도 불쌍해서.        억울하면 출세해라   '출세해야 산다'는 우리 한국인들이 벌이는 서바이벌게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 한 처방전이다. 그리고 한국인들의 이중성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키워드 중의 하나다.  수단과 방법에 관계없이 자리에 올라서고 '도장'을 쥐게 된  자는 천하를 호령할 수 있 다.   삐뚤어진 인생관의 씨앗을 심어놓은 왕조, 조선 왕조. 그 왕조의 탄생은 두고두고 한 반도를 곤경에 빠뜨리는 단초가 되고 말았다.   조선 왕조는 이제껏  많은 사람들에 의해  미화되어왔다. 거기에는  우리가 간과했던  이유가 있다. 조선 왕조가 멸망한 이후, 글을 다루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전통적인 한학 자들이었다. 그들만이 글을 쓸 수 있었고, 학문을 점유할 수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역 사와 사회 해석의 주체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학문적 사상적 고향을 미화하는 데 조 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후 일본이 한반도를 통치하던  시기, 일본은 이른바 식민사관 을 동원해서 조선을 폄하했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 모든 역사적 해석들은 이른바 '반식 민사관'의 깃발 아래 다시  한 번 왜곡되기 시작한다.  정당한 비평조차 일본적 시각과  비슷하면 '식민사관'의 누명을 뒤집어쓰는 수밖에  없었다. 이러니 우리의 현실이  제대 로 보이겠는가?   이전에 KBS TV가 주최한 '한중일 국민의식  세미나'에 참가한 일이 있었다. 서로의  국민 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갈 때 한 일이 있었다. 서로의 국민 문화에 대한 이야 기가 오고갈 때 '산케이 신문'의 한 특파원이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이제 한국도 일본인의 비판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만한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방청석에서 난리가 났다. 한  중년 노인이 일어나더니 '독립 투쟁'을  하기 시 작했던 것이다. 당황한 사회자가 말을 끊으려 했지만 노인은 끝까지 장렬하게  '애국심' 을 발휘하며 일본인 참석자를 혼내줬다.  하지만 웬일인지 나의 마음은 통쾌하지  않았 다. 데리고 갔던 4학년 학생들의 얼굴 역시 찜찜한 표정들이었다.   세계적 펀드매니저 조지 소로스는 성공의 비결로 상상력,  통찰력, 비판적 태도를 꼽 았다. 그는 모든 이론에는 본질적인 결함이 있으므로 항상 비판을 통해 이를 수정해야  위험에 빠지지 않는 다고 했다. 우리의 역사에도 많은  오류가 있었다. 그 오류에 대해  비판을 하겠다는 것인데 무엇이 그리 안타깝고 화가 날 일일까? 그리고 일본인은 한국  사람을 비판하면 절대 안 되는 것일까? 사실 전세계 민족들 중에서 일본인들만큼 한국 인을 적나라하게 알고 있는 민족이 또 있을까?   이제는 "우리의 단점을 지적하시오. 고치겠소." 하는  용기가 필요한 시점일 수도 있 다. 겉으로 욕하면서 속으로  일본 부속품 죄다  수입하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태도를  버리고 떳떳하게 배우고 비판받고 훗날을  기약해야 할 때가 지금이라고 생각한다.  과 학과 통신의 발달, 금융, 다국적 기업들의 빠른 행동들로  점점 크게 벌어지고 있는 국 력의 차이를 고려해볼 때,  때를 놓치면 그때는 정말  비참해질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쉽지 않기 때문에 해야만 한다. 특히 역사의 한쪽 끝은  열려 있고 언제든 역전승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는다면 말이다.   한국과 일본의 애증은 뿌리가 깊다.  그 중에서도 고려말에 설쳐대던 왜구들이  조선  왕조를 만드는 데 한 부분 공헌을 했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이 무슨 말인가?   고려 우왕 때인 1378년경, 왜구는 수시로 한반도로 건너와 약탈을 일삼았다. 주로 대 마도에서 출발한 대규모의 왜구들은 남해일대를 휘젓고  다니며 우리 백성들을 약탈하 고 부녀자를 강간하는 일을 저지르고 있었다. 특히 이들 주력부대는 지금의 지리산 근 처까지 침입하면서 내륙을 쑥밭으로 만들었다.  이때 이성계는 그의 다섯째 아들  방원 을 데리고 나가 왜구들을 몰아냈다.  그런가하면 8월에는 다시 지금의 북한  황해도 지 역으로도 왜구가 침입했고, 충청도, 전라도  일대도 제 집 드나들 듯했는데,  기록을 읽 다보면 더 읽기 싫을 만큼 왜구에게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이때마다 이성계는 뛰어난  실력으로 왜구들을 물리치곤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왜구와의 싸움은 이성계의 군사적 세력을 불려주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고려 때는  병졸들을 나라에서 장부를  가지고 관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힘있고 돈 있는 군벌들이  나름의 군사력을 보유할 수 있었다. 힘이  있 으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법, 더구나 무장인  이성계의 어깨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온 나라가 주목할 만한 군사력을 갖추면서 나라에는 유언비어도 떠돌았다.   "목자가 득국 한단다."   목자는 바로 한자 이를 풀어놓은 말장난이다. 고대에 왕이 되고 싶은 인물들이 애들  떡 사줘가면서 흔히 만들곤 하는 말장난인데 이성계도 이런 장난을 쳤다.   힘있겠다. 유언비어도 깔아놨겠다 야망 달성을 위한 준비는 되어가지만 결정적 명분 이 서지 않았다. 한데  찬스가 왔다. 바로 고려가  결정한 요동 땅  정벌이었다. 요동은  압록강 건너에 널려 있는 지금 중국의 리야오닝 성으로 옛날에는 고구려의 영토이기도  했다. 당시 중국은 몽골이 세웠던 원나라가 망하고 한족들이 다시 세운 명나라가 지배 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고려에게 지나친 요구를 해오자 고려 우왕은 요동 정벌을 명했 던 것이다. 하지만 이성계는 다음의 네 가지 이유를 들며 반대했다.