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전문적 훈련을 받지 않은 선량한 시민들이 34개의 무기고를 어떻게 4시간만에 터냐?
북한의 개입이 분명히 있었던 '폭동'이 맞다.
@ 그래. 털었다. 진짜로 털었다. 근데 그 당시 무기고를 털었던 사람들은
'간첩죄'가 아닌 '내란죄' 명목으로 잡혀갔다.
간첩들을 옥에서 내란죄 이름으로 밥먹여주다 내보낸 전두환이 좌빨이였네.
그리고 무슨 무슨 사단에서 털어갔다!! 드립치는데,
턴 무기고의 대부분은 '예비군 무기고'
※2) 북괴새끼들이 공작원을 3팀으로 나누어서 광주에 내려 보냈음.
그거 탈북자가 증언했는데 진짜 북괴간첩과 함께한 폭동이네
@ "당시 대남공작총책이었던 김중린 비서(훗날 아웅산테러 실패와 전두환에 대한 여러가지 공작 실패로 김일성-김정일 부자로 부터 "똥물에
튀겨죽일놈"이란 낙인이 찍히고 숙청당함)가 1200명 정도의 특수부대를 차출해서 남한의 광주에 침투시켜서 사태를 격화시키고자 시도했었다."
"실제로 일선급 특수부대에서 인원선발도 끝났고 세부계획도 마련되어있는 상태였지만 북한측이 예상했던 것 보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찍
남측에 의해 진압되어버린 바람에 투입하지 못했고, 김중린은 시기조절(?)에 실패했기 때문에 엄청난 문책을 받았다."
-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강명도 저 中
+ http://www.dayogi.org/?doc=bbs%2Fgnuboard.php&bo_table=hottalk&page=1460&wr_id=151422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19&aid=0000017557
http://www.newshankuk.com/news/news_view.asp?articleno=k2007021120301185542
호오.... 점점 인터뷰가 달라지는군요!
(http://blog.naver.com/jangsp11/100128168118 참조)
※3) 시민으로 위장한 폭도들에 의해서 무고한 시민들이 다치고 피해를 입었다. 폭동이네.
@전남도부지사 등 공무원들이 정상적으로 출근했고
5.18 당시 행정기관 업구 상당 부분이 평소처럼 이루어졌다.
또한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방범활동을 벌여 수천억원이 보관된 금남로 금융가에서
절도등의 범죄는 단 한 차례도 일어나지 않았음.
오히려 공무원들은 광주 시민들을 도와 부상자를 처리하거나
식량 조달에 힘씀.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79&aid=0002151305
※4) 광주 시민들이 교도소 털지 않았니? 폭도잖아.
@남합수단에서 작성한 「광주교도소 습격기도사건」에는
당시 광주교도소에 복역 중인 류락진의 처 신애덕과 동생 류영선이 시위에 가담해
교도소를 습격, 복역 중인 류락진을 구출하도록 선동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특히 류영선은 시위군중과 함께 교도소를 습격하다 총상으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각주1) 그러나 이 개요는 ‘5. 18’을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몰기 위한 의도에서
조작됐음이 위원회 조사결과 밝혀졌다.
류락진이 광주교도소에 복역한 것과,
류영선이 총상으로 사망한 것은 사실이나
당시 신애덕은 합수부에 의해 시위주동자로 예비검속됐던 딸 류소영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각주2) 또 류영선은 소재를 모르는 조카 류소영을 찾으려다 계엄군의 과격진압을 보고 시위대에 합류했다가 5. 21.
전남도청 앞 발포로 머리에 관통상을 입고 사망했다.
류영선이 사망한 후 그의 가족들은 차례로 전남합수단에 불려가
류영선이 류낙진을 구하기 위해 시민군을 선동하고 교도소를 습격했다는
혐의와 관련하여 심문받았다고 한다.
(각주3) 당시 전남합수단에 근무했던 505보안부대 대공과
수사관 출신은 우리 위원회와의 면담조사에 그 같은 일이 있었으며 류소영이 시집가기 전까지 605보안부대에서 감시했다고
진술했다. (각주4)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12.12 5.17 5.18 조사결과 보고서, 118쪽)
오히려 5월 21일 오후 5시 30분부터 공수부대가 교도소로 도주하였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네.
공수부대가 좌빨이네.
※5. 윤기권인가 하는 개새끼, 5.18 유족 보상금 받고 북한으로 튀었다. 그 놈 간첩이 확실하다.
@윤기권 생일 : 1962년 1월 16일, 당시 나이 만 17세
이 새끼 정신병자 판정 받음. 태어났을 때 북에서 태어나서 간첩교육을 받았을 확률 제로.
광주에서 국민학교 중학교 모두 졸업.
※6. 시위대가 먼저 공수부대를 공격했다. 이것이야말로 폭동의 증거다.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273631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첫 번째 희생자 청각장애인 김경철
http://www.ilbe.com/4439746 일베는 이런글에는 댓글 안다나보지 ^^? ※7. 선량한 시민들이 어떻게 장갑차와 탱크를 운전하느냐. 당연히 훈련받은 간첩이다.
@ 당시 시민군이 탈취한 KM900은 도시방어에 쓰이는 경찰용 장갑차.
장륜식 장갑차로서 중소 트럭을 운전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음.
※8. 5.18 당시 AK가 14정 사용됬다는데, 그거 소련거 아니냐
@ 도서관을 찾아도, 신문을 찾아도, 5.18 재단에서 찾아도, 조갑제 닷컴에서 찾아도
공식적인 기록이 안나온다.
