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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철도원
-야! 그만 좀 때려. 할 말 다 해 주잖아? 캐봐야 더 나올 것도 없다고!
일본형사가 이놈시키, 저놈시키 하면서 마구 때리는데 나중에 사진 찍어야 해서 그런지 티나게는 안 때려. 치사한 새끼들. 하는 꼬락서니하고는.
꼴에 일본이 얼마나 대인배적으로 취조를 하는지 세계만방에 널리 알리고 싶은가봐.
아예 안 때리는 건 아니고 몸뚱이나 팔 다리만 때리더라고.
옷 입으면 티 안 나는 데만 골라 때리는 거지.
근데 이거 아무래도 말야. 나중에 악질 조선인들도 이 수법을 배워서 같은 조선인 상대로 신나게 써 먹을 거 같아. 개시키들. 이러다가는 사형도 당하기전에 골로 갈거야.
좀 너무 했다 싶은지 옆에 같이 있던 검사가 그만하래.
하여간 밥도 제 때 못 얻어먹고 있으니까 당장 맞아 죽는 것 보다 배고파서 더 빨리 죽을 것 같기는 하더라고.
-아이씨, 때려죽이건 니들 맘대로 해!
밥 안주면 더 이상 진술도 없어!
뭔가 거꾸로 된 장면 같지? 근데 그게 그렇지가 않아.
검사나으리건 형사나으리건 목적은 다 똑같아.
일단 재판에 걸려면 피의자 진술을 받아야 하는데 나처럼 끝까지 버티면 답이 없어. 그러니 내가 지들 맘에는 안 들어도 일단 뭐든 먹일 수밖에.
-미안했다. 일단 먹고 다시하자.
내가 좀 더 신경 쓸게. 응?
진작에 그럴 것이지! 하여간 다급한 건 놈들이지 내가 아니라니까.
다시 말하지만, 내가 앞으로 한마디도 진술 안하고 모르쇠로 일관하면 곤란해지는 건 내가 아니라 저 놈들이거든.
게다가 놈들이 정식재판도 하기 전에 뒤집어씌운 대역죄에도 불구하고 내가 끝까지 게기는 데는 다 이유가 있어. 어차피 난 사형밖에는 길이 없으니까.
그런데 말야. 재미있는 게 하나 있어.
검사나 형사가 나랑 관련된 무슨 진실이라도 밝혀서 말야. 만에 하나라도 내가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이라도 돼 봐. 아마 일본에서 그 검사나 형사는 멀쩡히 일본에서 살아갈 수도 없을 거야.
다들 나를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거든.
요약하면 간단해.
나, 이봉창 취조는 잘해봐야 본전이고, 못하면 바로 모가지 날라가는 거지.
뭐. 밥도 먹었겠다. 입가심으로 차도 한잔 달라고 하니 득달같이 가져다주더라고.
원래 죄수대접이 이런가? 싶기도 하고.
좀 웃기기는 해.
기분도 나쁘지 않은데? 그렇게 원한다면 진술도 좀 해주지 뭐.
직장 잘 갈아타는 데는 재능이 좀 있다고 이미 말했고...
약국에서 일할 때야. 친하게 지내던 일본인 단골손님이 있었어.
내가 약국일이 좀 안 맞는다고 했더니, 마침 철도국에 자리가 있다고 면접 한번 보라는 거야. 급여도 이쪽이 훨씬 좋더라고.
그 길로 철도국에 갔더니 요새 말로 알바라고 하던가?
별로 확인하는 것도 없고 덜컥 내일부터 일하러 나오라는 거야.
겸사겸사 해서 약국도 그만뒀어.
그 때 내가 처음 철도국에서 배운 일이 말야. 조차계라고 해서 기차 배치나 철도연결을 주로 하는 전문직이거든.
알바부터 시작해서 꾸준히 한 일년 반 정도 열심히 하니까, 정식직원으로 올려주더라고. 이 정도면 엄청 운이 좋은 편이지. 뭐 동료들도 괜찮고 그런 대로 할 만 하겠다 싶었어. 나름 급여도 괜찮았고 꽤 안정된 직장이었거든.
하여간 내가 여기저기 좀 자주 옮기기는 했지만, 뭐든 한번 배우기 시작하면 적응은 엄청나게 빠른 편이거든.
솔직히 운도 좋았지 뭐. 당연히 안 될 거라 생각하고 갔는데 덜컥 취직이 됐으니 말야. 나 같은 보통학교 출신을 써 줄 번듯한 직장이 어디 있겠어.
