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결주의 문화에 대한 기획 기사와 관련하여 여성독자들의 기고 글을 받아 함께 싣는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여성들의 경험담을 통해 순결 이데올로기의 단면들과 허구성, 여성에 대한 억압을 드러내고자 한다. - 편집자주>
성에 대해 모를수록 좋은 것 (30세, 직장인)
한참 아이러브스쿨 붐이 일었을 때다. 초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을 다시 만났다. 우린 스물 여섯이었다. 11살 때 우르르 몰려다녔던 친구들의 성장을 본다는 일은 재미있었다. 꼬마가 남자가 되고 여자가 됐으며 애인이 있거나 없기도 했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각자 자신의 애인 이야기를 했고 남자애들은 자연스레 성경험 이야기를 했다. 언제 첫 키스였으며, 첫 섹스였는지.
나를 포함해 여자들은 아무 이야기도 없었다. 그러자 한 남자애가 “너희들은 언제 처음 자 봤냐”고 물었다. 여자들은 당황해 서로 눈치를 보는 듯 했고 한 여자애가 “난 아직 해보지 않았다”고 말하자, 다른 여자애들도 대강 호응하며 유야무야 넘어갔다. 그 다음은 더 어이가 없었다. 여자애들은 자신의 성적 무지함을 한껏 뽐내며(?) 경험이 많은 남자애들에게 각종 성적 지식을 순진하게 물어봤다. 남자애들은 “스물 여섯이 될 때까지 안 해봤냐”며 미심쩍어(?)했지만 결국 우리 모두가 순결을 지킨 것이 “흐뭇하다”고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우리 모두의 소유권이라도 지닌 듯이.
가끔 그 때 상황을 생각하면 내가 왜 아무런 말을 못했을까 하고 고민하게 된다. 사실 ‘여성은 성에 대해 무지할수록, 순진할수록 가치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한국여자는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오랜만에 만난 동창들 사이에서 ‘가치 있는’, ‘깨끗한’ 여자로 각인되길 바랬는지 모른다. 나 혼자 손을 번쩍 들고 내 성경험은 이랬다고 선언하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남자애들은 자랑스럽게 자신의 섹스경험을 늘어놓고 여자애들은 신기한 듯 촉각을 곤두세우며 그 경험이나 듣고 있던 동창 모임에서, 우리는 동창이기 이전에 명백히 다른 가치를 강요 받은 남성과 여성이었다.
“3년 사귀어도 안 한다” (35세, 유학 중)
섹스가 단순한 사랑의 행위라고 보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 작년에 만난 한 일본인 친구는 “한국여성들은 정말로 3년이 넘게 사귀어도 섹스를 하지 않냐”고 질문했다. 그 질문에 나는 “그런 경우도 보았다”고 답했다.
그 외국인 친구가 이상하게 생각한 점은 무엇일까. 섹스가 사랑의 행위라면 3년 동안이나 사귄 사이에서 섹스가 빠질 이유는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생각을 한 탓일 것이다. 만약 거부하는 이유가 성적자기결정권이란 테두리 안에 존재하는 경우의 수였다면 대답은 간단했을 것이다. ‘그 사람은 하기 싫었나 보다’ 라고. 그러나 그 질문을 받았을 때 내 느낌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았다. 바로 우리 나라의 결혼 풍속도와 순결 이데올로기가 깔려있는 문화적인 특수성을 환기시켰기 때문이다.
결혼하고자 하는 대상 이외에는 성관계를 갖지 않겠다거나, 생식을 위한 성관계만을 인정하겠다거나 하는 의지는 사실상 각자의 자유다. 그렇다면 결혼 전에 섹스를 하겠다거나, 성관계는 즐기는 것이라고 보는 가치관 역시 자유의 영역 아닌가. 여성의 가치가 ‘성’적인 면에 집중되어 있고, 성적으로 순수(?)한가 아닌가가 무척이나 중요한 잣대가 되는 상황에서, 결국 우리에겐 섹스를 할 권리도 하지 않을 권리도 없는 셈이다.
레즈비언은 순결한가? (27세, 직장인)
나는 레즈비언이다. 레즈비언들은 우리 사회의 순결주의 문화 속에서 종종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나는 여성이고, 결혼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몇 명의 사람들과 섹스를 해봤다. 그렇지만 남성과 해 본 적은 없다.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아는가? 내가 '섹스를 해 본' 순결한 여성이라는 얘기다.
솔직히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순결의 기준은 남성의 성기가 여성의 몸에 삽입이 되었느냐 여부다. 더 나아가 처녀막이 터졌느냐의 여부거나 남자가 사정을 했느냐의 여부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도처에 우스꽝스러운 광경들이 벌어진다. 이성애자 여자친구들 얘기를 들어보면 남자친구와 스킨십은 해도 삽입은 하지 않는다는 친구들이 있다. 여성들 중엔 질 삽입을 피하기 위해 남성에게 오랄 섹스를 제공(!)하는 경우도 있다. 남자들 역시 ‘사랑하는 여성의 그것만은 지켜준다’는 비장한 결심을 하기도 한다.
나의 지인들 중엔 내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내가 남자와 섹스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성 경험이 없는 여자 취급을 한다. 즉 아직 ‘남자의 성기가 닿지 않은 여자’, 즉 ‘처녀’이기 때문에 그 부분에 있어서는 일단 안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건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 지.
순결주의 문화는 레즈비언의 성관계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호모포비아에다가, 남성의 성기 삽입을 기준으로 성관계를 이야기하는 무식하고 한심한 성 지식, 그리고 여자의 몸을 남자에게 ‘주는 것’ 정도로 인식하는 성차별주의가 한데 얽혀있다고 생각한다.