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주주의와 중국의 그것과는 비할 수 없음. 다만, 중국사회주의가 박정희, 전두환의 독재 보다는 더 민주적이었다 할 수 있음.
천안문사태를 예로들면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대학생, 중소 상인(새로운 계급으로 부상 중이었음) 들을 중심으로 소요가 심했음.
공산당 지도부에서는 무력진압파와 대화해결파로 나뉘어 치열한 논쟁을 벌였음.
등소평은 은근히 무력 진압을 원했으나 대화해결파들의 주장이 일리있다고 판단하여 무력 진압을 미루고 이들이 나서 해결토록 지원함.
당시 천안문 광장에서는 대규모 국제행사가 열릴 예정이었음. 시위대가 이를 알고 점거 함.
대화해결을 원했던 공산당 지도부들이 시위대를 설득함 행사 끝나고 해라 행사할 때가지만 시위를 멈춰 달라. 다수의 시위대가 이를 수용, 합의했으나 소수 과격 시위대가 이를 어기고 시위를 계속함.
결국 국제행사는 장소 변경하여 조촐하게 진행 됨, 폼 잡으려던 등소평은 체면 제대로 구김. 난 여기서 이해가 안 되었음. 우리 같았으면 경찰 투입 진압을 해버렸을 텐데...
등소평 화가 존나 남. 무력 진압을 지시함. 조건이 있었음. 시위대에게 절대 발포해서는 안된다는 게 그것임.
인민해방군이 천안문광장으로 진입 시도함. 하지만 광장 진입을 위해서는 시내를 통과해야 하는 데 수많은 좁디 좁은 골목길을 지나야 했음. 레미제라블 영화를 생각하면 됨. 골목마다 시위대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바리케이트 치고 저항, 높인 건물에서 아래를 지나는 인민해방군을 공격함.
인민해방군 광장 진입을 못함. 등소평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판단, 기본 원칙을 고수하되 진입을 저지하는 자들에 한 해 발포를 지시함.
결국 인민해방군 천안문 광장 진입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킴.
천안문 사태에서 생긴 사상자는 광장의 시위대가 아니었음 실제 그들은 무사했음. 시내 골목에서 해방군의 진입을 무력으로 막으려 한 사람들이었음.
당시 공산당 지도부가 잘했다는 게 아님. 광주와 비교해보면 그래도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유혈 사태를 막으려 인내를 갖고 대화 시도를 했다는 것임.
시위 지도부가 합의를 지켰다면 소수 과격파들이 어기지 않았다면 천안문의 불행은 없었을 지도 모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