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칠 수 없습니다. 둘째, 농사철에  군사를 모으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셋째, 원정을 하면 왜구가 파고들 것입니다. 넷째, 비가 많이 오고 무더 우므로 사기가 떨어지고 질병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왕은 정벌은  강행했다. 영을 받은  이성계는 평양을 출발했다.  그러나, 그는  한반도와 중국을 가르는 압록강 안의 작은 섬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리고 만다. 1388년  5월 22일 역사 속의 위화도  회군이었다. 당시 명나라는 몽골의 원나라와  전쟁을 겪은 뒤라 대단히 어수선하던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느릿느릿한 구릉으로 가득한 리야오닝 성.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 밭이 하늘 아래 지 평선으로 사라지는 비옥한 땅 리야오닝  성. 지금도 고구려의 수많은 유적들이  지하에 서 후손을 기다리는 땅 리야오닝 성.   어떤 역사학자는 이성계가  본래부터 야망을 품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미안해, 본의는 아니었어." "하다보니 왕이 되었어." 연희동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말 투다. 이제 와서 그런 해석이 무슨 위안이  될까? 더구나 훗날 그의 행동을 보면  별로  신빙성도 없어 보이는 그런 해석이.   1392년 7월 17일. 이성계는 드디어 조선의 왕이  된다. 그의 할아버지들은 몽골이 지 배하는 원나라에서 벼슬을 했고 몽골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 은 우루쓰뿌화라는 몽골 이름으로 쌍성이라는 곳의 지방 관리로 있었다. 그후 그는 고 려 공민왕이 북방을 공격할 때 관군에 기밀을 넘겨주면서 고려로 들어오게 된다. 그후  그는 고려에 충성하면서 아들 이성계를  출세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아들  이성계 에게 어떻게 교훈했을까? 그 교훈의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이성계는 출세를  했다. 나라를 키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개인 출세의 기회로 바꾸어버린 인물이  드 디어 끗을 이룬 것이다.   우리 역사에는 뜻을 이룬 사람들이  참 많다. 이성계가 그랬고, 이완용이  그랫고, 이 승만이 그랬고, 박정희가  그랬고, 전두환이 그랬다.  그들은 모두 새로운  나라의 문을  열었고, 그들의 행동은 모두 '추인'되고 말았다. 이성계 이후 모든 과정은 '결과'를 통해  속죄될 수 있었고, 큰 도둑이 될수록 칭송은 더욱 자자하게 되었다.   그래, 일단 벌려놓고 보는 거야. 목소리 큰 놈이 임자야. 먼저 집어넣는 놈이 임자지.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 있냐? 억울하면 출세해!   많은 역사가들이 이성계의 출세를 여러  가지 미사여구로 축하해주고 있다. 이제  와 서 어쩔 거냐고.        법치가 되지 않는 이유   동양사회가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문제점 중에서 한국사회에 만연한 채 발전을 더 디게 하는 현상으로 하는 세 가지를 꼽고 싶다.   첫째, 법치가 되지 않는다. 둘째, 늘 과거에 묻혀 산다. 셋째, 주검을 숭배한다.   이 세 가지는 유교의 특징 세  가지를 뒤집어 놓은 형태에 불과하다. 전통  유학자들 이 주장하는 유교의 두드러진 특징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인문의식. 둘째, 온고 지신. 셋째, 조상 숭배.   인문 의식. 전통 학자들은 이 인문 의식을 들어 동양적 인간 존중 사상의 뿌리로 해 석하기도 한다. 서구의 신본주의적 사고에  반해 인간이 주인이 되는 유교  사상이야말 고 가장 인간에 어울리는 사고며 철학이 아닌가 반문하면서.   그리고 여기서 파생하는 것이 바로  부모 자식간의 유대 관계와 효  사상이다. '나'는  부모를 통해 나왔으니 부모에 효도해야 함이 마땅하다는 논리다. 그리고 이 효도 사상 을 도용한 것이 바로 국가에 대한  충성 강요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마땅한  것처 럼 국가에 충성하는 것이 인간 된 도리라는 것이 논리라면 논리다.   부모에 대한 효도와 국가에 대한 충성을 동일선상에 놓고 복종을 강요하는 사회, 이  사회에서 가능한 것이 바로  법을 가진 사람  마음대로 법을 주무르는  인치 문화이다.  이 효도와 충성의 공간에 들어서는 것들이 이른바 힘을 가진 기관들과 나이 많은 사람 들이다. 힘을 가진 기관들은 스스로를 국가로 자리매김하며  사람들 위에 군림한다. 나 이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를 부모로 자리매김하며 군림한다.   때문에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하다못해 주민등록등본을  떼러 동사무소를 가려  해도 왠지 싫다. 그들이 인상을 쓰면 인상을 써서  싫고 웃으면 가증스러워서 싫다. 제 일 힘없는 공무원을 예로 들어 쬐끔 미안하긴 하지만 여전히  찜찜한 건 부정할 수 없 다. 나이 많은 사람들 역시 언제나 부모 대접을  받고 싶어한다. 지금도 길거리에서 심 심찮게 터져나오는 큰소리는 "넌 부모도 없어?"다.   국가와 부모를 혼동하고 부모와  전혀 다른 사람들의  삶을 혼동하는 이  사회. 서로  적용되어야 할 규범이 전혀 다른데 이것을 혼동하는 사람들의 사회. 극장표 들고 김포 에서 하와이 가는 비행기 태워달라며 지르는 아우성과 무엇이 다를까?   다 아는 이야기지만 법은 영어로 'law'다. 또 규칙은  영어로 'rule'이다. 어설프게 이 런 이야기를 꺼내는 데는 이유가 있다. 법치국가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미국, 그들은 법 을 이야기할 때 'the rule of law',즉 '법의 규칙'을 묶어 이야기한다.   클린턴의 섹스 스캔들. 우리나라같이 정치력이 뛰어난 나라  같으면 적당히 여당, 야 당, 출입기자들이 모인 요정에서 결판이 났을 일을 머리가 둔한 미국 의회는 복잡하게  회의를 하면서 길게 길게 해결해갔다. CNN 등을  통해 생방송되던 상원 법사위원회에 서 의장은 가끔씩 'the rule of law'를 외쳐댔다.   또 우리보다 더 한심한 미얀마의 정치 현장을 보도하는 가운데 야당 총재가 CNN의  'Q&A' 프로에 나왔다. 