단지 정사갤과 일베에서만 나올뿐.
이것좀 설명좀 해봐라. 나도 도저히 모르겠닼ㅋㅋㅋㅋ이건
※9. 오오미 성님 반박 잘한당께 하지만 북한에서 5.18 30주년을 기념했당께
@ 부칸은 4.19 혁명 - 부마항쟁 - 5.18민주화운동 - 6월 민주항쟁 과 같은 남한의
민주화 운동들을 '공식적으로' 기념한다.
만약 저 민주화 운동시기에 독재에 저항했던 사람들이 모두 좌익 빨갱이라면
지금 대한민국의 재상 자리에 앉아 있는 '가카' 께서도 훌륭한 좌빨 되시겠다.
※10. 아따 전라도는 청소년들한테도 총쥐어 줬당께~ 라도랑께~
@ 우리들이 다시 차를 타고 광주에 왔을 땐 시외곽에서 가져온 총이 일반시민들에게 나누어지고 있었다. 학동과 광주공원에서 총을 나눠준다는 말이 들렸다. 우리들은 학동으로 갔다. 시민군 몇이 주민등록증 등 신분증을 확인한 다음 총을 나눠주고 있었다. 우리들은 각각 카빈 1자루씩을 받았다. 도중에 총이 떨어져 늦게 온 사람들은 받지 못하였다./이관택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485&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C1%D6%B9%CE%B5%EE%B7%CF&sop=and&page=2)
총기로 인한 사고를 막기 위해 23일부터는 시민들이 가지고 있는 총기를 모두 회수해서 주민등록번호를 적은 뒤에 다시 나눠주었다. 언제부터인가 계엄군이 곧 진격해 올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면서부터 분위기가 삼엄해졌다./조성환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482&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C1%D6%B9%CE%B5%EE%B7%CF&sop=and&page=2)
22일날 이영동이라는 친구와 함께 지원동 쪽에서 카빈 총을 지급받았다. 미성년자에게는 지급이 안 되었기 때문에 주민등록증을 제시하여 가까스로 받은 것이다/강대정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444&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C1%D6%B9%CE%B5%EE%B7%CF&sop=and&page=3)
내가 광주공원에서 총을 나눠준다는 소문을 듣고 그곳으로 가보니 주민등록 번호와 총 번호를 적은 뒤 시민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총이 많지 않은 것 같아서 나는 지급받지 않았다./소영두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342&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C1%D6%B9%CE%B5%EE%B7%CF&sop=and&page=3)
※11. 정말 폭도들이 아니였다면 광주시내를 날려버릴만한 TNT폭탄과 다이나마이트는 왜 설치한거냐?
진짜 좌빨새끼들이네
@
당시 광주시민이 다이너마이트를 가져온 이유는 계엄군의 도청 진입을 막기 위해서 였습니다.
일단 시민이 어떻게 다이너마이트의 조립이 가능하냐는 주장도 있는데, 폭약 제조를 담당한 사람이 화순광산 직원 12명이었기 때문입니다.
도청에 옮겨진 다이너마이트의 경우 떡밥과 뇌관을 연결했지만, 마지막으로 연결하는 도화선을 연결하지 않았죠. 그렇기에 절대로 폭약이 터질리 없었습니다. 다음은 당시 다이너마이트를 관리한 신만식씨 증언입니다.
떡밥과 뇌관 결합작업을 벌인것은 사실이지만 도화선을 연결하진 않았다. 형식적으로 다이너마이트 인근에 연결된 것처럼 보이게 해뒀을 뿐이다. 만약 담뱃불이라도 떨어지는 날이면 광주시내가 온통 불바다가 될게 뻔한데 그런 위험한 일은 할수가 없었다. 애초부터 다이너마이트는 위협용이었지 사용돼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시민군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http://cafe.naver.com/enature/21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70116104502&Section=03 980년 당시 광주시내 모 탄약창에 근무하던 배 씨는 계엄군의 도청 탈환작전 직전인 5월 24일 "전남도청 지하실에 설치된 엄청난 양의 폭약을 제거해 달라"는 시민군 속 온건파 학생들의 요청을 받고 죽음을 무릅쓴 채 현장에 들어가 2000여 개의 다이너마이트와 450여 발의 수류탄 ★뇌관★을 제거한 공을 세워 그해 보국훈장 광복장을 받았다. '''''
뇌관 : 도화선의 열로 폭약을 기폭(起爆)시키는 도화선의 끝에 연결되고 폭약 속에 삽입된 관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지난해 말 서울행정법원은 "폭약 ★신관★을 제거해 시민의 생명과 재산 피해를 방지한 배 씨가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한 공로로 훈장을 받았다고 할 수 없어 서훈취소는 부당하다"고 판결, 명예를 되돌려줬다.
신관 : 탄환·폭탄·어뢰 등에 충전된 폭약을 점화시키는 장치
도화선 연결한 적 없음.
있었다면 도화선을 먼저 안전하게 처리한 후 뇌관 -> 신관순서로 갔음.
피곤해서 더이상 못하겠네
더 씨부릴거 있으면 아래에 댓글 달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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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디싼 말투 써서 죄송합니다.
정말 오늘만큼은 이 새끼들이
5월의 영혼들을 모욕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글 작성하였습니다.
저녁 먹고 나서부터 적었는데 1시쯤에 작성 완료하였습니다.
긴 글 읽어주시고 진실을 알아주신 당신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