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 오래 전, 길게는 20년 전부터 짧게는 5년 전 일까지 과거의 기억을 뒤져가며 은퇴록을 올리다 보니, 아예 까먹은 것도 있고 기억은 나는데 앞뒤가 안 맞는 것도 있고 하여튼 기록을 남긴다는 의미 외에는 완전 개판이라는 생각이 드는 글에
많은 호응을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꾸벅. (--) (__) (--)
사실 '은퇴록'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그나마 섬뜩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여섯 개가 전부라, 나머지는 가볍고 별로 재미 없는 이야기들 뿐이다. 그나마 기억나는 것들은.
오늘은, 정말 오랫동안 잊고 있다가 영화 [화려한 휴가] 덕분에 생각난, 망월동에서 소나기 맞다가 만난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누었던 꼬마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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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의 할아버지는 망월동에서 쉬고 계셨다. 사실, 꼬마가 태어나기도 전에, 꼬마의 아빠가 중학교 때 할아버지는 돌아가셔서 꼬마는 할아버지가 어떻게 생긴지도 모른다.
그 날은, 추석을 틈타=_=;; 꼬마의 아버지가 먼 거리를 달려 망월동 국립묘지로 꼬마와 가족들을 데리고 간 날이었다.
가족들은 묘역 앞에서 찬송가를 불렀고 꼬마는 찬송이 끝난 후 가볍게 주변을 돌아보며 가족들과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뭔가 재밌는 것을 봤는지, 잠시 가족들과 떨어진 곳으로 달려갔고 갑자기 하늘이 휙 어두워지더니, 폭우가 쏟아졌다.
꼬마는 정신없이 달렸고 - 보통 그럴 때는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지 않나? 그런데 그 꼬마는 뭐 때문인지 가족들 반대편으로 달렸었다. 참 지금이나 그때나 겁도 없다. 아마도 가족들보다 피하려는 곳이 더 가까웠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꼬마가 엉뚱한 곳으로 뛰어가면 가족들이 쫓아 와야 안카나? 하지만 지금 생각나는 것은, 꼬마는 처마 비슷한 곳에서 비를 간신히 피하다가 웬 할아버지가 우산을 들고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있는 모습이다.
"아가야, 아가 이름이 뭐니?" "ㅇㅇㅇ이요." (아오이 아님...-_-;; 그냥 공란 공란 공란이라는 표기일 뿐임) "아가 아빠는 어디 갔니?" "아빠는 차 있는 곳으로 갔어요."
꼬마는 또박 또박 대답을 했고 할아버지는 그런 꼬마를 대견하게 내려다 보며 우산을 씌워 주었다.
"아가, 아빠한테 돌아가야지?" "비가 많이 와서 못 가요." "그럼 가자. 할아버지가 데려다 줄게." "엄마가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말랬어요."
참 당돌한 꼬마다. 기죽지도 않고 그렇다고 건방지지도 않고 따박따박 말대답 하는 것이 김부장의 분노를 부르는 지금 모습 그대로다. -_-;;
꼬마가 아직도 그 때 일을 기억하는 이유는, 바로 그 할아버지가 남긴 다음과 같은 말 때문이었다.
"그래, 아가는 날 모를수도 있겠지만, 난 아가를 잘 알아요. 가자."
할아버지는 우산을 씌워 주며 손을 내밀었고, 꼬마는 그 손을 잡고 할아버지를 따라 걸었다. 할아버지의 손은 섬찟하리만치 차가웠지만, 곧 내 손보다 더 따뜻해졌다.
"할아버지 손이 차요." "응, 찬 데 오래 있어서 그래."
묘지의 길을 이리저리 가르며, 할아버지와 꼬마는 엄마가 어제 숙제 내준 것 안-_- 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누나가 뺏어먹은 과자에 대한 대가로 누나의 서랍에서 꺼내온 백 원 짜리의 처리를 고민했으며 등급 관계 없이 당일 2000만원 입금...은 아니고 하튼 뭐 이런저런 꼬마의 고민을 나눴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아빠 알아요?"