거기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법은 있는데, 그 법을 집행하는 규칙은 없습니다."   그도 역시 'the rule of law'를 외쳐댔다.   어느 나라나 법은 다  있다. 조선시대에도 위대한  법전 '경국대전'이 있었다. 그러나  그 법은 엿이었다. 늘이면 늘어났고  자르면 잘라졌다. 엿장수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법은 있었지만 'rule'이 없었던 거다.  어느 누구에게도 법이 똑같이 적용되는  규칙, 그  규칙이 조선에는 없었고 한국사회에도 없는 것이다.   법이란 글자를 통해 고대 문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글자의 원형을 토대로 다음 과 같은 풀이를 한다.   고대 사회에서 시비가 있을 경우, 두 당사자를 물가에  앉힌다. 그리고 검은 양을 두  사람 등뒤에 세운 뒤 아무나 들이받게 한다. 잠시 후 재판 결과가 나타난다. 등을 받쳐  물 위에 엎어진 사람이 바로 범인이다. 재판관인 무당은 황당하기 그지없을 이 범인을  자루에 넣어 물 속에 빠뜨린다. 법이라는  글자에 '물 수'자가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 문이다. 오른쪽의 '거'자는 검은 양의 모습과 주술을 지껄이는 상황이 변화한  모습으로  '간다'라는 의미의 '거'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동양의 법은 바로 이런 해프닝의 배경을 지니고 있는데, 아직도 이 전설의 분위기가  완전히 가신 느낌은 아니다.    역시 '핏줄'뿐입니다요!   우리 스스로 우리를 말할 때 가장 많이 써먹는 상투어 중의 하나가 바로 '단일 민족  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우리 민족의 자긍심과 자존심을 지켜온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보자 우리가 정말 한 핏줄일까? 그것은 교묘한 거짓말에 불과한 것이 아 닐까?   TV를 보다보면 가끔 입양되었던 아이들이 부모를 찾기  위해 김포공항에 모습을 나 타내곤 한다. 그들을 볼 때마다 가슴 아프다. 철들고 가정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달으면 서 느끼는 감정이다. 언젠가 나는  상하이의 홍치야오 공항 대합실에서 비행기를  기다 리고 있었다. 갑자기 2,30명의 서양사람들이  희희낙낙 떼를 지어 들어섰다.  모두들 가 슴마다 갓난애들을 하나씩 안고 있다.  입양되어가는 고아들이다. 까만 머리털,  고물고 물한 손, 갑자기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 연민, 부끄러움, 분노, 콤플렉스 등등  한마디로  잡아내기 힘든 감정이 가슴에서 치솟아오른다.  그러면서 한 가지 질문을 떠올리게  된 다.   '왜 동양인들은, 아니 한국인, 중국인은 아이들을 밖으로 내보내지?'   전세계에서 핏줄과 문화라면 서로 가장 '순수하다'는  두 민족이 왜 자신들의 핏줄을  나라 밖으로 수출하는 것일까? 내세울게 없어서 단일  민족의 혈통을 가장 자랑스러워 하는 사람들이 왜 애들을 밖으로  내보내는 것일까? 그 아이들의  혈통은 어떻게 되든  내 혈통만 깨끗하면 된다는 생각 때문일까? 전세계 고아  수출 상위 랭킹을 다투는 이  두 나라의 핏줄 논리는 도대체 뭘까?   무슨 김씨 무슨 파의 자손들 외에는 모두 인간도 아니라는 못난 생각을 아직도 버리 지 못하는 우리가 남의 나라, 남의  문화를 아무런 저항감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코스 모폴리탄적 가치인 세계화의 흐름에서 밀려나고 도태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지나 이제는 인류 문명의 범세계화의 담론이 평상적인 것이  된 지금, 민족주의는 쑥스러운 테마가 되어 버렸다.  하물며 민족주의보다 하층의 정서 라고 볼 수 있는 혈통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핏줄 문화의 현주소는 우리를  더 할 수 없이 부끄러운 사람들로 만들고 있다.   얼마 전 집에 한 권의 책이 날아들었다. '나의  조상은 누구인가?'란 부제가 달린 '족 보'였다. 그 족보에  의하면 나는 왕손이었다.  신라시대 경주의 나뭇가지에  걸려 있던  황금 궤짝(나무 궤짝이 아니다)에서 태어난 '하늘이  내려준 아들(꼭 아들이다)'이 나의  조상이란다. 조상도 모르고 살아가는 내 처지가 딱해보였는지 보내온 족보였다.   그 족보에 의하면 나는 왕손이고 현직이 교수니까  조선시대의 직급으로 보면 종3품 에 해당되고 벼슬은 군수급에 해당한다는 친절한 해설이  붙어 있었다. 거기에는 '저명  인사' 난에 여러 사람의 이름과  직급이 있었다. 죽 훑어보니 최하가  교수였다. 나머지 는 그 대단한 국회의원, 사장, 회장들이었다. 장사꾼은 하나도 없었고, 카센터 주인들도  없었다. 파리바게트를 경영하는 사람도 없었고, 택시기사도 없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 는커녕 컴퓨터 AS숍 주인도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 이름도 없었다. 그 '저명 인 가'들이 한 일은 이런 것이었다.   "명문 거족으로 명신, 대유, 석학들을 배출시켜 나라에 공헌하고 명문의 긍지를 심어  신라와 근대를 잇는 역사적인 사건 속에서 김씨의 입김이 닿지 않은 일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현대에 와서도 많은 김씨들이 조국의 발전과 가문의 번영 을 위하여 명문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고등학교 때 '플레이보이'를 몰래 보다 선생님에게  걸렸을 때보다 더 황당한 느낌이 었다. 그 책을 보지 말았어야 했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숨이 답답해졌다. 그래 좋다. 왕손이라고 치자. 그런 그 대단한 황금 궤짝은 누가  가져다 놓은 것인가? 임자를 못  는다면 그 잘난 경주 김가의 조상은 사생아가 된다.   중국의 고대 언어와 문화를 연구하는 입장에서  볼 때, 한국 학계의 가장  큰 병폐의  하나는 지나친 문화적 콤플렉스다. 관련된 논문과 저서들 속에는 있어야 할 학문적 치 열함과 담담한 분석보다는 '민족의 우수성'을 고취하고 싶은 비분강개가 몃몃 사료들을  근거로 자라나고 있다. 한 핏줄, 단일 민족론이 단지 중화사상에 대항하기 위한 반발이 며, 일본 식민사관을 벗어나기  위한 탄력 때문에  중심에서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더  튕겨져나간 것이라면, 우리 역시  같은 함정에 빠진 모습이  되고 만다. 