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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천황 즉위식
오늘은 평소처럼 취조 받고 있는데 다른 날하고는 분위기가 틀려.
새로 죄인이 들어왔는지 고문하는 소리가 내 방에까지 다 들려.
하루 종일 으헠,후앜하는데 이거야 원 시끄러워서 제대로 취조를 받을 수가 있나.
-어째 좀 시끄러운데? 이러면 제대로 취조에 응할 수가 없겠는데...?
-야! 거기 좀 조용히 시켜! 시끄러워서 취조를 못 받겠다잖아!
눈치 보니까 딱 견적이 나오지?
죄인 중에 천황을 죽이려고 한 내가 가장 중요했던 거지.
이 정도면 죄인갑?
뭐. 처음에야 죽일 듯이 때리고 갖은 고문을 다 하더니만 요새는 꽤 잠잠해. 그렇다고 아예 안 맞는다는 건 아니고.
하여간 조만간 죽을 놈이 잔머리 좀 굴린다고 뭐랄 사람은 없으니까.
검사나으리라고 별수 있나?
수사기한은 정해져 있지, 나한테 뭐 하나라도 더 건져내지 못하면 지들 모가지가 열 개라도 남아나지 않을 거 아냐.
근데 검사는 사람이 아닌가? 애들 키워야지. 공부시켜야지. 돈이 한두 푼 들어가냐고. 천하에 무섭다는 그 시절의 일본검사도 직장하고 월급봉투 앞에서는 꼼짝도 못해. 그러니 내가 진술을 거부하거나 하면 수사진척이 안되니까 얼굴이 막 타들어가는게 눈에 보여. 내가 아무리 처자식이 없다고 해도 그 정도는 눈치로 알거든.
이런 걸 가만 보고 있으면 말야.
사람 사는 게 정말 우습다는 생각도 들어.
천하에 무서울 게 없다는 저 대일본제국의 검사나으리께서 일개 조선출신 막노동꾼인 내 눈치를 다 보더라고.
그건 그렇고. 하던 얘기나 마쳐야지?
그럭저럭 잘 지내던 시절이라 대충 눌러 앉을까 싶기도 했어.
내가 일본말을 꽤 잘하니까 같은 조선인에 비해서 대접도 비교적 괜찮고 일단 자기 일만 열심히 잘 하면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 분위기였거든.
그러다가 어느 날 친구 순평이한테 연락이 왔어. 천황즉위식에 구경 갈 건데 같이 가자고 하더라고.
원래 순평이는 예전에 나처럼 일본인 행세를 하던 조선인이었는데, 일본말이 너무 자연스러운 데다가 아예 이름도 야마즈미라고 하니까, 나도 처음에는 걍 일본인인가보다 했지. 근데 알고 보니까 같은 조선인인거야.
-에혀. 니 신세나, 내 신세나...
바로 의기투합했지 뭐.
말 나온 김에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마에다라는 일본인 친구도 같이 가자고 얘기가 다 됐어. 얼추 구경 갈 사람도 모았겠다. 이제 가는 일만 남았지.
여행 보따리 하나만 챙겨서 냉큼 교토로 달려갔어.
거. 뭐랄까. 그 때 교토의 분위기는 한마디로 어마무시하더라고.
자기네 나라 임금이 즉위식을 해서 그런지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어.
사람들이 거리에 넘쳐나고, 화려한 천황 즉위식 선전간판에 무지하게 큰 일장기가 곳곳에 걸려 있더라고. 하여간 이렇게 큰 국가행사는 평생에 한번 볼까말까 해.
어차피 일본까지 온 거, 까짓거 일본 임금 얼굴이나 한번 보자 싶었는데 생각보다 구경거리도 엄청 많고. 역시 오기를 잘 한 것 같아.
근데 교토에 도착한 시간이 너무 늦어서 자정을 훌쩍 넘겼지 뭐야.
그래도 즉위식 구경 온 사람들이 워낙에 많아서인지 한밤중인데도 거리가 북적북적 하더라고. 그때 처음 대낮같이 밝다는 게 어떤건지 교토에서 확실히 봤어.
그래도 잠은 자야겠기에 현지에서 숙소를 알아봤는데 일본 최대의 행사를 코앞에 둔 교토에 숙소가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한 우리가 바보지.
그러니까... 어디 갈 때는 확실히 예약하고 가는 습관을 들이자고. 응?
그 때가 내 나이 스물 일곱이였어. 순평이하고 마에다도 비슷비슷한 나이였지.
우리 셋은 다들 젊었고 무모한데다가 엉뚱하기까지 했지.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가 참 좋았더라고.
숙소가 없다니 별수있나. 걍 밤새는거지.
밤새 교토 시내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면서 다녔는데 도시전체가 축제분위기라 심심하진 않았어.
공원에도 가봤다가, 배고프면 밥 사먹고 술도 좀 마시고 여기저기 구경도 하다 보니 금세 아침해가 뜨더라고.
자. 이제 슬슬 참관식장에 가봐야겠다 싶었지.
물론 여기서 천황 즉위식 구경 갔던 얘기가 끝난 건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천황 즉위식을 보러가서는 갑자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냅다 천황에게 폭탄을 던졌느니 하는 쓸데없는 상상은 하지 말아주었으면 해.
내 얘기는 아직도 한참 남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