근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어. 그렇게 철도국에서 일한지 한 3년쯤 됐을까?
이 정도면 나름 묵었다 싶었는데도 정직원이상은 도무지 승진이 안 되는 거야.
그때가 마침 내가 승진대상에 올라있을 무렵이었어.
나 같은 말단 정직원 바로 위에 하급 관리직이 하나 있었거든. 승진하려면 최소 3년 이상은 걸리고 평균 5년은 족히 걸리는 관리직이지.
웃기는 건 내가 1년 반 남짓 동안 알바에서 정직원으로 승진한 것도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했지만, 그런 나보다도 일본인 알바나 평직원들의 승진이 정말 빨랐어. 조선 사람은 뭘 해도 제자린데 일본 애들은 그야말로 빛의 속도로 승진시켜주더라고.
그때 진짜... 내가 얼마나 열 받았는지...
그렇다고 일본인 직원들의 능력이나 자질이 대단히 뛰어난 것도 아니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고? 그냥 생트집 잡는 거 아니냐고?
뭔 개소리! 걔네들 죄다 내가 밑바닥부터 가르친 애들이거든?
여하튼 나도 2,3년 지나면서 나름 고참대접을 받기는 했어.
일본인이건 조선인이건 현장일 배우려면 일단 나부터 찾아와야 했거든.
근데 내가 열여덟, 아홉 되는 일본인 신입들한테 일 가르친지 1년 반쯤 됐을까?
갑자기 하급관리직 승진자 명단에 그 일본 애들 이름이 주르륵 올라있는거야.
그것도 알바에서 평직원을 거쳐서 하급관리자가 되는 데까지 고작 1년 반만에!
거꾸로 조선인은 몇 년을 일해도 하급관리자가 아예 없다시피 한데, 새파란 20대 초반의 일본애들이 하급관리자 자리를 모조리 꿰찬 거지. 승진은 완전히 물 건너갔다고.
거참... 뭐랄까, 말 할수록 기분 참 더럽네.
하여간 승진하고 나서도 얼마동안은 내 앞에서 쭈뼛쭈뼛하면서 이 선배...어쩌고 하던 일본 애들이 말야. 어느 순간부터는 모가지에 무슨 철봉이라도 집어넣었는지 뻣뻣하게 굴기 시작하는 거야.
-어이. 이씨! 일루 좀 와봐!
-뭐야? 이 새끼야! 형님한테 말하는 버릇장머리 봐...
-아, 아뇨... 위에서 그렇게 부르래요.
-위에서 누가? 어떤 새끼가 그런 말을 해!
-고등관(일본인 중급관리인) XX가요.
-...알았다. 가서... 일 봐라...
난생 처음 받는 정신적 쇼크였어.
사실 철도원 시절만 해도 난 조선인입네, 일본인입네 따지는 게 우습다고 여겼거든. 오히려 개뿔도 없으면서 서로 양반입네 상놈입네 따지는 조선인들이 더 웃긴다 싶었어. 오히려 한창 인정받고 일 할 때는 일본사람 편도 꽤 들었지.
-아. 일본사람들은 양반, 상놈 안 따지고 확실히 능력위주로 일을 시키는구나.
근데 이거, 막상 승진시기가 오니까 왜놈들이 조선인들을 대놓고 차별하네?
그런 생각을 평소에 별로 해 본적이 없었으니까 더 당혹하더라고.
왜냐고? 내가 그때까지는 이렇다 할 차별을 당해본 적이 없으니까!
막상 차별이란 걸 내가 직접 당해보니까 얘기가 180도 달라지더라고.
그때부터라고 하는 것도 좀 쑥스럽기는 한데, 친한 일본 애들한테 불만이 있기보다는 걔네들 나라인 일본 자체에 좀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어.
-뭐지? 조선인은 일본인과 같다며! 근데 이게 뭐야, 사람 열 받게!
근데 딱 거기까지였어.
나는 그 때까지만 해도 사회구조가 어떠니 차별이 어떠니 하는 건 전혀 관심이 없었거든. 걍 직장에서 처음 당하는 차별이라서 화가 좀 많이 났을 뿐이었어.
아. 근데 더 이상은 짜증나서 취조 못 받겠네. 좀 쉬자니까 그러자고 하더라고. 뭐. 검사나 형사도 사람이니까 쉬고 싶겠지. 하루 종일 나를 쥐어 짜 대느라 얼마나 힘이 들었겠어. 작가도 참 좋아하겠어. 오늘은 여기까지 써놓고 좀 쉬면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