그리고 그것은  허세가 되고 만다. 역사적 허세는 더 큰 허세를  불러오게 마련이고, 허세의 연속은 결 국 더 큰 좌절을 초래하고 만다.   중국과 한국, 일본에는 서구의 오리엔털리즘적 비판에서처럼 못난 모습을 허세로  커 버해보려는 자격지심이 도사리고 있다. 이  자격지심은 중국과 일본에게서 겪은  900번  이상의 전쟁의 고통속에서 더욱 증폭되어 중국, 일본과 관련된 모든 역사는 우리가 '세 계 최초'이며, '일본에 건네준' 것으로 해석하고 마는 못난 심성으로 굳어지고 말았다.   물론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자신의 위치를 우주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싶은 본능이 있 다. 하지만 '민족'을 사수하려는 반발이 기조를 이루는 역사 해석은 이미  해석으로서의  자격을 잃고 있는 것이며, 이를 토대로  이루어진 민족 정서 또한 하나의  허상에 불과 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모두가 왕손인 나라   까놓고 얘기해서 우리가 단일 민족이어서 어떻다는 것인가? 또 아니면 어떤가? 설사  단일 민족이었다 하더라도, 수많은 중국의 핌입과 몽골의  긴 지배, 자기네 놀이터처럼  경상4도, 전라도, 충청도를 드나들던 왜구들(그들은  문화적으로 혈연적으로 이 지역들 과 관련이 있다)의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실크로드 서쪽에서나 볼 수 있는 서역인들의 특징인 곱슬머리, 흰 피부, 쌍꺼풀을 한  수많은 경주 김씨, 전주 이씨들, 여진족들의 특징일 수 있는 외꺼풀에 검은 머리,  작은  어깨의 황씨, 박씨, 정씨들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왜인들의 특징인 검은  눈썹, 작은 입, 작달막한 키를 유달리 해변 도시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현상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는가?   고고학적 발굴을 토대로 보면, 기원전 4000 - 3000년경 동아시아에는 신석기 문화가  형성되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볼 부분은 황허 서쪽 일대를 포함하는 앙소 문 화, 산동 반도 일대를 포함하는 대문구 문화, 그리고  리야오닝 성 일대를 포함하는 홍 산 문화 지역과 산동 일대의 대문구 문화 지역이다.   이들 지역 중에서 가장 북방에 있던 홍산문화는  다시 하가점 하층문화로 불리는 청 동기시대로 이어지는데, 사실은 이 문화가 오늘날 한반도로 '민족들'을 송출한 주요  뿌 리가 된다.   하지만 이 일대에는 수백 개의 크고 작은  부족들이 있었고 이들의 근원에 대해서는  전혀 파악할 길이 없다. 그저 여기저기(말이 여기저기지 수십, 수백킬로미터가 떨어진) 에서 파헤쳐진 발굴품을 토대로  커다란 문화권의 줄긋기를 하는  것이 이른바 역사이 고, 문화권 구분이기 때문이다. 이들 문화권이 우리 한반도의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 기 때문에 우리는 이 지역 문화를 고조선과 연결시키고 부여, 고구려와 연결해 해석하 고 추리하고 있는 것이다.   학문 연구를 너무 단순화시키고 우스갯거리로 만들어버릴  위험성이 없는 것은 아니 지만 때로 단순한 상식이 수십 년의 연구를 뛰어넘을 수도 있는 것이 인문과학의 약점 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 가설들을 근거로, 그 많던  부족들 중에 어느 부족이 어떤  경로로 어떻 게 한반도에 들어왔는가를 헤아리며 내 조상, 네 조상, 내 핏줄, 네 핏줄 하는 일이  우 스꽝스러워진다는 뜻이다. 문화 인류학자들의 정의를 빌지 않더라도 모든 국가는 본질 적으로 '혼혈 민족 국가'다.   중국측 기록을 보면 부여 사람들은 체격이 크고 성질은 굳세며 마음이 넓다고 했다.  중국의 역사서들은 대부분 황허를 중심으로  한 북방 문화권에서 주도해 써왔는데.  이  북방 문화권의 사람들은 양쯔 강을 중심으로 한 남방 문화권 사람들보다 체격이 큰 편 이다.  이런 사람들 눈에 '크게' 비친  부여 사람들은 현재 우리들의 체격을 이어준  조 상으로 연결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을까? 더구나 부여의 중심  지역이었던 쏭화 강  일대는 바로 현재의 러시아 국경과 맞닿아 있다. 고들은 눈이 크고 키가 크고 입도 크 다. 북방 종족과 피가 섞인, 동양인도 서양인도 아닌 사람들을 헤이롱짱 성에서는 흔하 게 볼 수 있다.  헤이롱짱 성의 수도인  하얼빈의 분위기에서는 상당  부분 러시아적인  인상이 숨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도시 한복판에 솟아 있는 러시아 정교 성당은 이  지역의 문화 혼합의 역사가 간단치 않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 러시아, 북한, 중국의 국경이 맞닿아 있는 동북의  가장 끝머리 훈춘 보세 구역에 서 북한의 초소와 러시아의 초소,  그리고 중국 세관원을 동시에 바라보면서  우리들의  '외줄의 역사 찾기'노력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를 실감한 적이 있다. 영하  25도 의 추위 속에서 국경의 삼각지대임을 뜻하는 차가운  돌비석에 주저앉아 멀리 능선 사 이로 보이는 북한 초소를 바라보면서 나는 갑자기 내 행동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우리 땅의 끝을 찾아보려고 오기는 했다면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민족이고 국경이고 하는 것은 수시로  변하 는 것이고 해석하기 나름인 것 아닌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국경이라고 그어진 그 선 들로 우리들의 삶을 재단해야 하는 것인지 하는 의문이 다시 떠올랐다.   국가며 혈통이며 법률이며 예술이며 상식이며 인간 관계라고 하는 것들이 결국은 차 가운 북풍이 부는 훈춘의 능선에 세워진 저  초라한 초소만큼의 의미밖에는 없는 것이  아닐까? 언젠간 사라질 저 초소, 그리고  그 안의 보초는 정말 국경을 지키는  것일까?  아마 그토록 위대한 사명감보다는 교대 시간이 더 기다려지는 평범한 사내에 불과할지  모른다.   무조건 넓은 땅은 다 우리  것이었고, 핏줄은 오로지 한 줄기였다는  '기대'를 역사에  라면 수프처럼 뿌려넣는 한 국물은 탁할 수 밖에 없다. 제대로의 역사가 보일 리 없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같은 맥락으로 우리 조상은 모두  왕손이고  양반이라는 한국인의 족보 자랑 정서  역시 어색한 콤플렉스의 발로임에 틀림없다.  