아마 이제 아빠 좀 씹으려고 꼬마가 한 말이었으리라.
"응, 할아버지는 네 아빠 아주 잘 알지. 언제나 미안해."
그러고 갑자기, 할아버지가 우셨다. 처음에는 인상만 구겨지시더니, 점점 눈물을 흘리시더니, 아주 구슬프게 우셨다. 눈물이 턱을 따라 떨어지고, 키 작은 꼬마는 서서 우는 할아버지의 얼굴에 손이 안 닿아 닦아주고 싶은데, 닦아줄 수도 없고 그냥 올려다보고 있었다.
"ㅇㅇ야!"
갑자기 바람같이 엄마가 꼬마를 부르는 소리가 났고 꼬마는 엄마를 돌아보았다. 유쾌상쾌통쾌 메가패스의 속도로 엄마는 꼬마를 향해 달려왔고 꼬마는 할아버지에게 우리 엄마에요, 말하려고 했었다.
할아버지도, 우산도, 아무 것도 없었다. 아니, 하나 있었다. 할아버지의 묘석.
꼬마는 어느새 할아버지의 무덤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광속으로 달려온 엄마는 꼬마를 무차별 난타하기 시작했다. 어디 갔었냐, 엄마한테서 떨어지지 말라 그랬지, 내가 너땜에 죽겠다, 죄송해요, 안 그럴께요, 아파요.
이후 가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자 꼬마가 사라졌더랜다. 가족들은 난리가 났고, 폭우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안 그래도 음침한 묘지에서 꼬마를 잃고 부모는 얼마나 헤맸을까. 전 가족에, 묘지 관리인까지 나서서 비 오는 무덤을 뒤져도 꼬마가 안 보여 억장이 무너지려는 찰나, 갑자기 꼬마의 엄마는 다시 할아버지의 무덤으로 달려갔다. 아마, 어머니의 신끼가 발동되었던 것 같다.
꼬마는, 할아버지의 조그만 무덤 옆에 서 있었다.
나중에 꼬마가 사이비 퇴마사 일을 하면서, 엄마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그때 나 안 젖어있지 않았냐고. (할아버지가 우산 씌워 줬으니까.) 엄마는 기억이 안 난다고 하면서도 내가 그 때 그 공포스런 귀신들이 바글바글한 묘지에서 길을 잃지 않고 변고를 당하지 않은 것은 할아버지가 지켜주셔서 그랬다고 굳게 믿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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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이 있다면, 수호신도 귀신일까? 나쁜 짓을 하는 것들이 귀신이고, 수호신은 따로 있는 존재가 아닐까? 아니, 억울하면 귀신된다고 하니까, 모든 귀신이 다 나쁜 것은 아닐텐데,
도대체 내 눈빛은 어떤 귀신을 몰아내는 것일까?
적어도, 그 원한서린 묘지에서 날 지켜줬던 할아버지는 내 눈빛을 보고도 날 피하지 않았다. 아마 아주 어렸을 때라서 그랬을수도 있고, 아니면 영혼이 닮아서일수도 있고. 얼굴이 얼(영혼)이 사는 굴(동굴)이라서 얼굴이라는데,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난 할아버지와 아주 똑같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그 날 이후 꼬마가 우연히 시골집에서 할아버지 영정 사진을 보고 아무도 그게 할아버지 사진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음에도 단숨에 할아버지 사진이라는 것을 맞춘 것은 아닐까 한다.
얼굴이 똑같아서일수도 있고, 그 날 뵌 분이 그 분이라 그랬을수도 있고.
어쨌든 내 믿음은, 수호신은 귀신이 아니다, 따라서 난 아직도 한 번도 귀신을 본 적이 없다는 우기기. 믿음의 본질은 우기기라던데.
다음 이야기는 내 이야기가 아니라, 어머니의 신끼 이야기. 면식 수행은 하루 두 끼, 잡담도 하루 두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