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준비도 많이했고 역대 유목국가들의 한반도를 침공한 사례도 쭉분석했을겁니다.. 그리고 대놓고 목적을 국왕하나를 붙잡아서 항복을 받는걸로 했기때문에 모든걸 제쳐두고 도성으로 진격을해서 한양을 포위해서 항복을 받아내는걸로 했고 그래서 이것저것 모두 제쳐놓고 최대한 빨리 도성으로 진군하는데 포커스를 맞추었죠.. 진격할때 병사1인당 말3세마리로 몰고 이동하면서 번갈아가면서 이동하는방식으로 진군했다고 들었습니다. 예전 칭기즈칸의 몽골기병이 전세계를 휩쓸시절에 썼던 기동방식이었구요...
정묘호란때와 달리 빠른 진격은 이괄의난과는 무관합니다. 둘다 이괄의난 이후에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죠. 다만 차이점은 정묘호란 당시 서북지방에서 각 읍성을 공략하면서 늦어져 결국 강화도로 몽진한 조정과 화의를 맺은것의 경험으로 병자호란때는 청군이 조선군과 접전을 회피합니다. 따라서 교전없이 진군한 결과 시간이 많이 단축되었죠. 문제는 조선입장에서 파발의 속도와 차이가 없어 속절없이 당했다고 봐야합니다. 청군이 한양에 당도하기 전날 파발이 도착을 하니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거에요.
서북지방의 방어병력이 적은것은 이괄의난과 관련이 있으나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이나 같은 조건이었습니다. 청이 전술을 바꿨다는 편이 옳습니다.
두 호란의 패배가 이괄의 난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것은 아니나 이괄의 난 이후 조선입장에서 시간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다만 서북지방에 병력을 증강하기보다는 한양을 중심으로 경기권을 강화합니다. 일종의 경험에서 나온 결과이지만 서북에 병력을 배치했다 해도 청의 진군방식이라면 결과가 바뀌진 않았을것같습니다.
병자호란때도 여러제파로 나누어 진군하였고, 그중 일부는 막혔지만 주력은 그대로 밀고 내려옵니다. 천년이상 사용하던 읍성이나 산성위주의 방어전략이 완전히 무력화된 첫 사례라고 할 수 있죠. 이전까지의 전쟁에서 산성중심의 방어전은 유효했습니다.
장성을 만들어 지키는 방식이 아닌 거점방어 전략으로는 한계가 분명 있습니다. 임란이후에 조령에 관을 세운것도 길이 그쪽뿐이라 가능한 일이지 서북지역의 길목은 저지선이 마땅히 없는것도 아쉬운점입니다.
남한산성을 한바퀴 돌아보고, 청군이 대포를 올려 성내로 포격하였다는 벌봉을 가본바로는 남한산성 자체는 괭장한 천연요새로 공략이 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벌봉을 뺏겨 성내로 포격이 가능하게 두었다는 점과 성내 군량미 부족이 가장 아쉬웠습니다. 둘레 12km의 산성(일반적인 산성은 둘레가 2~4km정도가 대부분입니다.)이라면 충분히 버틸만 했을건데요. 당시 조선의 국력이 중국을 점령하는 청에 비해 약함은 어쩔수 없이 같은 결과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국력도 국력이지만 조선이 패착이란 패착은 모두 빼 놓지 않고 저질러 버렸다는 게 청태종으로써는 행운이었던 듯 싶더군요. 서북지역을 강화하지 않고 수도방위병력을 강화한 개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병자호란을 맞이하여 수도방위를 위한 병력이 그다지 충분하지도 않았고 그나마도 조직적으로 방어선을 펴서 방어를 한 게 아니라 허겁지겁 남한산성으로 피하기 바빴다는 건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적어도 임진강 선에는 방어선을 구축해 뒀다가 청군이 도하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할 거 아닙니까? 헌데 그거 하나두 없었죠. 임진강이 천혜의 요새인게 강안이 거의 절벽입니다. 강이 얼어붙었다 하더라도 강둑 자체가 천혜의 요새가 되는 지형이지요. 남한산성에 쓸 군량미 창고를 산 아래 둔 건 어이없을 지경입니다.
청의 선발대가 급속진격하여 강화도로 가는 길을 막았을때, 인조는 용기를 내어 그마나 수도권에서 모을 수 있는 대병력을 이끌고 강행돌파를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청의 선발대는 고속진격하느라 매우 지친 상태였고, 전력도 말 그대로 선봉대에 불과하니 그 수도 그리 많은 실정이 아니었죠. 하지만 인조는 겁을 내어 강화도로 가는 걸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급히 길을 돌려 버립니다. 군주의 일인지라 반대하는 의견이 당연히 나올 수 있었지만 이를 결정하는 건 무엇보다도 군주의 결단이거든요. 청군의 진격에 대단히 극심한 공포를 느꼈음에 틀림없습니다.
벌봉의 피탈은 남한산성 수비대의 사기를 급속히 저하시키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봅니다. 비록 당시의 포환은 실체탄으로써 후대의 유산탄과 같이 광범위한 피해는 주지 않는다 하나 성 안에 있는 사람들로써는 청군이 남한산성을 내려다보면서 언제 어디든 타격할 수 있다고 느끼게 된다는 거 자체가 공황을 유발할 수 있는 일이기두 합니다. 실제로 사기는 대단히 저하되었다 합니다. 물론 성안의 병력이 충분하다면 출격하여 다시 탈환을 기할 수 있겠지만 경솔한 김류의 판단으로 출격한 조선군이 매복한 청군에게 대패했던 일 때문에 당시에는 엄두조차 못 내는 상황이었죠. 강화도 함락소식이 항복을 결정하게 된 방아쇠이긴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오래 버티지는 못햇으리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