누 가 물었나? 또 바꾸어보면 우리나라에 있는 약 200개의 성씨는 바로 그만큼 갈래가 일 정치 않은 집단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 도니다. 더구나 그들 모두가  왕손이었음을  강조하면 할수록 말이다.   역사를 자기중심주의적 입장에서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일에 익숙한 중국인들에 대해  독일계 중국학자 에버하르트는 이렇게 비웃은 일이 있다.   "모든 시대의 중국의 지배 엘리트들은 중국 문화와 사회의 단일성을  주장해왔고, 외 국의 학자들도 이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중국을 4,000여 년에 걸쳐 동일 성을 유지해온 세계의 유일한 문명으로 보고 싶어한다. 우리는 이러한 이론 안에서 전 통적인 나라들과 좀 근대화된 나라들에서조차 전형적인  국수주의의 강한 요소와 어떤  경우 인종차별주의의 요소까지 인식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도 이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이 비판은 지식인들에게만 해 당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식인들을 통해 세뇌된 한국인 모두가 이 비아냥에서 자 유로울 수 없다.   동북아 일대의 문화적 역사적 다원성을 인정할 수 있어야 우리는 동아시아 사회에서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자유스러워질 수 있고, 운신의 폭을 넓힐  수 있다. 먼 옛날 이  지역에 운신하던 수백 개의  부족들이 세운 문화는  모두 지역 문화였다.  그리고 이들  지역 문화들은 다양한 접촉과 충돌을 통해 섞이고 혼합되었다. 문화인류학적 자료들을  보아도 당시의 족외혼 풍습은 너무도  보편적인 것이었고, 정치적 이해를 위해  진행되 는 여자들의 거래 또한 흔한 일이었다.   여기서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우리 민족 최대의  관심사인  동이족에 관한 것이다. 동이족은 지금의 산동 일대에 거주하면서 황하 유역의 중국 상 족과 치열하게 세력 다툼을 한 종족이다. 이들에 대한 기록은 갑골문과 청동기에 주로  남아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하지만 대단히 강력하고 뛰어난 민족이었다. 그 런데 이들 동이족 역시 단일 종족은 아니었고 크게는 아홉 개 종족, 적게는 수십 개의  종족이 기원전 2000년 경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갑골문을 통해보면, 상족을  이은 은나라가 자신들의  동쪽에 있는  나라였기 때문에  '동인'으로 부르면서 점차  동이라는 'ㄴ탈락'의 유사음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때문에  사실 딴 이야기지만 동이족의 '이'자만을 가지고 '큰  활을 쏘는 민족'운운하는 것은 다 소 황당한 해석이 된다.  왜냐하면 그 글자는  동이족이 거의 사라져버린  한나라 때쯤  '사람 인'자 대신 대타로 등장한 글자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흥미있는 이유는 바로 이들  동이의 행방 때문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것으 로는 이들 동이는 아까 말한  하가점 하층문화권에 일부 동화되었으며, 일부는  바다를  건너 한반도 서쪽 해안으로 들어왔고, 일부는 멀리 일본으로 건너갔다.   특히 일본은 우리 민족이 부지런히 돌아다닌 것만큼이나 많이 싸돌아다녀,  동아시아  동북 지역 즉 중국의 동북부와 한반도  북부지역의 신화와 문화를 수집해놓은 '산해경' 에도 이미 기록되어 있을 정도다. 같은 맥락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다수의 동이족, 그리 고 한반도 서쪽 해안을 통해 다시 일본으로 흘러들어간 동이족등 이 지역의 종족 이동 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니 이런 상황을  알게 된다면 단일 민족 운운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고 많다. 더구나 한반도 어느  문화권과도 다른, 중앙아시아의 황금문화가  특징인 스키타이계의 신라가 긴 이동 경로를 가지고 한반도로 들어선 것을 고려한다면  한반도 내에서의 한 혈통 운운은 스스로의 어리석음만을 증폭시키는 결과가 된다.   우리는 더 이상 단일 민족이라는 문고리만을 잡고 있어서는 안 된다. 학문적 담론으 로서 '민족'과 핏줄' 문제가 원만한  해결을 보기 위해서는 일방적 부정이나  어설픈 학 술적 절충보다는 담담한 심정으로 자료들을 찾고 분석하려는 공감대가 있어야 할 것이 다.   단군의 곰이 반달곰이었든지 북극곰이었든지 그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어야 한다.  그 곰의 쓸개에도 관심이 없고, 더구나 그 곰으로부터 수혈 받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 다. 그저 나는 '단일 민족' 의 역사에서 벗어나 조금은 홀가분해지고 싶을 뿐이다. 동양 의 역사도 사랑하고 싶고, 서구의 문화와 역사와도 친구하고 싶은 마음이다.        찬호와 세리가 미국으로 간 까닭은?   한국에서 가장 신성불가침의 마력을 가진 단어가 무엇일까? '민족' 혹은 '민족주의'라 는 단어가 아닐까.   민족이라는 말은 그 자체가 '선'  궁극의 목적이기까지 한 단어다. 사실  한국의 역사 를 조금이라도 들추어보면 민족이라는 말이 이처럼  신성불가침의 얼굴을 하게된 까닭 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나는 IMF를 '자본종속' 운운으로 해석하는 민족적 울분에서 그 뒤에 숨어 있는 허탈 과 두려움, 그리고 부끄러움의 콤플렉스를 위해 미리 펄펄 뛰는 것이 분노라면 우리의 민족주의적 구호가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의 부끄러움도 점점 더 짙은 색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민족주의, 그 속을 뒤집어보자. 우리 사회 저층에 깔려 있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민 족주의적 정서가 오늘 이 사회에 공헌한 것은 무엇인가? 척화비의 주인공 대원군이 승 리했는가? 사대부들이 일제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막았는가?  