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국 내부의 위기 로마의 영토 확장은 연달아 성공했지만, 로마 본토에서는 불화와 분쟁이 점점 커져갔다. 그런 분쟁의 핵심은 선거 제도와 정치관행 때문에 지배계급이 관직을 독점한 데에서 온다. 관직독점 현상은 두 가지 문제를 야기한다. 첫째,
로마의 기둥인 농민들이 몰락했다. 자영농의 몰락에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그 중 근본적인 원인은 2차 포에니전쟁 때 쓰인 엄청난 전비이다. 만성적인 전쟁상태가 계속 되었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계속 해서 군인들을 징집해야 했고, 이 때문에 버려진 농지가 황폐화되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이들이 황폐화된 농지에서 추수를 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는데, 추수 때까지 버티려면 빚을 지는 수 밖에 없다. 이 빚은 결국 농민들을 파산상태로 몰아넣게 된다. 한니발이 장악했던 이탈리아 남부의 인적물적 손실 역시 어마어마했다. 둘째, 영토확장으로 부를 거머쥔 신흥귀족들은 그 돈을 가장 안전한 투자처에 넣고 싶어했다. 그것은
몰락한 자영농의 땅을 싼 값에 거둬들여서 노예에게 농장을 맡기는 것이었다. 심지어 땅을 뺏긴 자영농들은 소작인 지위조차 얻지 못하고 정복지에서 수입해온 외국노예들에게 밀려났다. 외국노예들의 임금이 저렴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로마의 부는 모조리 대농장 지주들에게 돌아갔다. 자영농들은 발붙일 땅을 잃고 도시로 몰려든다. 그들은 명목상으로야 로마시민권자였지만 실질적으로 최하층 빈민이었다. 도시로 유입된 몰락농민들도 어쨌거나 투표권은 있었기에, 야심찬 정치인들에게 돈을 받고 투표권을 행사했다. 정치인들은 관료가 되면 더 큰 돈을 벌 수 있었기에 공화정의 정치는 더더욱 돈에 의해 좌우된다. 이런 현상이 심화되어 고리대금업자가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지경이 이른다. 그런 와중에도 동맹시들이 늘어나고 시민권자들이 늘어나면서 투표권 인플레이션은 가속화되었다. 2. 병역의무 포에니 전쟁 이후로 로마는 더 많은 병정들을 필요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병16년, 기병10년의 징병제는 가혹한 의무였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병역의무에 대해 불만이 쌓여가게 되었다.
bc107년에 마리우스는 병역을 위한 재산자격조건을 폐지하였다. 이로서 가난한 군 지원자들이 군대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마리우스의 징병제 개혁안이 실시되자 이제까지의 징병제도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징집자격을 낮추는 것이 해결방법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이들은, 로마시민이 아닌 자들에게도 군복무를 마친 후에 시민권을 부여하는 방안을 고안했다. 이 때쯤되자 군대는 공화정의 통제를 받기만 하는 집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새로운 정치세력이 되는 경향을 보인다. 속주에서 신망을 얻은 마리우스같은 장군은 군대를 세력기반으로 하여 정치계에 뛰어들었다. 이는 결국 공화정이 몰락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가이우스 마리우스. 그는 병사와 똑같이 힘든 생활을 하면서 병사들의 신뢰와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는 공화정 몰락의 신호탄으로 여겨진다. 3. 그라쿠스 형제 자영농이 몰락하고 군인들이 정계진출을 하자, 이탈리아 중부의 빈부격차는 더욱 심해졌다. bc2세기 말 호민관인 그라쿠스 형제는 토지개혁과 민회 권한을 신장시키는 개혁안을 주장했다. 형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전멸위기에 처한 원정군을 협상으로 구해내면서 민중의 영웅이 되었다.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그에게 기존 정치계가 손을 내밀었고, 정치계에 입문한 그는 토지재분배 안을 주장하면서 민중을 직접 설득했다. 자신이 제출한 토지개혁안에 거부권을 행사한 호민관을 쫓아내야 한다고 민중들을 선동하였고 민중이 이에 호응하면서 로마의 정치 상황은 혼란에 빠졌다. 그는 관례적으로 연임이 허용되지 않던 호민관에 평민들의 지지를 근거로 연임하기 위해 출마하였고, 선거 당일 재선이 확정적이라는 소식을 들은 그라쿠스 반대파는 철제곤봉으로 무장하고서 광장에 모여있는 그라쿠스와 그 지지자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그라쿠스가 죽은 후, 원로원은 평민들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농지 개혁 법안을 그대로 통과시켰다. 그러나 법안은 통과만 되었을 뿐 중심인물을 잃고서 순조롭게 집행되지 못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10년 후 호민관에 당선되면서 토지개혁을 시도했지만, 원로원의 노련한 수법을 당해내지 못하고 모든 시도가 좌절된 채 자살하고 말았다.
그라쿠스 형 동생 모두 시체가 티베르 강에 버려진 탓에, 그들의 무덤이나 비석 등이 남아있지 않다. 4. 독재정의 시초 마리우스 마리우스는 북아프리카와 갈리아에서 발생한 전쟁을 성공적으로 진압하면서 정치전면에 등장했다. 그는 군부를 개혁해 로마군을 강성하게 만들었지만 5년이나 연속으로 집정관에 당선되면서 공화국 마지막 한 세기를 지배한 일련의 군사령관들의 시초가 되었다. bc90년에는 이탈리아 전역으로 로마시민권을 확대하라는 동맹시전쟁이 벌어졌고, 포 강 이남의 모든 이탈리아에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으로 전쟁이 종결되었다. 이로 인해 로마 평민회는 유명무실한 기관이 되었다. 5. 종신독재관 술라
스파게티국의 전두환, 술라 술라는 젊은 시절을 방탕하게 보내고 다소 늦은 나이에 공직에 진출했다. 군에 들어간 그는 마리우스의 부관을 거쳤으나, 중앙정계에 입문한 이후에는 귀족파에 가담하여 마리우스의 반대편에 섰다. 그의 군경력은 승승장구로 일관되었는데, 실권자인 민중파 마리우스는 술라를 못마땅해했다. 로마에 있는 마리우스와 동방에 원정나가있던 술라는 곧 내전을 시작하였고 2년 간의 처절한 내전 끝에 술라군이 승리를 거둔다. 로마에 입성한 술라는 수백명의 반대파를 숙청하고 공포정치를 시작했다. '독재관'은 본래 비상사태에만 6개월 임기로 임명될 수 있었는데, 술라는 원로원을 압박하여 비상사태라는 구실로 '종신 독재관'이 되었다. 취임 후 2년간 열정적으로(?) 귀족의 이익을 대변하고서는 은퇴하였고, 1년을 편안하게 은둔하고서 생을 마감하였다(bc78년). 한편 술라가 노골적으로 후계자로서 육성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폼페이우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