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침하게 흐린 품이 눈이 올 듯하더니 눈은 아니 오고 얼다가 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었다. 이날이야말로 서울시 안에서 고딩노릇을 하는 김 고딩에게는 오래간만에도 닥친 운수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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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술형에 삼십 점, 객관식에 오십오 점... 이제 컬컬한 목에 물 한 잔도 적실 수 있거니와 그보다도 앓는 평균에게 대박 한 과목도 보여줄 수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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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평균이 기침으로 쿨럭거리기는 벌써 3년이 넘었다. 미양가를 먹다시피 받는 형편이니 물론 컨닝 한 번 써 본 일이 없다. 구태여 쓰려면 못 쓸 바도 아니로되 그는 점수란 놈에게 컨닝으로 보내면 재미를 붙여서 자꾸 한다는 자기의 신조(信條)에 어디까지 충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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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학원에게 보인 적이 없으니 무슨 병인지는 알 수 없으되 반듯이 수평을 유지하고, 아무리 자습해도 오르지를 않는 것을 보면 중증은 중증인 듯. 평균이 이대도록 심해지기는 시험 며칠 전에 조밥을 먹고 체한 때문이다.(김고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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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부터 수학이 땅긴다, 등수가 켕긴다고 눈을 홉뜨고 지랄병을 하였다. 그때 김 고딩은 열화와 같이 성을 내며, “에이, 오라질 년, 깔창은 할 수가 없어, 중간고사에 병, 기말고사에 병, 어쩌란 말이야!” 하고 김 고딩은 앓는 성적표의 앞면을 한 번 후려갈겼다. 다음 성적은 조금 바루어졌건만 성적표에 이슬이 맺히었다. 김 고딩의 눈시울도 뜨끈뜨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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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있는데 왜 풀지룰 못하니... 라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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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깔창이 그러고도 유지되는 데는 물리지 않았다. 사흘 전부터 채점용 빨간 펜으로 채점하고 싶다고 김고딩을 졸랐다. “이런 오라질 년! 깔창도 못 벗어나는 년이 빨간펜은, 채점해보고 지랄병을 하게.” 라고, 야단을 쳐보았건만, 못 사주는 마음이 시원치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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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미치겠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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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 빨간펜을 사줄 수도 있다. 앓는 성적 곁에서 배고파 보채는 수학에게 동그라미를 쳐줄 수도 있다. 뽀록 성적을 손에 쥔 김 고딩의 마음은 푼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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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서 <김고딩!>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난다. 자기를 불러 멈춘 사람이 그 학교 물리시험인 줄 김 고딩는 한 번 듣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시험은 다짜고짜로, “중력을 구하는 공식이 뭔가”라고, 말했다. 아마도 그 학교 교무실에 있는 물리가 문제내려 함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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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 말씀입니까.”하고 김 고딩은 잠깐 주저하였다. 그는 이 우중에 겜방도 못 가고 다시 공부해야 하는게 싫었음일까? 아니다, 결코 아니다. 이상하게도 꼬리를 맞물고 덤비는 이 문제 앞에 조금 겁이 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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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집을 나올 제 평균의 부탁이 마음에 켕기었다. 그 수평만 남은 그래프에 유일의 생물 같은 유달리 크고 움폭한 특기과목에 애걸하는 빛을 띠우며 “오늘은 떨구지 말아요. 제발 중간이라도 붙어있어요. 내가 이렇게 낮은데…… 라고, 모기 소리같이 중얼거리고 숨을 걸그렁걸그렁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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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중력 구하는 공식이 얼마냔 말이요? 하고 시험은 초조한 듯이 김고딩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김고딩은 혼잣말같이 “분명히 00페이지니까...”라고, 중얼거린다. "(질량)(중력가속도)가 나오는뎁쇼..." 이 소리가 저도 모를 사이에 불쑥 김 고딩의 입에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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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입으로 부르고도 스스로 그 엄청난 공식에 놀래었다. 이런 공식이 기억나 본 지가 그 얼마만인가! 그러자 그 공식부를 용기가 평균에 대한 염려를 사르고 말았다. 설마 이번 주내로 어떠랴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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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났다. 임팩트있게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데...