해방을 우리 손으로 만들 었는가? 남북을 이어놓았는가? 전쟁을 막았는가?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는가? 투명하고  건강한 경제구조를 만들어 놓았는가? 무엇 하나 바꾸어 본  일도 없고 올바른 예측 한 번 변변히 해보지 못한 우리들이 여전히 우리 민족 만세를  외칠 수 있는 이유는 무엇 인가? 귀 막고, 입 막고, 눈을 가린 채 '우리끼리 만세'를 부르면서 미래 사회를 운운해 도 되는 것일까? 정말 우리들은 도도하게 변하며 흐르는 세계적 흐름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바뀐 것이 무엇이 있는가?   정치인들은 선거 벽보에 붙어 그 앞을 오가는 우리들을 여전히 비웃고 있다. 그들의  개인적 성취감을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주민등록증을 내보이고 화장지보다 조금 빳빳 한 투표 용지를 받아 기표소로 들어가 한 표를 던지는 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인가?(물 론 합법적으로 하루를 쉬게 해주는 것에 대해서는 감사를 표한다.) 선거 참가는 민주시 민의 권리 행사라는 알량한  입발림보다는, 차라리 그게  바로 이 땅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 방법, 바로  권력과 힘에 대한  복종과 예의라고 솔직히  고백이라도 해주기  바란다.   하지만 이 땅의 오피니언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정치인, 언론인, 학자들은 한통속이  되어, 민족주의 속에 마련된 기득권과 권위의 달콤한 꿀을 나누어먹고 있다.   정치인들, 당연히 그들을 믿지 말라. 그들은 본질적으로  유전자가 왜곡되어 있는 존 재들이다. 그들은 한 입에서 두 가지 말을  아무런 혀 물림 없이 내뱉을 수 있는  요괴  인간들이다.   기자들을 믿지 말라. 그들은 진실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그저 청국장처럼 냄새가 풀 풀 나는 현장을 보면서도  아무런 감정없이 채팅하듯 기사를  뱉어내는 고급 룸펜들이 다. 권력의 해바라기들이 되어 있는  편집 데스크의 심증을 충분히 헤아리면서  만들어 낸 원고들을 기사랍시고 만들어낸다.   학자들을 믿지 말라. 그들은 거짓과 위선으로 만들어진  가면이 없으면, 한 발자국도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빙충이들이다. 그들이 논문에 써대고 강의실에서 뱉어내는 말 들은 아무 속에도 써먹을 수 없는 그들만의 헛소리에 불과하다. 그들은 언제나 끼리끼 리 만나서 자리를 나누고, 적당히  등록금과 세금을 연구비나 학술보조비 따위로  나누 어먹으며 히히덕거리지만 돌아서기가 무섭게 서로를 물고  뜯고 비방하는 저열한 인간 들이다.   정치인, 기자, 학자들처럼 민족과  민주주의를 열심히 외치는  집단도 찾아보기 힘들 다. 그래서 찾아낸 우리들의  대안이 찬호와 세리, 그릭고  릭 윤이지만 이것이 해답이  될까?   찬호의 스트라이크와 세리의  버디 퍼팅, 릭윤의  미소에 일희일비하면서  손에 땀을  쥐어야 비로소 한국인인가? 그것이 나의 삶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그들의 개인적 선 택에 대해 왜 우리가 '애국적' 박수를 쳐주어야  하는 것인가? 그렇게라도 해서 그들이  사실은 돈 때문에 나간 것이 아니고 국위선양을  위해서라고 자위를 해야 마음이 편하 기 때문일까? 아니면 열등한 대리만족 때문일까?   21세기 미래학자들이 지적하듯이 이제 우리는 새로운 유목민 시대의 한복판에 서 있 다. 정보와 돈과 문화적  가치는 이제 한가하게 국경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것들은 시간과 공간의 벽을 뚫고 지구 어디로든지 치닫고 있다. 유목민들이 풀을 찾 아 양떼를 몰았듯이 이제 우리는 우리들의 삶을 담보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 야 하고,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 그런 지금, 한가하게  그들을 향해  박수를 칠 시간이  어디 있는가?  정치적 우울과  경제적 실연을  달래기 위해  마련된  3S(sports, sex, screen)의 구호품을 받아 정신적 삶의 한끼를 때워야 할 정도로 우리가  가치 없는 존재들일까?   나는 나로 살고 싶다.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님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우리들의 10대는 문화적 고아들이다. 한국이라는 문화적 공간  속에 살고 있지만, 그 들은 '한국 싫어'를 노골적으로 외치고 있다. 그렇다고 서구의 자식이 될 수도 없는  일 이다.   우리들의 20대는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세대들이다. 시대를 예측하지 못했던  지식인 들의 피난처인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세월을 죽인 결과는 졸업장과 동시에 수여도니 실 업 면허다. 이제 시간이 지나면 나이 제한에 걸려 입사 원서조차 쓰지 못하게 생겼다.   30대는 1회용 반창고다. 어설픈 지식을  다 써먹는 5년 후쯤이면 미국,  유럽, 일본에 서 밀려들어온 실력자들에게 밀려날 신세들이다.  이미 이들은 물 좋은 카페에서  밀려 나고 있다. 하지만 미련을 갖고 있다. 그래 봐야 후회의 시간이 조금 늦어질 뿐이다.   지금의 40대는 이미 용도 폐기를 언도받았다. 튈 만한  힘도 없고 감각도 없다. 그렇 다고 권위도 없다. 이들의 곁에는 정력이 최고조에 달한 마누라와 한창 등록금과 용돈 을 퍼주어야 할 아이들이 펄펄 뛰고 있다.   그 옆에는 엉거주춤한 50대가 있다. 어차피  이제 운명은 내가 결정할 수 없는  것임 을 경험으로, 직감으로 알아버린 이들의 마음은 스산하기  그지없다. 눈치나 보면서 연 명하는 것이 최고다. 이에 비해 나름의 퇴직금이라도 건진 60대는 노여워해볼 수도 있 다. '괘씸한 것들' 하면서. 차라리 행복한 분노다.   70대를 포함한 그  이산의 세대들은 가뜩이나  졸린 눈을 더욱  껌벅거린다. "도대체  어떻게 돼가고 있는 거야?" 하면서.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우리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문화적 폐쇄성에 있었다. 그 것이 우월의식에서 비롯되었건 자격지심에서  비롯되었건 간에, 결과적으로 우리들  삶 을 망가뜨리고, 새로운 미래를 담보할 수 없게 만든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대원군이 닫았던 문은 결국 포연과 함께 깨졌다. 