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역시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부정형이다. '목적 달성'이라는 말에는 '정당한 과정과 절차'라는 개념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대답과는 달리 목적 달성을 위하여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수단을 사용해 버리곤 한다.
예를 들어, 권력을 잡기 위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다던지, 의회 표결을 통과시키기 위하여 무력을 사용한 다던지 하는 것 등이 바로 그것이다.
눈 한번 질끈 감고 편한 길을 택해버리면 ‘달콤한 결과’가 남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곧바로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존중 받는 과정과 절차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오로지 ‘명시된 결과’만이 모든 것을 대변하고 증명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중 받는 수단과 방법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편한 길을 통하여 목적에 더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그 반대였던 경우가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뒤늦게 과정상의 결함이 목적과의 거리를 더욱 더 멀어지게 했다는 사실들을 인지하곤 한다.
그것을 실감나게 느끼는 사건이 바로 이번 통합진보당 중앙위 파행이다. ‘대중적 진보정당’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강하고 참신하게’ 등장한 통합진보당은 단 몇 달 만에 가장 지지하지 말아야 할 정당이 되고 말았다. 조선일보가 진중권의 ‘대한민국의 진보는 죽었다’라는 말을 인용하여 헤드라인으로 내걸어도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 오고야 말았다.
이 사건은 나의 이번 총선 투표행위와도 일맥상통한다.
난 적어도 ‘비례대표’는 내 이상이나 가치관과 가장 가까운 정당을 선택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 동안 진보신당을 지지해 왔다. (사실 진보신당은 내 가치관과 가장 가깝다 라기 보다는 내 생각을 확장해 주는 정책을 들고 나왔기 때문에 일종의 지향점으로 지지했다)
하지만 이번엔 계속 고민했다. 무엇보다 통합진보당에 노회찬, 심상정, 유시민이라는 걸출한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에 진보신당이 초라해 보였기 때문이다(‘보였다’라는 수동적인 태도가 내 선택의 변수였다).
사실 선거 전날 한 선배에게 전화를 했다. 어디를 찍을 지 모르겠다고. 분명 통진당이 약진할 것 같고, 그것 때문에(나 같은 지지자 이탈로 인하여) 진보신당은 비례대표를 1명도 배출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그 때 선배는 이러한 내 심정을 안다는 듯이 한마디를 했다. “그래도, 나는 니가 진보신당을 찍었으면 한다.” 이 돌직구 같은 한마디가 나에게는 가장 큰 울림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나의 목적은 오로지 새누리당에 대한 야권의 승리였다. 대의민주주의 의사표현 행위라는 투표에 ‘승리’라는 개념이 들어가버려서 목적이 전도 된 감이 없지 않았지만, 난 결국 달콤한 보라색에 넘어가 '의석'을 택했다.
결국 진보신당은 득표율을 채우지 못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졌고, 통진당은 13명이나 되는 국회의원을 배출했다. 난 진보신당의 공당으로서의 소멸이 아쉬웠지만 선방한 통진당의 결과에 내심 만족했다.
그러나 영 찝찝한 감정을 지울 순 없었다. 통합진보당이라는 이름에서 오는 이질감 때문이었다.
우리나라는 ‘진보’라는 하나의 이름 안에 묶이는 두 섞일 수 없는 집단이 있다. 바로 ‘PD’계열과 보수세력에게 ‘종북’이라 불리는 ‘NL’계열이다. 규모의 경제를 실현시킨 ‘통합’이라는 그럴듯한 이름 아래 섞일 수 없는 두 집단이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모였다는 것이, 정말 ‘화학적 결합’이 될까 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었는데, 결국 고민이 더 필요했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 버렸다.
그러한 고민의 부재, 즉 ‘존중 받는 과정의 부재’끝에 선택한 결과는 이토록 참담했다.
당장 월요일부터 진보진영이라는 지붕을 쓴 집단은 가루가 되도록 공격받을 것이고, 그래야만 한다. 그들이 부당한 과정을 통하여 힘을 얻었다고 해서, 그에 대항하기 위해 부당한 힘을 기른다는 이토록 명분이 없는 것이다.
경기동부니, 이정희니. 다 싫다. 누군가의 비아냥처럼 북한으로 꺼지든지, 찌그러져 있든지. 제발 정신 좀 차려라. 니들과 함께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