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부의 동요 팍스 로마나가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모든 로마인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아니, 정직하게 얘기하자면 제국의 영광 뒤에는 희생만을 강요 당해온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마찬가지로, 로마는 당시까지 역사에서 등장한 제국 중 가장 평민들이 살기 괜찮은 제국이었다. bc73년에는 노예들의 반란이 있었다.
공화정 말기의 검투사들의 반란을 다룬 미드 <스파르타쿠스>. 주연 앤디 위필드가 사망하고 맥킨타이어가 스파르타쿠스 배역을 맡아 진행한다. 이 반란은 로마군이 3년간이나 진압에 매달릴 정도로 심각했고, 이 때 사로잡힌 6000명의 노예는 카푸아에서 로마로 이어지는 길 위에 줄지어 십자가에 매달리는 형벌을 받았다. 속주에서도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는 대부분 가혹하고 무자비한 폭정에 대해 생존을 위하여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브리타니아의 보아디케아 여왕의 반란, 아우구스투스 대에 판노니아에서 일어난 반란이 이런 경우다. 알렉산드리아는 반란과 폭동이 극심하게 잦아서 일일이 얘기하기조차 어려울 지경이다. 유대인 역시 번번이 좌절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독립전쟁을 벌였다.
티투스 개선문에 부조로 조각된 예루살렘 성전 약탈 장면. 티투스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했음에도 유대인 반란은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 시대에도 일어났다. 유대인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와 같아서, 가장 다루기 어려운 민족이었다. 2. 경제 로마인들은 오랫동안 풍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다키아에서 금광이 발견된 것같은 일은 물론이고, 지중해무역이 활발한 것, 국경지대에 있는 주둔지가 시장으로 변한 것이 주요원인이다. 평상시 세금은 그럭저럭 낼만했지만, 전쟁이 일어나면 전시물자의 징발이나 강제징집, 조세부담이 극심해졌다. 카르타고 전쟁 이후 도입한 노예농장은 로마경제의 원동력이 되었지만 정복이 한계에 도달하여 노예수입이 끊기자 이는 생산량 감소로 이어졌다. 당시의 농사기술은 매우 낙후한 것이어서, 농업이 활발할 때조차도 생산량이 풍족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포도주 수송용 항아리다. 이런 형태의 항아리가 로마제국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된다. 포도주는 로마인들의 식사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다. 3. 군대의 역할 로마제국의 모든 것은 군대에 의해 좌우되었다. 로마의 사회와 문화는 군국주의를 본질로 했다. 600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로마제국이 변모한만큼 로마군 역시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는 군이 병역의무에 의존하지 않고 장기복무를 하는 정규군의 성격으로 탈바꿈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속주 출신의 군인이 늘어났다. 로마의 군인으로 군역을 마치고면 어느 정도의 명성과 부,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속주인들이 군에 들어가는 것은 추천장이 필요할 정도로 치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