이제 범세계화 시대로 들어서고 있 는 오늘, 우리가 다시 폐쇄적민족주의로 해답을 적어냈다면, 몇 장의 개량 한복과 김치  몇 포기는 더 팔 수 있을지 몰라도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은 헤어나기 힘든 함정에 빠지 게 될지도 모른다. 이제  21세기의 열차는 빠르게 달리고  있다. 한번 탈락하면 다시는  올라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개방이 없으면 개인도 사회도 국가도  죽어버리고 만다. 영국이 영어의 주도권을  미 국에 넘겨주고 만 이유 역시 거만한 우월의식과 폐쇄성 때문이었다.   이제는 문화적 공존을 위한 자세 전환을  할 때가 되었다. 아니 이미 지났는지도  모 른다. 한국인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확보해야  할 때가 된 것이 다. 폐쇄적 '민족적  아이덴티티'는 그것에 집착하면  할수록 더욱 더  우리를 불행하게  할지 모른다. 오히려 열린 마음과 유연한  태도로 나의 문을 열고 타인의 문화와  공존 할 수 있을 때, '우리 것'이 나름의 생존 공간을 얻게 될 것이다.   적절한 예가 될 수 있는 영어를 보자.   헌팅턴이 지적하듯이 이제 세계적 공용어가 된  영어를 더운 광범위하게 받아들인다 고 해서 정체성이 엉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영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한 문화권의 사고 가 영어화, 서구화된다고 보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지적은 한국어를 외국어에  오염시 키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전전긍긍하고 있는 많은 국수주의자들에게 적절한 어드바이스 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친구인 인도 국제대학 중문학과 교수  쿠마의 영어는, 뿌리는 라틴어였지만 영국  영 어와도 다르고 미국 영어와도 다른  독특한 인도식 영어다. 어려서부터 힌두어와  함께  익힌 영어가 그의 인도적 정체성을  망가뜨렸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 서 영어는 구제사회에서의 언어적 문화적  차이를 극목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그 리고 그들은 국제어인 영어를 이용해 자신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알리고 자신들의 몸값 을 높인다.   하지만 누구보다 한국적인 나는 그 잘난 영어  몇 마디를 못해 실력이 평가절하되기  일쑤다. 결국 외부의  언어인 영어를 국제어로  받아들이면 들일수록  문화적 정체성은  보호될 가능성과 기회가 훨씬 높은 것이다.   우리 문화에 대한 적극적 해체는 자기 비하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제대로  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3김의 DNA-'거시기'와 '챠라'   '로마는 왜 멸망했는가?'라는 책이 있다. 일본인 유케 토루가 쓴 이책은 로마  멸망의  원인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주변과 중심의 힘은 교체되게 마련이다. 로마는 주변과 중심의 역전을  솔직하게 받 아들이지 못했다."   자신들 외에는 모두를 '야만인'으로  규정하고 로마인의 단결을 위해  '개들을 몰아내 라'는 구호를 외쳐대던 그들, 공존이 아닌 지배에  즐거웠던 로마는 화려했던 역사만큼  비참한 몰락을 맛보았다. 아름다운 공존은 공존의 룰만이 담보할 수 있다.   1997년 겨울 대선이 있을 때 나는 중국에 있었고,  중국에서 결과를 들었다. 중국 중 원의 한 복판에 있는 안훼이  대학의 교수들과 대학원생들을 모아놓고 '한국문화의  어 제와 오늘'이라는 거창한 강연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때가 때인 만큼 대선 결과에 대한  질문이 쏟아져 들어왔다. 한국에  대해 지식이 많지  않은 그들은 왜  한반도의 서남부  지역에서 DJ에게 몰표가 쏟아졌는지 알 길이 없었다. 또  내 말끝에 묻어 있는 정치인 들에 대한 빈약한 애정 표현들은 전통적 카리스마와, 사회주의적 'Big Brother' 통제에  익숙한 그들을 무척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물론 답변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천천히 역사를 더듬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수준의 역사 상식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백제와 신라가 한반도 남부로 이주 할 당시 한반도 남부에는 이른바 3한이  있었다. 바로 한강 이남의 마한,  그리고 변한,  낙동강 유역의 진한이다. 그런데, 소백산맥 동쪽에 있던  변한과 진한은 남북을 관통해  흐르는 낙동강에 의해  하나의 지형구를 이루면서  통합되고 곧  신라에 흡구되었지만,  마한은 달랐다.   마한은 원래 한강 이남에 위치하고  있던 부족으로, 이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아직도  미스테리다. 흔히 고조선 세력이 흩어지면서 내려온 것으로 해석하지만, 중국에서 발해 나, 황해를 건너 한강을 따라 올라오다가 정착한 유민들일 가능성도 제시되고 있다. 어 쨌든 이들은 백제라는 이질 세력에 의해 남쪽으로 내몰린다.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지만, 백제와 마한의 두  세력은 말이 다소 달랐고, 주검을  다루는 묘지의 모습도 달랐다. 묘제란  원시적 생사관을 대변하는 것으로 문화의  갈래 를 다룰 때 중요하게 채택되는 고고학적 증거물이지 않은가? 때문에 동일한 서해안 지 역으로 보이는 충청도, 전라도의 내면에는  보다 재미있는 문화적 현상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즉, 크게 볼 때는 하나의 세력권이지만  내면에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세력이 잠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정당들의 어색한 악수와도 같이. 