[중략] 마침 길가 매점에서 그의 친구 치삼이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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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게 김 고딩, 자네 시험 대박터진 모양일세. 점수 많이 벌었을 테니 한 개 뜯게나.” 김 고딩은 이 친구를 만난 게 어떻게 반가운지 몰랐다. 시험문제 예상을 미리 알려준 은인이나 무엇같이 고맙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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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벌써 한개 뜯은 모양일세그려. 자네도 오늘 재미가 좋아보이. 하고, 김 고딩은 얼굴을 펴서 웃었다. “압다, 시험 망했다고 못 먹을 낸가. 그런데 여보게, 자네 머리가 왜 중추스팀 과열상태로 되었나? 어서 들어와 머리좀 식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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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점은 훈훈하고 뜨뜻하였다. 커피를 데우는 온장고를 열 적마다 뭉게뭉게 떠오르는 흰 김, 입구에 놓여진 온갖 빵이며, 포테이토칩이며 아이스크림이며…… 이 너저분하게 늘어놓인 과자더미에 김 고딩은 갑자기 속이 쓰려서 견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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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대로 할 양이면 거기 있는 모든 먹음 먹이를 모조리 깡그리 집어삼켜도 시원치 않았다. 하되 배고픈 이는 우선 분량 많은 로켓단의 초코 두 개를 쪼이기도 하고 레츠비를 한 캔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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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린 창자는 음식맛을 보더니 더욱더욱 비어지며 자꾸자꾸 들이라들이라 하였다. 순식간에 초코맛이 가득한 빵 한 덩어리를 그냥 물같이 들이키고 말았다. 김 고딩의 눈은 벌써 개개 풀리기 시작하였다. 치삼은 의아한 듯이 김 고딩를 보며, “여보게 또 먹다니, 벌써 우리가 넉 개씩 먹었네” 라고 주의시켰다. “아따 이놈아, 오늘 내가 뽀록이 막 터졌어. 참 오늘 운수가 좋았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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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얼마나 터졌단 말인가?” “세번이나 터졌어, 세번이나! …괜찮다 괜찮다, 막 먹어도 상관이 없어. 오늘 시험이 대박났는데” “어, 이 새끼 미쳤군, 그만두세.” “이놈아, 이걸 먹고 미칠 나냐? 또 뜯어, 또 뜯어.”라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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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고딩는 폭식함에도 불구하고 빨간펜을 사가지고 집에 다달았다. 만일 김 고딩이 뽀록이 터지지 않았다면, 한 발을 대문에 들여놓았을 제 그곳을 지배하는 무시무시한 정적(靜寂), 폭풍우가 지나간 뒤의 바다 같은 정적에 다리가 떨렸으리라. 움직이는 평균 소리도 들을 수 없다. 그르렁거리는 엄마 잔소리조차 들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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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고딩도 이 불길한 침묵을 짐작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전에 없이, “이 난장 맞을 것, 주인이 들어오는데 나와보지도 않아, 이 오라질 것." 이라고 고함을 친 게 수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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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김 고딩는 방문을 왈칵 열었다. 방안에 들어서며 빨간펜을 한구석에 놓을 사이도 없이 목청을 있는 대로 다 내어 호통을 쳤다. “이런 오라질 것, 주야장천(晝夜長川) 유지만 되있으면 제일이야! 뽀록이 터져도 일어나지를 못해." 라는 소리와 함께 발길로 누운 평균의 성적표를 몹시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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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발길에 채이는 건 올라간 평균이 아니고 나무등걸과 같은 느낌이 있었다. 이때에 빽빽 소리가 응아 소리로 변하였다. 수학이 지탓인 줄 알았는지 갑자기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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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아 소리가 고등교육쪽에서 나는 게 아니고 마치 기초교육쪽에서 나는 듯하였다. 울다가 울다가 목도 잠겼고 또 울 기운조차 시진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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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로 차도 그 보람이 없는 걸 보자 김 고딩은 평균의 머리맡으로 달려들어 그야말로 걸레같은 성적표를 흔들며, “이 년아, 말을 해, 말을! 입이 붙었어, 이 오라질 년!”“…” “으응, 이것 봐, 아무 말이 없네.” “…” “이년아, 유지란 말이냐, 왜 말이 없어.”“…” “으응. 또 대답이 없네, 정말 유지되었나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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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가 누운 이의 흰 종이를 덮은, 유지된 평균을 알아보자마자, “이 점수! 이 점수! 왜 치솟지 못하고 유지만 되느냐!!, 응!!!!" 하는 말 끝엔 목이 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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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시험친 사람의 눈에서 떨어진 닭의 똥 같은 눈물이 유지된 성적의 뻣뻣한 종이를 어룽어룽 적시었다. 문득 김 고딩은 미칠 듯이 평균한테 비비대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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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펜을 사다놓았는데 왜 비가 내리니, 왜 오르질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성적이 좋더니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