그 속에는 바로 정복자 백제 와 백제에게 밀려난 마한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백제에 의해 남쪽으로 밀려나던 마 한은 정주영의 아성인 아산만과 서울에서 고속도로로 1시간  거리인 천안을 잇는 일직 선상에서 한동안 방어벽을 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백제는 다시 금강 유역을 점령하 면서 마한을 영산강이라는 코너로 몰아넣는다.   바로 이 무렵, 왜는 언제나처럼 바다를 건너와 낙동강  하구를 중심으로 좌우, 즉 경 상도, 전라도 일대를 휘저으며 가뜩이나  불편한 마한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 다. 때는 서기 369년이었다.   새로운 정복자인 백제는 느긋했다. 쫓겨난 마한 유민들은 이래저래 심기가 불편해졌 다. 동일한 서해안 일대의 충청권이 상대적으로 비교적 느긋한 성격을 지니게 된 연유 를 해석할 수 있는 최초의 단서일 것이다. 물론 비옥한 토지, 금강 등의 풍부한 물,  온 화한 기후 역시 충청도 기질  형성에 한몫을 더 했을  것이다. '그려, 마음대로 햐아'는  바로 있는 자의 여유 내지는 거드름이 아닐 수 없다.   반면에 백제에게 근거지를  빼앗긴 마한은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새로운  정복자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까지 숙일  수야 없는  법, 그래서 찾아낸 화술이 바로 '거시기' 아니었을까? 나의 마음을 알리기 싫은  상대를  앞에 두고 이야기를 꺼낼 때 '거시기, 아니 거시기'  만큼 좋은 암호도 없을 것이다. 결 국 백제계의 충청에는  정복자의 느긋함이 서려있고,  마한계의 전라에는  고토 회복과  밀려난 자의 와신상담의 의지가 잠재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신라는 달랐다. 중앙 아시아의  스키타이계 문화를 배경으로 한 신라는  철제  병기를 들고 낙동강 지역으로 들어선다.  이들이 정확하게 어떤 경로로 이곳이  도착했 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시원한 답변은  없지만, 이들이 낙동강 유역의 수많은  철광과  거대한 숲을 목표로 내려왔을  가능성은 무엇보다 높다.  특히 고분 속의  철제 도끼와  정들이 이러한 역사적 해석을 돕고 있다.   때문에 신라 문화는 기본적으로 대장장이  문화이다. 거친 채굴과 제련의 문화는  단 발적인 동작과 소리를 낳게 마련이다. '헉 헉'거리는 풀무와 '쿵쾅'거리는 망치  소리 속 에서 늘어지는 사설이나 창이 불가능한  법이다. '밥도오, 아아는, 자자'로  축약되는 우 스개는 신라의 철기문화를 읽을 수 있는  흥미 있는 문화적 코드다. 빠른 결단과  강한  부정을 담은 '챠라!' 역시 같은 맥락에서 풀 수 있는  표현이다. 말 장신구와 광산 도구  등을 만들 때, 벌겋게 달군 쇠를 찬물에 담그는 순간 발생하는 '촤아' 소리만큼  강하고  열정적인 소리 말이다.   백제 계열의 해상 문화,  신라 계열의 철기 문화는  근본적인 출발이 다르다. 해풍을  예측해야 하고 돛을 만들고 키를 조절해야 하는  백제 문화와 철광석을 캐고 풀무질을  하고 마구를 두드려 만들고 말을  몰아야 하는 신라의 기질이  쉽게 화합할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1937년, 일본은 한반도를 샅샅이  뒤졌고, 조선 내의 모든  미신 습속들을 조사한 후  '부락제'라는 보고서를 만들었다. 보고서에 의하면, 조선에는  해양계 미신 습속과 대륙 계 미신 습속이 있는데, 서해안 일대에  있는 해신당 등의 사당들은 모두  해양계 미신 을 나타내는 장소로 다른  지역 등에는 없는 '물귀신'이  등장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 다. 원시 종교의 갈등이 때로 구성원들의  충돌을 낳곤 하는 고대 사회의 현실을  상기 해볼 때, 두 지역의 갈등은 역사와 농도가 꽤 깊은 편이 된다.   하바드 대학의 사무엘 헌팅턴이  '문명의 충돌'에서 지적하듯이, 종교  문화의 차이는  이데올로기적인 분할보다 더욱 근원적인 갈등을 초래하는  요인으로 궁극적 충돌을 피 할 수 없음이 사실이 라면,  말귀신과 물귀신과의 화해는 애초부터 글러버린  일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보면, 신라계의 YS, 마한계의 DJ, 백제계의 JP가 보여주는 성격적 특성과 정 치적 태도,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동네 사람들의 화해 역시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백제와 신라의 문화적 패러다임의 근원적 차이는 역사 속에서 지속된 정치적 배반들 을 통해 점차 거친 모습으로 변모해가면서, 화해의 길은 점점 멀어져간다.   서시 538년. 백제는 공주와 부여를 저울질 한 끝에 산으로 둘러 쌓인 협소한 공주보 다는 호남평야의 경영에 더  유리한 부여를 수도로  삼는다. 새로운 출발을  한 백제는  과거 자기들의 땅이었던 한강 유역의 땅을 되찾기  위해 고구려와 싸우며 일부의 땅을  회복한다. 그러나 이때 공짜 땅을 노리고 있던 신라의  배반이 시작된다. 신라는 그 동 안의 동맹관계를 깨고 조용히 백제의 뒤통수를 친다. 열을 받은 당시의 백제왕 성왕은  친히 원정길에 오르지만 신라의 복병에 의해 죽고 만다.   그 다음은 유명한 한국의  삼국시대다. 이 시기에는,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상황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백제와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내린 묘한 처세적 해석이다. 백 제 혜왕의 아들인 법왕은 자신이 즉위하자마자 모든 살생을 금하는 칙령을 내려, 민가 에서 기르던 사냥매들까지 훨훨  날려버렸다. 물론 모든  사냥도구 역시 불태워버렸다.  그러나 신라는 어떠했는가? 중국에서 불교를 배우고 돌아온 원광법사는 이른바  '세속5 계'에서 '살생유택', 즉 골라 죽일 수 있다는 살인면허를 부여한다. 더구나  신라의 김유 신은 백제로 첩자를 보내 기밀을  입수하고 유력 인사들을 포섭하는데 성공했다.  반면 에 백제는 이상하리 만치 첩보전에 무관심했다.   이 때문에 007이 된 신라가 미륵불의 백제를 간단히  제압할 수 있었음은 자명한 일 이었다. 더구나 신라는 당시의 역동적인 국제관계의 변화에 적응하며 당나라를 끌어들 이고 있던 시점이었다. 결국  백제는 3,000궁녀를 끌어안고  백마강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시의 도시, 꿈의 도시'였던 백제의 멸망은 두고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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